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 * *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모습은 온통 흰색이었다. 아침 햇살을 받고 기지개를 켜는 수선화처럼 흰색으로 반짝이는 도시는 미로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사방으로 무질서하게 자라난 길들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하나로 합쳐지기도 하고 때로는 갈라지기도 했다.
어떤 길은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같은 길을 뱅뱅 돌게 됐고 어떤 길은 의미도 없이 다른 길과 교차했다. 오랜 시간 동안 부서지고 만들어지기를 반복하던 길들은 마구잡이로 자라나서 이제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바다로 가는 강줄기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 많은 길들은 결국에는 하나의 대로로 이어졌다. 바란다면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듯 대로에서부터 길을 더듬어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도시에서는 언제나 새가 하늘에 가깝게 날았다. 그 복잡하고 까다로운 미로는 두 발로 걷는 자들에게는 고역이었지만 하늘을 나는 자들에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깍깍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새들은 언제나 도시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청동상의 어깨 위에서 쉬었다. 그들은 그 위에서 날개도 없는 불쌍한 것들을 비웃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언제나 청동상의 얼굴을 보고서 하루를 시작하고 끝마쳤다.
도시의 건물들은 흰색이었으나 성벽은 회색이었다. 그곳에는 짙은 오물들로 얼룩덜룩했다. 그것은 이 도시가 결코 안온한 세월을 보내지 않았다는 증거였고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결국 도시를 지켜냈다는 훈장이었다.
아침의 도시는 갓 꽃망울을 터트린 것처럼 싱그러웠다. 하지만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흰색의 도시는 모두 적색으로 물들었다. 먼 옛날의 모습이 그랬다.
누군가는 이곳이 뭇 성기사들의 고향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신실한 신앙심의 종착점이라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모두가 묻힐 거대한 무덤이라고 했다. 각기 부르는 이름은 달랐으나 결국에는 그들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불렀다.
뒤르겔이었다.
“저, 성도는 처음이에요!”
뒤르겔은 흔히 성도라고 불렸다. 가장 많은 성기사들을 보유한 곳이고 가장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머무는 곳이며 교황이 기거하는 곳이니 그 이름은 과연 타당했다. 신성한 도시란 이름답게 길 가는 곳마다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곳이 있었고 전능자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노랫소리가 곳곳에서 끊이질 않았다.
태어나서 성도에 처음 와보는 베로니카는 시골촌뜨기처럼 쉴 새 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할리아는 분명 규모가 있는 도시지만 뒤르겔만큼은 아니었다. 뒤르겔은 할리아보다 몇 배는 더 발전된 도시였다. 베로니카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여관에서 경험한 수도 시설이었다. 십자모양의 꼭지를 돌리기만 하면 물이 나온다니! 세숫물을 떠오지 않아도 방 안에서 간단한 세안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백 년 전의 영웅들은 시큰둥했다. 그들은 이건 그냥 백 년 전의 시설을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다,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다니 오히려 퇴보한 것 같다, 수압이 영 시원치 않은 것 같다는 등의 소리를 할 뿐이었다.
여관 안에 짐을 정리하고 말들은 마구간에 맡겨두고서 바깥으로 나온 그들의 목적지는 백금궁이었다. 이름처럼 백금으로 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중앙 건물 위에 설치된 십자가는 백금이었다. 그곳이 바로 여명교단 본청이었다.
엔디미온 일행은 정확히 이십일 만에 뒤르겔에 도착했다. 엘런의 말대로라면 지금쯤 뷔브르를 죽이기 위한 토벌대가 꾸려지는 중일 것이다. 토벌대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일단 여명교단 본청에 가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떤 일로 백금궁에 방문하셨습니까? 행정 업무 처리는 왼쪽, 도서관 이용은 오른쪽입니다. 도서관 이용이 처음이시라면 혹시 안내해드릴까요?”
백금궁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성기사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방문 목적을 물었다. 반짝이는 태양빛처럼 미소가 환해서 저절로 호감이 생기는 남자였다.
지방 대교구들이 그러하듯 백금궁 역시 행정 업무를 겸하고 있었다. 또한 내부에는 도서관이 있어서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뒤르겔의 사람들은 한가한 시간에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고는 했기에 남자 역시 엔디미온 일행이 도서관 때문에 왔다고 짐작했다.
“둘 다 아니오. 뷔브르의 토벌에 관한 일 때문에 왔소.”
“······뷔브르요? 여섯 날개의 악마 말입니까?”
잘 훈련된 성기사들은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흘끔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토벌대에 참가하는 것은 성기사들뿐이었다. 간혹 유명한 악마사냥꾼들이 용병처럼 참여하기도 하지만 엔디미온 일행이 그런 자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성기사는 아니신 것 같은데 토벌대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성기사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엔디미온을 의심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다부진 체격은 분명 악마사냥꾼에 적합해 보였으나 그것만으로 사람을 믿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그의 뒤에 있는 사람들이 영 수상쩍었다. 줄에 묶여 있는 거구의 남성, 백발이 무성한 장님 노인, 그리고 자꾸만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여자 요정까지. 저런 자들이 과연 토벌대에 참가할 수 있을 만큼 실력 있는 악마사냥꾼일까?
“엘런 경에게 들었소.”
“엘런 경이라면······.”
“은사자 기사수도회의 엘런 경 말이오. 그가 헬리드에서 있었던 일을 로게나 대교구에 보고했고 그림발드 경이 날 토벌대에 추천했소. 혹시 이야기가 되지 않은 거요?”
“그 말씀에 거짓이 없다면 혹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실 수 있을까요?”
엔디미온은 조용히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엘런이 주었던 그 목걸이였다.
