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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잠깐 침묵했다가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는 코가 없고 세로로 길게 찢어진 커다란 눈 하나가 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입 안에는 짐승의 것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셀 수 없이 많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완전히 다물리지 않는 입에서는 침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악마는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다. 침이 사방으로 튀었다.
“크흐흐······. 용서를 구하라고? 참 우스운 소리를 하는구나! 이 빌어먹을 놈아!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은 너다! 너는 내가 만든 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내 백성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보아라! 누가 용서를 해야 하는지!”
악마가 털이 수북한 손을 엔디미온을 가리켰다.
“너의 백성? 지금 여기 죽어있는 자들이 네 백성이란 말이냐?”
“그래! 이들은 나에게 공물을 바치고 나의 은총을 바랐으니 내 백성들이다! 내가 이곳을 만들었고 내 백성들이 이곳을 채웠으니 나는 적법한 지배자요, 왕관 없는 왕이다! 이 건방진 이방인아! 왕에게 머리를 조아려라!”
이곳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고 본래 세상과 분리된 또 다른 세상이었다. 비록 마을 하나만큼의 크기뿐이라고 해도 이런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무 악마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이 악마가 제법 강한 존재란 것을 인식했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은 악마의 사악함에 대해 무지했고 그 탓에 사술에 홀린 불쌍한 자들이다. 이들이 네 백성이란 것은 감히 해서는 안 될 말이다.”
“헛소리를 하는구나. 나는 내 백성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것을 주었다. 이 건방진 이방인아, 한 번 말해보아라. 전능자에게 기도를 드리면 그가 바라던 것을 주더냐? 제단에 공물을 바치고 기도를 드리면 그가 지상에 임하더냐?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하기만 할 뿐이지!
그에 비해 나는 어떠냐! 나는 받은 만큼 돌려주지 않느냐? 이들이 공물을 바친 만큼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나를 보아라! 나는 악마이기 이전에 공정함의 화신이며 다르디낭의 참된 적자이자 왕관 없이 군림하는 왕이다! 내 이름은 로아니스! 사도왕(邪道王) 로아니스다!”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혔다. 다른 것은 다 무시해도 다르디낭의 적자라는 말은 무시할 수 없었다. 대악마가 없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위협적인 적은 바로 그들 같은 악마였다. 다르디낭의 적자들은 대악마의 진정한 자식인 만큼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백 년 전에도 영웅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로아니스와 엔디미온은 백 년 전에도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세상의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수많은 악마들이 날뛰었으니 아무리 성배기사라도 그들 모두를 직접 찾아가서 벌할 수는 없었다. 그럴 때면 다른 영웅들이 각지로 흩어져서 성기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처치하러 갔다. 엔디미온이 알기로 로아니스는 라우렌시오와 싸우고 큰 상처를 입고 도망친 악마였다. 그 뒤로 어딘가에 숨어서 대악마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는데 그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로아니스라고? 요정기사와 싸우고 대악마의 부름도 무시한 채 도망쳤다던 겁쟁이가 바로 너냐?”
로아니스는 입을 열어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뭐냐. 그건 백 년도 전의 일인데 네가 어찌 알고 있는 것이냐?”
“어찌 알기는.”
엔디미온은 검을 겁집에 꽂고서 뒤로 돌았다. 악마를 상대로 등을 보이는 일은 아주 위험했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서 창을 향해 걸어갔다. 부서진 벽의 잔해 사이에 꽂혀있는 창을 잡고서 다시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여유가 넘치는 태도 때문에 약간 당황한 로아니스는 커다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너, 정체가 뭐냐?”
“나를 모른다고? 다르디낭의 적자이자 사도왕 로아니스가 나를 몰라? 너에게 내 정체를 알려주고 깜짝 놀라는 얼굴을 보는 건 아주 재밌는 일이겠지만 그러지 않겠다. 한 번 맞춰봐라. 내가 누구인지.”
엔디미온이 창을 꽉 쥐었다. 불꽃을 닮은 창날은 정말 타오르는 것처럼 아지랑이가 올라왔고 그것을 본 로아니스가 깜짝 놀랐다.
