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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69화 (6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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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다르의 거침없는 말투 때문에 성기사들 모두가 긴장했다. 그들은 에우레킬슨의 부하였고 자신들의 주인이 얼마나 까다로운 성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고결한 에우레킬슨이란 별명은 그가 고귀한 신분을 타고 났기 때문에 붙은 것이었다. 에우레킬슨은 열두 가문 중에서 가장 위세가 강한 아델리온 가문의 적자이자 장남이었고 또한 가문을 이을 적법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하나뿐인 남자였다. 거기에 외가 역시 열두 가문 중 하나였으니 여명교단에서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 에우레킬슨이 비다르의 몰상식한 태도를 참을 리는 없었다.

“보아하니······.”

에우레킬슨은 비다르를 한 번 보고 그 다음에 엔디미온을 보았다.

“데리고 다니는 종놈인 것 같은데 교육을 잘 시켜야지. 내가 그 건방진 놈을 벌하지 않은 것은 여명교단이 사사로이 투기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목숨을 건진 줄 알아라.”

“뭐? 종놈? 저게 미쳤나? 내가 종놈이라고? 너 미친 거 아니냐? 야! 덤벼! 덤비라고!”

종놈 소리를 들은 비다르는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그가 어찌나 난동을 부리는지 신성력으로 만들었던 끈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끊어지려고 했다. 엔디미온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아라, 비다르.”

“참으라고? 이걸 참아? 너 같으면 참겠냐? 어? 너 같으면 참겠냐고!”

“힘 있는 자가 남을 돕지 않는 것도 죄지만 남을 괴롭히는 것 역시 죄다. 너는 죄를 지을 셈이냐, 비다르.”

비다르는 잠깐 침묵했다가 곧 크게 웃었다. 말이 우스워서였다. 그에게 참으라는 것은 결국 에우레킬슨이 약자이니 괴롭히지 말라는 뜻이었다. 사실 그 말이 맞았다. 백 년 전의 그레고리가 직접 나서도 비다르의 상대가 안 되는데 그 후손이 무슨 수로 영웅을 이기겠는가.

에우레킬슨은 엔디미온의 말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금방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에우레킬슨 경, 하나만 묻겠소. 혹시 당신이 토벌대를 이끄는 대장이거나 그에 준하는 입장에 있소?”

에우레킬슨이 당장 검을 뽑지 않은 것은 이곳이 백금궁이기 때문이고 화가 난다고 해서 함부로 무기를 휘두르는 것이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고결한 에우레킬슨이라 불리는 것은 귀한 신분과 더불어 신실한 신앙심을 갖추고 있어서였다.

그는 억지로 화를 참으며 말했다.

“아니다.”

“그럼 더는 우리의 자격에 대해서 떠들지 마시오. 우리는 비록 성기사는 아니지만 당신들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소. 또한 그 힘으로 온갖 사악한 것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돕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소. 나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하는데 자격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고결한 에우레킬슨, 당신이 그 별명대로의 사람이라면 조심성 없는 발언으로 자신의 격을 떨어트리지 마시오.”

“······너.”

에우레킬슨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그는 화를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엔디미온을 베어도 그가 여명교단 내에서 가진 힘으로 없던 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지켜야 할 전능자의 말씀 때문이었다. 그는 고결한 에우레킬슨이라 불리기 전부터 그런 삶을 살려고 했다.

그는 한숨을 한 번 내뱉은 후에 말했다. 목소리에는 아직 약간의 화가 묻어있었다.

“내가 너를 베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겨라.”

엔디미온은 대답하는 대신에 에우레킬슨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성기사들이 깜짝 놀라서 각자의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에우레킬슨이 손을 뻗어서 그들을 제지했다.

