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66화 (66/199)

66

악마나 악귀도 아니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영 꺼려지는 일이었다. 저들이 악마숭배자라면 거리낌 없이 죽이겠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악마의 꾐에 넘어간 불쌍한 자들이었다. 인간 엔디미온은 이들을 불쌍하게 여겼지만 성배기사 엔디미온은 이들을 죽여야 할 자들로 보았다.

그게 바로 성배기사의 어려움이었다. 지켜야 할 여러 의무에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 것. 성배의 무게는 지독하게 무거웠다. 그리고 그것을 견뎌야 하는 것이 성배기사의 숙명이었다.

힘만을 탐하는 자는 성배를 들 수 없노라. 그것은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문제이기 때문임이라. 그 누가 자기 머리 위에 가시면류관을 쓰겠느냐? 그 누가 독이 든 잔을 마시겠느냐? 그 누가 스스로에게 대못을 박겠느냐?

그 어떤 영웅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니 성배기사는 과연 영웅을 뛰어넘은 자로다. 대영웅의 기개로다.

환청처럼 들리는 시인의 노랫소리에 엔디미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게는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호수의 여왕이시여.”

엔디미온은 진정한 성배의 주인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고서 등 뒤의 창을 잡았다. 그가 무기를 들자 사람들은 더욱 흥분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손으로 단단하게 잡은 창을 내지르자 날카로운 창날은 사람의 몸을 부드럽게 관통해서 그 뒤까지 날아갔다.

한 번에 세 명을 찌르고서 창을 다시 뽑았다. 그 다음에도 똑같이 했다. 사람들이 달려들면 찌르고 창을 뽑았다. 지금 있는 곳은 싸우기에 정말 유리한 위치였다. 엔디미온은 여관 입구에 있었기에 사람들은 한꺼번에 달려들 수 없었다. 등 뒤는 여관 안쪽이니 기습을 받을 염려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버틴다면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사술에 홀린 자들에게 안식을 안겨주고 악마를 잡아죽이는 것이었다.

엔디미온은 여관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사람의 배에 창을 찌르고 발로 차서 뒤로 넘어트렸다. 그리고 두 발을 바닥에 단단히 고정했다. 어깨에 힘을 꽉 주고 몸을 숙이며 적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기세로 창을 던졌다.

창은 가장 가까운 적의 몸부터 관통했다. 너덜너덜해진 몸은 창에 뚫렸다기보다는 단단한 것에 맞고 터져버렸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일반적인 무기는 너무 많은 신성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서져 버리지만 라가르디오의 창은 달랐다. 악마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성배기사의 손에 들린 기구한 운명의 창은 또 한 명을 찢어버리고 다음 먹잇감을 향해 날아갔다.

아무리 강한 힘으로 투창을 해도 사람 두어 명을 관통하는 것이 끝인데 엔디미온이 던진 창은 일직선상에 있는 사람들을 숫자에 상관없이 모두 관통하며 지나갔다. 도미노가 무너지듯 수많은 사람들이 너덜너덜한 꼴이 되어 쓰러졌고 그럼에도 힘이 남은 것처럼 쭉 날아가던 창은 건물의 벽을 부수고 바닥에 꽂혔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수십 명을 쓰러트린 엔디미온은 스스로 지리적 이점을 버리고 여관 바깥으로 나왔다. 이제는 한 번에 여러 명을 상대해야 하지만 겁을 먹은 기색은 없었다. 그는 두 자루의 검을 각 손에 하나씩 쥐고서 바닥을 박찼다.

