64
가장 먼저 느낌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꼬마, 수상쩍은 이야기, 갑자기 생겨난 문. 엔디미온은 성배기사였지만 온갖 초자연적인 일로부터 무덤덤할 수 있는 초월자는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었고 기본적으로 이런 일에 놀라기도 했다. 단지 남들보다 덜 놀랄 뿐이었다.
그는 다시 문고리 쪽으로 고개를 돌린 후에 차분히 생각했다. 문고리는 반쯤 돌아간 상태였고 문틈 사이로 바깥의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주홍색 빛은 촛불이거나 등잔일 것이다. 없던 문이 생겨난 것처럼 아무도 없던 바깥에 사람이 생겨났다는 의미였다.
만약 이곳이 정말로 호안의 말대로 이야기 안이라면 어떤 이야기인가. 아까 호안이 했던 그 이야기? 그럼 자신은 왜 여기로 끌려왔을까?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면 그 안으로 끌려간다는 것이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서? 그럴 리는 없다. 이것은 악마의 짓이고 호안은 어떤 식으로든 악마와 연관이 있었다.
엔디미온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호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새까만 어둠만이 방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침을 한 번 삼키고서 다시 문고리를 쳐다보았다. 내리깐 눈으로 한참 쳐다보다가 결심을 굳힌 것처럼 문을 벌컥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몇 개의 식탁, 그리고 그 위에 올린 촛불 몇 개, 지저분하게 쓰러져 있는 술잔들이었다. 분명히 이 여관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엔디미온은 방을 나와서 객실이 있는 쪽을 보았다.
분명히 아까 문을 다 박살냈는데 자신의 방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문이 생겨나 있었다. 엔디미온은 아무 문이나 하나 골라서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다. 열리지 않았다. 이 방에 누가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는 발을 들어서 쾅 소리가 나게 힘껏 찼다. 방문은 우지끈 소리를 내면서 박살났고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방 안에서 자고 있던 사람이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너 누구냐?”
문을 부수고 보니 모르는 사람이었다. 짧은 갈색 머리카락, 수더분한 수염, 매부리코, 어딜 보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남자는 잠이 덜 깬 멍한 얼굴이었다.
“당신 누구······.”
짝! 뺨을 맞은 남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영문도 모르고 뺨을 얻어맞은 남자는 그대로 기절했고 엔디미온은 자신의 손을 꼼지락대다가 말했다.
“진짜군.”
손으로 얼굴을 때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환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엔디미온은 손을 뻗어서 탁자 위의 잔을 집어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컵을 잡는 감각,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감각, 모두가 진짜였다. 만약 그가 지금 환각에 걸린 것이었다면 현실과는 미세하게 다른 느낌을 감지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질감을 통해서 환각을 깨트렸을 것이다. 성배기사의 정신력은 환각 따위로 흔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진짜 현실과는 동떨어진 수상쩍은 공간이었다. 엔디미온은 기절한 남자를 방에 두고서 바깥으로 나갔다. 문을 부수면서 커다란 소리가 났음에도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방도 확인하려다가 여관 바깥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성큼성큼 걸어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자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아까까지는 분명히 밤이었는데 지금은 낮이었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고 아낙네들은 머리에 빨래를 이고 가거나 장바구니를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때 느꼈던 을씨년스러움은 조금도 없었다. 마을 전체에 생기가 넘쳤고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이게 악마가 만든 가짜 현실이라기에는 너무 행복한 모습이었다.
“꽃 사세요! 꽃이 아주 향긋해요! 꽃향기를 맡으면 모두 행복해진답니다!”
소녀 한 명이 꽃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서 웃으며 꽃 한 송이씩을 샀고 그럼 소녀도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엔디미온은 길 위에 우두커니 서서 사람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남자 한 명이 웃으며 마지막 꽃을 사자 소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엔디미온을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엔디미온은 소녀의 다리를 보았다. 다리는 아주 오래 걸은 것처럼 퉁퉁 부었고 발은 상처투성이였다. 신발을 신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곳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행복한 공간을 구현화한 것이라면 어째서 저런 모습일까.
소녀의 뒤를 쫓아가려다가 코끝을 간질이는 빵 굽는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호안이 했던 말 중에 빵집에 대한 것이 있었다.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집이 빵집이겠거니 생각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빵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중년의 여자 한 명이 열심히 반죽을 치대고 있었다. 화덕 안에는 빵이 구워지고 있었다. 진열대 쪽을 보니 다 구워진 호밀빵이 있었다. 그런데 양이 지나치게 많았다. 마을 사람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양이었다. 그런데도 빵집 주인은 열심히 빵을 만들고 있었다.
“빵을 너무 많이 구운 거 아니오?”
엔디미온의 목소리에 빵집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맛있는 빵을 먹으면 행복해져! 얼른 하나 먹어 봐!”
“빵을 너무 많이 구운 거 아니냐고 물어봤잖소.”
“맛있는 빵을 먹으면 행복해져! 그러니 맛있는 빵을 만드는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야!”
엔디미온은 빵집 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치고 얼굴이 상당히 지쳐보였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아니었다.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반죽을 치대는 손에서 미세하게 경련이 일어났지만 그래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게 자신의 숭고한 소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심이었다.
“당신 혹시 앵무새요? 빵을 너무 많이 구운 거 아니냐니까? 왜 자꾸 헛소리만 하는 거요?”