“그 창은 라가르디오의 것이 아니냐! 내 아우의 창을 네가 어째서 들고 있는 것이냐!”
로아니스는 다르디낭의 적자이고 라가르디오는 아니었으니 엄밀히 말해서 두 악마는 형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우라고 칭하는 것을 보면 의형제라도 맺은 모양이었다. 형인 로아니스는 요정기사와 싸우다 도망치고 동생인 라가르디오는 성배기사와 싸우다 도망쳤으니 참 잘 어울리는 형제였다.
엔디미온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왜 들고 있기는. 라가르디오를 죽였으니까 들고 있지.”
로아니스는 분개하며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놈! 네가 누구인지 알겠다! 너는 뷔브르의 부하로구나! 뷔브르, 그 망할 놈이 라가르디오에게 나를 배신하고 자신에게 붙을 것을 종용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내 아우가 나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거절하니 부하를 보내 죽였구나! 이 개 같은 놈! 여섯 날개의 악마라고 까불 때 그 날개를 다 찢어버렸어야 했는데! 그래도 같은 아버지를 두었다고 지금까지 봐준 것이 잘못이었다!”
“······뭐?”
무슨 개소리야? 당황스럽게도 로아니스는 지금 아주 잘못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뷔브르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그가 바로 신디아가 모시던 여섯 날개의 악마인 듯 했다.
로아니스는 뷔브르가 그를 견제하기 위해 부하를 보내 수를 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백 년 전에는 악마들끼리 협력했지만 대악마가 사라진 지금은 아닌 모양이었다. 서로 알력 다툼이 있는 듯했고 로아니스와 뷔브르는 서로 사이가 나쁜 것이 분명했다.
악마와 싸우기 위해서 자세를 잡고 있던 엔디미온은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창을 내렸고 혼자서 화를 내던 로아니스는 하나뿐인 눈을 크게 뜨더니 발을 쾅 굴렀다. 그러자 갑자기 눈의 중심부에 빛이 모이더니 곧 광선이 발사됐다. 보라색 빛이 나는 광선은 엔디미온의 몸에 직격했고 그 충격으로 그는 뒤로 날아갔다. 건물의 벽을 부수고도 뒤로 밀려나는 몸이 멈추지 않아서 벽 서너 개를 더 부수고 나서야 겨우 멈추었다.
무너진 벽의 잔해 사이에서 몸을 일으킨 엔디미온은 로아니스가 두 손을 하늘로 뻗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하늘을 두 손으로 잡더니 가죽을 찢듯 좌우로 잡아당겼다. 검은색 하늘이 찢어지면서 그 사이로 옅은 청색이 비쳤다. 하늘의 갈라진 틈은 처음에는 작았으나 로아니스가 더 크게 찢자 그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커졌다.
로아니스는 바깥 세상을 향해 발을 내밀면서 고개를 뒤로 홱 돌려서 말했다.
“뷔브르의 개자식아! 본래라면 너를 갈기갈기 찢어서 악귀들의 먹이로 줘야 하겠으나 오늘은 특별히 살려주겠다! 내가 널 살려주는 이유는 첫째로 네가 뷔브르에게 가서 내 말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내가 지금 당장 돌아가서 뷔브르를 칠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아니스의 몸은 이제 절반 이상 바깥으로 나가있었다.
“너는 가서 뷔브르에게 내 말을 전해라! 사도왕 로아니스가 그 날개를 다 뽑아버리러 갈 테니 딱 기다리라고!”
그 말을 끝으로 로아니스는 사라졌다. 찢어졌던 하늘이 다시 아무는 듯하더니 갑자기 땅이 흔들리고 커다란 소리가 났다. 하늘은 아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회오리치는 점은 모든 것들을 빨아들일 기세였다. 공간이 점차 붕괴하고 있었으나 엔디미온은 멍하니 제자리에 있었다.