쌍검의 장점은 적을 두 배로 많이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엔디미온은 두 눈을 정신없이 움직이면서 두 자루의 검을 휘둘렀다. 오른쪽 검으로 적들을 베고 왼쪽 검으로 방어, 오른쪽 검을 회수하는 사이에 왼쪽 검으로 반격, 다시 오른쪽 검으로 공격 후 왼쪽 검으로 또 한 번 공격.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몇 명씩 죽어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검을 휘두르는 것에 속도가 붙어서 더 많은 적들이 더 빠르게 죽어갔다. 엔디미온은 마치 두 명이 된 것처럼 움직였다. 검을 두 자루 쓴다는 것은 그만큼 신경 써야 할 것이 두 배로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무기가 두 개가 됐다고 해서 강함이 두 배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쌍검술은 겉으로 보기에는 멋있어 보이지만 실제로 써먹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두 손을 처음에는 따로 움직여도 시간이 지나면 무의식적으로 자주 쓰는 손을 다른 한 손이 따라하게 됐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거의 완벽하게 쌍검술을 구사했다. 길이가 같은 두 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손목에 무리가 가는 일이지만 타고난 신체 능력 덕분에 검을 떨어트리는 일이 없었다. 두 개의 검은 때로는 따로 움직이며 개별적으로 적을 상대했고 때로는 하나가 막고 하나가 공격하면서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검 두 자루가 현란하게 움직이며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수행하니 감히 그를 상대할 자가 없었다.

물론 엔디미온도 가끔씩 실수를 할 때가 있었다. 오른손을 움직이는데 신경을 쓰다가 왼손의 반응이 늦어지는 일이 가끔 있었다. 적들은 그런 틈을 노려서 억지로 공격을 시도했다. 때때로 그들이 들고 있는 날붙이가 몸 위에 상처를 남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엔디미온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에 몸에 새겨진 상처만큼 더 많은 적들을 죽이면 될 일이었다. 그는 죽이고 또 죽였다. 마치 가지치기를 하는 정원사처럼 두 자루의 검으로 거침없이 사람들의 목을 잘랐다. 쓰러진 사람들의 시체는 움직임에 방해가 될 정도로 많았고 바닥을 적시는 빨간색 액체 때문에 발을 움직일 때마다 찰박찰박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마치 모닥불로 돌진하는 날벌레들처럼 행동했다. 엔디미온이 휘두르는 검을 향해서 손을 뻗고 몸을 들이밀었다. 날카로운 비명과 살을 베는 소리, 뼈 잘리는 소리, 쇳소리, 찰박거리는 소리, 부드럽고 말랑한 것이 땅에 떨어지는 차진 소리······.

온갖 소리가 났다가 사라지고 또 났다. 엔디미온은 몸에 열이 오를 정도로 격렬하게 싸우다가 드디어 마지막 적을 목도하고서 숨을 한 번 골랐다.

수많은 시체들 사이에서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것은 작고 연약했으며 몹시도 덤덤했다. 다가올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듯이, 오히려 그것을 바라고 있다는 듯이, 달아나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겠다는 듯이 그저 바닥을 보고만 있었다.

엔디미온은 뜨거운 숨을 뱉어낸 후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입술에서 찝찔한 맛이 났고 불어오는 바람에 서늘함을 느꼈다.

“내가 우리 마을의 이야기를 했던 것은.”

호안은 씁쓸한 얼굴을 했다. 아이답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아주 잘 어울렸다. 엔디미온은 바싹 마른 입 안을 침으로 적셨다.

“도움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이제는 알아요.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아요. 마을 어른들이 무슨 일을 했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그건 잘못이었고 실수였어요. 하지만 아무리 실수라고 해도 잘못이 없던 것이 되지는 않지요. 우리를 위해 끝을 내줄 사람이 있어야 했어요.”

“그게 나였던 거냐.”

“다른 사람이라도 상관없었어요. 누구라도 우리에게 안식을 줄 수 있다면 말이에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호안은 우는 것처럼 웃었다.

“제가 바랐던 결말은 이게 아니었어요. 우리가 결코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조금의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악마의 사술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되돌아가길 바랐던 마음도 있었다고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아요.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좀 더 온건한 방식으로 마지막을 맞길 바랐어요.”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한 번 보았다. 부서진 벽, 갈기갈기 찢긴 시체들, 목이 없는 시체들, 질척거리는 새빨간 웅덩이. 그럼에도 한가롭게 흘러가는 구름과 서늘한 바람, 옅게 반짝이는 하늘.

호안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묻어났다.