가까이서 본 엔디미온은 아주 컸다. 키만 큰 게 아니라 덩치도 컸다. 두꺼운 손과 튼튼한 허벅지는 얼마나 단련한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분명 수많은 싸움을 경험한 자의 몸이었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고요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엔디미온이 고개를 숙여 에우레킬슨과 키를 맞췄다. 묵직한 목소리가 성기사의 귓가를 간질였다.

“감사해야 하는 건 너지. 내가 지금 여기서 네 목을 뽑아버리지 않은 것은 네가 죽을 자리가 이곳이 아니라 악마들이 우글거리는 전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알겠으면 건방떨지 말고 가서 네 의무나 성실히 다해, 이 말 많은 꼬마야.”

엔디미온은 천천히 뒷걸음질로 에우레킬슨에게서 멀어졌다. 성기사들은 그들의 대장을 보고 있었고 에우레킬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엔디미온 일행을 지나쳤고 성기사들도 조용히 뒤를 따랐다. 혹시라도 싸움이 날까봐 걱정하고 있던 베로니카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비다르는 도망치듯 떠나는 가시왕관 기사수도회를 향해서 주먹을 들며 낄낄 웃었다. 엔디미온은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안녕하신가? 오랜만이군. 에우레킬슨이랑 비밀 이야기를 하던데 뭐라고 했나?”

은사자 기사수도회의 대장 엘런이었다. 이곳에서 그를 만날 줄 몰랐던 엔디미온은 웃으며 답했다.

“닥치라고 했지.”

“하하하, 자네다운 대답이야. 잘 지냈나, 엔디미온?”

“나는 잘 지냈소. 당신 얼굴을 보니 반갑군. 이곳에 들어와서 날 의심하는 자들만 만난 탓인지 더욱 반갑소.”

“에우레킬슨 저 친구가 좀 그래. 나쁜 사람은 아닌데 까탈스럽지.”

“당신보고 덜떨어진 놈이라고 하던데.”

엘런은 웃는 것인지 찡그리는 것인지 모를 애매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건 틀린 말은 아니지. 나도 부정할 생각은 없어. 아마 이제는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 가문이 좀 대단하거든. 그런데 그 대단한 슐리츠 가문에서 난 거의 없는 사람이나 다름없어. 그래서 헬리드 같은 작은 도시에서 그러고 있었던 거지.”

“당신도 이번 토벌에 참가하는 거요?”

“그럼. 그러려고 성도까지 온 건데 당연하지. 혹시 그림발드 경은 만났나?”

엔디미온이 고개를 저었다.

“만나 적 없소.”

“그래? 그림발드 경도 성도로 오셨으니 나중에 시간 날 때 인사 한 번 하게.”

“그 사람도 왔소?”

“이번 토벌대는 제법 규모가 크니까 각 교구의 실력 있는 성기사들도 차출하고 있다네. 그림발드 경도 젊었을 때 제법 유명한 성기사였지. 아마 백인대장의 역할을 맡으실 걸세.”

“그럼 혹시 율리아 경도 왔소? 철십자 기사수도회의 율리아 경.”

토벌대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많은 쪽이 더 나을 것 같아서 물어본 것이었다. 사실 율리아의 근황이 좀 궁금하기도 했다. 엘런은 율리아란 이름을 듣고서 눈을 크게 떴다. 얼굴만 봐도 율리아와 아는 사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율리아 경을 알고 있나? 그림발드 경의 제자 말하는 거 맞지?”

“저번에 그녀를 대신해서 악마를 처치했소. 단지 그것뿐이요.”

하룻밤 같이 자기도 했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엘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군. 율리아 경도 이번 토벌에 참가한다네. 그녀도 특등기사니까 토벌에 참가할 자격은 충분하지. 자, 이건 자네를 위해 준비한 추천서일세. 얼른 에스메렐다 경을 만나러 가세.”

에스메렐다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봤지만 아무래도 이번에 토벌대를 이끄는 성기사인 듯 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추천서를 받았다가 에런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 추천서는 한 장뿐이오?”