“넌 행복해져야 해! 빵을 먹어!”
빵집 주인이 갑자기 진열대에서 빵 하나를 들고 엔디미온에게 달려들었다. 엔디미온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고 빵집 주인은 목이 홱 돌아간 상태로 바닥에 쓰러졌다. 경련조차 하지 않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빵집 주인을 보고서 엔디미온이 말했다.
“이건 정당방위요. 아니면 말고······.”
엔디미온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조용히 빵집에서 나왔다. 다행히 그가 빵집 주인에게 주먹을 날린 걸 본 사람은 없는 듯 했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가려다가 아까 전에 보았던 꽃바구니를 든 소녀를 다시 발견했다.
비었던 꽃바구니는 다시 꽃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소녀는 마치 오늘 처음 길거리에 나온 것처럼 사람들에게 호객 행위를 했다. 사람들은 꽃을 산 적이 없다는 듯이 다시 꽃을 샀다. 분명 기이한 장면이었다. 다시금 꽃을 들고 거리로 나온 소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꽃을 사는 사람들.
“꼬마야.”
“아저씨도 꽃 한 송이 어떠세요? 꽃향기를 맡으면 행복해진답니다!”
“일없다. 그런데 너 참 부지런하구나. 아까도 본 것 같은데.”
“꽃을 사면 행복해져요!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게 제 역할이니 한시도 쉴 수 없어요!”
퉁퉁 부은 다리, 상처투성이의 발, 거무죽죽한 눈 아래. 입은 웃고 있어도 다른 곳은 아니었다. 미세하게 경련하는 얼굴 근육만 보아도 이 웃음은 거짓이었다. 그런데도 목소리는 아주 활기찼다. 자신이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니면 자신이 정말 행복하다고 믿는 것처럼.
“그래, 그럼 열심히 하렴.”
“꽃 안 사세요? 꽃 한 송이 값으로 행복해질 수 있어요!”
“미안한데 나는 꽃 한 송이를 살 돈으로 맥주나 한 잔 마시는 게 더 행복하단다.”
“그게 아저씨의 행복이에요?”
“그래.”
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곧 행복해지겠군요. 그 전에 꽃 한 송이 어떠세요?”
“안 산다니까. 귀찮게 굴지 마라.”
“아저씨는 꽃을 사야 해요! 그래야 행복해지니까! 아저씨는 행복해져야 해요!”
소녀의 목소리는 비명을 지르듯 날카로웠다. 거리에 있는 모두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소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들은 웃으면서 자신의 일을 이어갔다. 아주 행복하다는 듯한 얼굴로.
소녀의 두 눈에는 기이한 열기가 감돌았다. 그것은 광기인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두려움? 무엇에 대한?
엔디미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호안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농부 호시, 양치기 로니,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제일 먼저 말했던 토니. 그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당신이 호시요?”
제일 먼저 찾은 것은 농부 호시였다. 그는 호밀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호밀을 수확하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호밀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호밀밭은 아주 광활했다. 아무리 열심히 수확을 해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그래, 내가 호시인데 당신은 누구야?”
“행복하시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태양의 열기, 힘든 노동, 끝이 보이지 않는 호밀밭. 호시의 얼굴에서 흐르는 것은 땀이 아니라 얼굴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웃었다.
“그럼.”
“알겠소. 수고하시오.”
엔디미온은 로니를 찾아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목초지, 셀 수 없이 많은 양들, 그리고 양젖을 담은 통이 넘쳐흘러도 쉬지 않고 젖을 짜고 있는 로니.
“행복하시오?”
“그럼!”
엔디미온은 마지막으로 토니를 찾아갔다. 그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를 흔들어서 깨우자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잠이 덜 깨서인지 처음에는 눈만 껌뻑거리더니 곧 엔디미온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이야, 처음 보는 얼굴이군. 여행자인 모양이지? 자, 여관에 가서 맥주나 한 잔 하세. 맥주는 내가 사는 대신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좀 들려주게. 자자, 가자고!”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맥주라는 말을 들으니 고개가 멋대로 움직였다. 토니가 웃으며 휘적휘적 여관 쪽으로 걸어갔고 엔디미온은 그 뒤를 따랐다. 거리의 모습은 처음과 똑같았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자, 마시게! 우리 마을 특제 맥주야! 아주 맛있다고!”
맥주잔은 아주 컸다. 엔디미온은 무언가에 홀린 듯 맥주잔을 잡았고 손잡이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감탄했다. 분명 맛있을 거야. 그는 침을 꿀꺽 삼킨 후에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꿀꺽꿀꺽 목구멍 너머로 맥주를 넘겼다. 맥주잔은 아주 커서 그 안에 든 것을 한 번에 다 마실 수는 없었다.
엔디미온이 쾅 소리가 나게 맥주잔을 내려두자 토니가 웃으며 잘 구운 소시지를 담은 접시를 내밀었다.
“어때? 정말 맛있지? 맥주를 마시니까 행복하지 않나?”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없이 맥주잔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작스럽게 벌떡 몸을 일으킨 그는 웃고 있는 토니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토니가 뒤로 넘어지면서 식탁이 흔들렸고 그 때문에 맥주잔이 쓰러져서 안에 든 것이 흘러나왔다. 투명한 액체가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엔디미온은 구겨진 얼굴 그대로 말했다.
“씨발, 맥주가 물로 변했는데 뭐가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