“이건 제가 바라던 결말이 아니라고요. 우리가 맞아야 할 안식은 이게 아니었다고요. 이런 끔찍한 안식이 아니었다고요! 우리는 그저 행복을 바랐을 뿐인데 대체 왜! 대체 왜 이런 결말을 맞아야 하지요? 어째서!”

호안은 이제 울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자신의 허벅지까지도 오지 않는 작은 꼬마를 달래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

“너희는 사술에 손을 댔고 이것으로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고 했으니 이것은 명백히 탐욕의 잘못이다. 나는 성배기사로서 너희를 꾸짖을 의무가 있다.”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하지 않겠다.”

호안이 고개를 들어서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행복은 결코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니 쉽게 행복을 얻으려고 한 것은 나태의 잘못이다. 나는 성배기사로서 너희를 꾸짖을 의무가 있다.”

이어질 말은 같았다.

“하지만 하지 않겠다.”

엔디미온은 여전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성배의 주인이자 호수의 여왕의 대리인이며 그녀의 뜻을 전하는 성배기사다. 나에게는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옳은 길을 벗어나는 자들의 잘못을 엄히 꾸짖어야 한다. 그것이 성배기사로서 나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허나 꼬마야, 내가 그리 하지 않는 것은 너희가 충분히 벌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로 인한 결말이 참혹했기 때문이다. 이미 벌 받은 자에게는 벌을 내리지 않는 것이 옳기에 그냥 두는 것이니 용서한 것은 아니다. 잘못에 대한 용서는 너희들이 직접 전능자에게 빌어야 할 것이다. 성배기사 엔디미온이 너에게 해줄 말은 이것뿐이다.”

엔디미온의 검이 호안의 목을 향해 움직였다. 그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인간 엔디미온으로서 너를 용서하겠다. 그리고 너에게 용서를 구하겠다. 더 나은 방법을 강구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용서 말이다.”

호안은 눈을 크게 뜨고서 입을 뻐끔거리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는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검이 목을 잘랐다. 작은 머리는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하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엔디미온은 바로 몸을 돌려서 다른 곳을 보았다.

그는 여관 안으로 돌아가서 물을 머리에 뿌렸다. 열이 잔뜩 오른 몸이 다시 식었다. 물 한 모금을 마신 후에 다시 바깥으로 나오자 하늘이 검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물감통 안에 물감을 뿌린 것처럼 처음에는 번쩍였다가 여러 색깔이 소용돌이치면서 검게 변했다. 그리고 소용돌이의 중심으로부터 검은색이 흘러나오며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자연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새까만 하늘에는 별 하나 없었다. 엔디미온은 숨을 한껏 삼켰다가 내뱉으며 소리쳤다.

“사악한 것아! 그만 모습을 드러내라! 내가 너의 사지를 자르고 두 눈을 뽑아버리겠다!”

하늘이 꿈틀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색 하늘의 한 점이 약간 움직이는 듯하더니 하늘에 주름을 잡으며 꼬기 시작했다. 바람개비가 회전하듯 점이 움직였고 처음에는 작았던 그것은 점차 크기가 커져서 하나의 구멍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불쑥 튀어나왔다.

커다란 손이 구멍을 잡고 찢으며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롭게 솟은 뿔, 추악하게 생긴 얼굴, 커다란 몸, 염소의 발굽. 쿵 소리를 내며 지상으로 떨어진 악마가 침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너는 누구냐? 누구인데 내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나의 백성들을 학살하느냐? 너의 이름을 말하라! 너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느냐!”

악마는 이 공간의 외부에 있었고 그 때문에 엔디미온의 정체에 대해 듣지 못했다. 만약 들었다면 스스로 이곳에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엔디미온은 나직이 말했다.

“내 이름은 엔디미온이며 나는 너를 벌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너는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악마가 큭큭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만약 싫다면?”

“그럼 광휘와 광명과 광화의 이름으로 네 대가리를 부수겠다.”

“······.”

“정정하지. 용서를 구해도 부술 거니까 그냥 얼른 덤벼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