“이걸로 증명하겠소.”
성기사는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받았다. 그는 목걸이에 그려진 그림을 가만히 보다가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그는 한층 더 정중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슐리츠 가문 분이셨군요. 귀하신 분을 번거롭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중앙으로 곧장 가십시오.”
성기사들이 얼른 길을 비켜섰다. 엔디미온은 이 목걸이가 슐리츠 가문의 것이란 사실을 처음 알았지만 아무 티도 내지 않고 중앙으로 걸어갔다. 어쩐지 자엘라에서 영주가 이상할 정도로 과하게 반응한다고 했더니 엘런의 가문이 제법 힘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왜 엘런은 헬리드 같은 작은 도시에서 활동하고 있을까. 본청의 성기사가 목걸이만 보고서 깍듯이 모실 정도면 가문의 위세가 결코 낮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갈 수 없는 중앙의 길을 걸으면서 베로니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문을 지키던 사람, 특등기사였어요.”
특등기사 정도면 기사수도회를 이끌며 작은 교구의 교구장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자였다. 그런데 그런 성기사가 경비 업무를 직접 서고 있는 것은 여명교단 본청에 특등기사가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는 뜻이었다. 엘런이 말했던 것처럼 본청과 지방 대교구의 수준 차이가 아주 큰 모양이었다.
“요즘은 뭐 별 것도 아닌 애들 데리고 특등기사니 뭐니 하더라. 백 년 전에는 그냥 널린 게 저런 놈들이었는데.”
비다르가 퉁명스럽게 코웃음을 쳤다.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백금궁의 중앙은 오직 성기사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경건한 믿음과 신실한 신앙심을 가진 자들이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려 만든 이곳은 지상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었다.
엔디미온 일행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눈에 아주 잘 띄었고 길을 걸어가는 성기사들이 빤히 쳐다보았다. 베로니카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목을 움츠렸으나 비다르는 오히려 뭘 보냐는 듯이 눈을 부라렸다. 라이오넬은 멍하니 있었고 엔디미온은 오직 정면만을 보았다.
“이곳은 전능자의 집이며 그 뜻을 따르는 어린 양들의 안식처인데.”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엔디미온은 정면에서 성기사들을 이끌고 다가오는 남자를 보았다. 청색의 머리카락이 길었고 눈매가 날카로웠다. 나이는 아마 서른을 좀 넘었을 듯 했다. 기름을 먹인 천으로 광을 낸 갑옷의 왼쪽 가슴에는 가시가 있는 왕관이 그려져 있었다.
“너희들은 누구인데 감히 흙발로 들어오느냐? 길을 잘못 들었다면 얼른 돌아갈 것이고 불온한 뜻을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이라면 내 검을 받아야 할 것이다.”
목소리는 고압적이었고 시선은 거만했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뒤에 거느리고 있는 성기사들을 보면 신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아마 기사수도회를 이끄는 자일 것이다. 성기사들의 절도 있는 자세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고된 훈련을 해왔는지 알 수 있었고 그런 그들을 이끄는 남자의 실력도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누구시오?”
“기분 나쁘군. 천한 것이 내 이름을 말했다면 그것 역시 기분 나쁜 일이겠지만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니 그것이 더 기분 나쁘다. 천한 것아, 내 이름을 묻기 전에 네 이름부터 말해라.”
“엔디미온.”
남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천한 것이 귀한 이름을 쓰는군. 나는 가시왕관 기사수도회의 대장이자 위대한 열두 가문 중 하나인 아델리온의 적자, 고결한 에우레킬슨이다. 내 이름을 듣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에우레킬슨이란 이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없지만 아델리온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엔디미온과 함께 싸웠던 한 성기사의 성이었다. 그 이름은 그레고리 아델리온, 멜리아나와 마찬가지로 영웅들 다음가는 강력한 성기사였다.
위대한 열두 가문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레고리처럼 강력하고 공적을 많이 세운 성기사들의 가문을 말하는 듯 했다. 그 유명한 성기사 멜리아나의 가문이 영세한 것은 그녀가 그레고리와 다르게 권력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레고리 아델리온의 후손이로군.”
“그래, 위대한 성기사가 내 조상이지. 엔디미온, 내 이름을 들을 영광을 주었으니 이제 너는 이곳에 온 목적을 말해야 할 것이다.”
“뷔브르 토벌대에 참가하러 왔소. 그림발드 경과 엘런 경이 나를 추천했소. 이것이 그 증거고.”
에우레킬슨은 엔디미온이 꺼낸 슐리츠 가문의 목걸이를 보고서 코웃음을 쳤다.
“엘런 슐리츠? 그 덜떨어진 놈? 그리고 그림발드 경? 로게나 대교구장이나 되면서 안목이 참 별로군. 엔디미온, 애석하지만 너는 토벌대에 낄 자격이 없다.”
“그건 어째서요?”
“너는 성기사가 아니니까. 너는 전능자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나? 아니겠지. 악마사냥꾼들은 오직 돈 때문에 악마를 죽이는 놈들이니까. 잘 들어라, 토벌대는 성기사들로만 꾸려질 것이다. 네가 낄 자리는 없다는 소리다.”
엔디미온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그냥 나 혼자 가도 충분한 일을 왜 복잡하게 하려고 하고 있을까. 그가 다시 한 번 한숨을 삼키는 순간에 누군가가 성큼 걸어나왔다.
“거 진짜 말 존나 많네.”
걸어나온 것은 비다르였다. 그는 인상을 쓰고 있는 에우레킬슨을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뭐, 꼽냐? 자신 있으면 한 대 처 봐. 째려보지만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