“그럼 몇 장이 있어야 하는데? 오, 이런. 설마 자네 친구들도 이번 토벌에 참가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이 자들은 아주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소. 토벌대에 참가한다면 큰 전력이 될 것이오.”

엘런은 으음 소리를 낸 후에 말했다.

“영감님은 저번에 한 번 봤는데 잘 싸우더군. 그리고 이 덩치 큰 친구도 잘 싸울 것 같고. 그런데 이 요정 아가씨는 뭘 할 줄 알지?”

베로니카가 당당하게 말했다.

“마법사입니다!”

마법사는 어딜 가나 대접 받는 고급 인력이었다. 베로니카는 엘런이 반색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 아가씨는 안 되겠는데?”

“어, 어째서요?”

“마법사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성기사들은 마법사 싫어해.”

이게 무슨 개소리야. 베로니카는 아연한 상태로 외쳤다.

“이건 차별이에요! 명백한 마법사 혐오라고요!”

“솔직히 악마한테 한 대 맞으면 죽는 주제에 뒤에서 마법으로 깔짝거리는 게 좀 밉상이잖아?”

“그러니까 그건 마법사 혐오라니까요!”

화를 내는 베로니카를 보고서 비다르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엘런과 베로니카가 서로 옥신각신했다. 싸움을 멈춘 것은 엔디미온이었다.

“시간도 아까운데 얼른 그 에스메렐다 경에게 갑시다. 설득이라면 내가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음? 자신 있나? 에우레켈슨 경을 봐서 알겠지만 본청의 성기사들은 좀 선민의식이 있어서 말이야. 은근히 다른 교구 출신들을 차별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네들처럼 성기사도 아니라면 더더욱 차별하겠지. 아마 에스메렐다 경을 설득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걸세.”

“걱정하지 마시오.”

엔디미온이 자신 있게 말했기에 엘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에스메렐다의 집무실까지 안내받았다. 커다란 갈색 문에는 에스메렐다 샤트에란 이름이 적힌 금색의 명패가 걸려있었다. 엘런이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고 잠시 뒤에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났다.

엘런이 문을 열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은사자 기사수도회의 엘런 슐리츠입니다.”

“아, 엘런 경. 들어와요. 그리고 일행들도.”

에스메렐다 샤트에는 금발이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나이는 서른 전후였고 두 눈은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였다. 빙긋 웃으며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그녀를 향해 엔디미온 일행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비서도 없이 혼자 찻물을 끓이고 차를 대접했다. 엘런이 감격하며 찻잔을 받았다. 넓은 집무실 안에는 세 개의 소파가 있었다. 상석에는 당연히 에스메렐다가 앉고 좌우의 소파에 엔디미온 일행이 나누어 앉았다.

우아한 자세로 차 한 모금을 마신 에스메렐다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초면인 사람들끼리 인사부터 좀 할까요? 나는 에스메렐다 샤트에입니다. 보잘 것 없는 몸이지만 추기경의 자리를 맡고 있지요. 이제 당신들의 이름을 가르쳐주겠어요?”

삼십 대의 나이에 추기경의 자리를 맡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문이 대단하거나 능력이 출중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니면 둘 다거나. 엔디미온은 에스메렐다를 보며 말했다.

“엔디미온이오.”

“아, 저는 베로니카입니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스메렐다 경!”

“비다르, 강철 주먹의 비다르.”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에스메렐다는 다시 한 번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그녀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두며 말했다.

“엔디미온, 비다르, 라이오넬. 공교롭게도 모두 영웅의 이름이군요. 요정 아가씨만 빼고요.”

에스메렐다는 소파 등받이에 편안하게 등을 기댔다. 깍지 낀 두 손을 배에 올려두고서 마치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듯한 자세로 말했다.

“당신들이 여기 왜 왔는지는 얼굴만 봐도 대강 알 것 같아요. 날 설득하러 왔겠지요?”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럼 한 번 설득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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