사도왕 로아니스,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설마 저만큼 제멋대로일 줄은 몰랐다. 다르디낭의 적자란 자가 성배기사를 얼른 알아보지 못하다니? 아르할리나 정도의 저급한 악마조차도 얼굴을 보는 순간 엔디미온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로아니스라면 당연히 엔디미온이 성배기사란 것을 알아차려야 했다. 설마 알아보지 못했다고 해도 뷔브르의 수하라는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엔디미온은 점이 자신을 빨아들이는 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의 몸이 붕 떠올랐고 어느새 삼켜졌다. 소용돌이치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 안에서 그는 소란스러운 말소리를 들었다.
“······안 일어나는······.”
“······인공호흡 하면······ 일어나······.”
“······누가······.”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고 그냥 소란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엔디미온은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이 물에 젖었을 때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가장 먼저 본 것은 갈색과 검정색 사이의 동그란 무언가였고 그 다음에 보인 것은 두툼하게 생긴 분홍색의 물체였다.
엔디미온은 눈을 한 번 끔뻑였고 흐렸던 시야가 다시 명확해졌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자신에게 입술을 내밀고 있는 비다르의 얼굴을 보았다.
“······씨발, 뭐하는 짓거리야.”
비다르는 주먹에 맞고 뒤로 날아갔고 베로니카가 크게 환호했다.
“와! 진짜로 인공호흡을 하니까 일어났어요!”
“하기는 뭘 해? 하기도 전에 괜히 맞기만 했는데!”
비다르가 구시렁대면서 쯧 혀를 찼다. 엔디미온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베로니카와 비다르, 라이오넬의 얼굴이 보였다. 로아니스가 만든 거짓된 세상에서 빠져나와 진짜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엔디미온은 현기증을 털어내기 위해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고서 말했다.
“뭐야, 왜 다 내 방에 있는 거냐?”
“아니, 엔디미온 씨가 아침이 됐는데도 안 일어나니까 다들 놀랐잖아요! 진짜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고요!”
베로니카의 말에 엔디미온은 방 안에 햇빛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호안을 만났을 때는 밤이었는데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낮이었다. 그만큼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시간 감각이 이상해진 기분이었다.
“그럼 너는 왜 갑자기 나랑 키스하려고 한 거냐? 네가 무슨 공주를 깨우는 왕자냐?”
“우리 개소리 자제하자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 자제하란 말이야. 그냥 인공호흡 하려고 한 거잖아!”
비다르가 벌컥 화를 냈다.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럼 갑자기 인공호흡은 왜 하는 거냐?”
“난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일어날 거라고 했는데 이 꼬맹이가 호들갑을 떨잖아! 아니, 숨이 붙어있는데 인공호흡을 왜 해야 해? 그리고 인공호흡을 하자고 제안했으면 자기가 할 것이지 왜 나한테 시켜?”
“하지만 비다르 씨가 가위바위보 졌잖아요.”
비다르는 침묵했다. 엔디미온은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수통을 집었다. 성수를 한 모금 마시고 옅게 남아있던 현기증을 털어냈다. 그는 조용히 짐을 정리하고 무기들을 챙겼다. 갑자기 떠나려는 그의 모습을 보고서 베로니카가 말했다.
“지금 가시려고요? 아직 아침 식사도 안 했는데.”
“입맛 없어. 먹으려면 너희들끼리 먹어.”
“아니요, 저희는 진작 먹었는데요.”
“······그럼 짐 챙겨 와. 출발한다.”
엔디미온은 말린 고기 조각을 입에 물었다. 짭짤한 맛이 났다. 엔디미온 일행은 각자 짐을 챙겨서 여관 바깥으로 나왔다. 말 위에 올라탄 베로니카가 뒷덜미를 손으로 주무르면서 말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이 왜 사라졌는지는 알지 못하고 떠나는군요.”
“그냥 모르는 게 더 나아.”
“네?”
“가자. 뒤르겔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이 좀 복잡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베로니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엔디미온을 따라서 말을 몰았다. 세 명의 영웅과 한 명의 요정 마법사는 뒤르겔을 향해 부지런히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