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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70화 (7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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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은 찻잔 안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는 에스메렐다의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정복 아래에 감추어진 손목은 두꺼웠고 우아하게 찻잔을 감싼 손은 거칠었다. 아마 옷을 벗겨보면 그 아래에 수많은 상처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단단한 근육들로 가득하리라.

그녀는 젊고 능력 있었다. 어쩌면 가문의 위세가 대단할지도 모르고. 작은 행동에서부터 느껴지는 자신감은 자신의 가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었다. 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는 자세, 배 위에 올린 깍지 낀 두 손, 다리를 꼰 채로 웃고 있는 얼굴.

그것은 자신이 이곳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이런 자를 설득하는 것은 어렵다. 멍청하지도 않고 말 곳곳에 숨겨진 함정을 쉽게 찾아내니까. 에스메렐다를 설득하려면 대단한 달변가이거나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뜰 만큼 대단한 협상 카드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엔디미온은 이제 자신의 손을 보았다. 나는 어떤 카드를 가지고 있나. 지금 당장 써먹을 만한 것은 마르딜레아다. 식량을 싼 값에 넘겨주고 그 대신에 토벌대에 끼워달라는 것이다. 실력이야 증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럼 그것 말고는 어떤 것이 있나?

손 안에서 가장 빛나는 카드가 있었다. 내기만 하면 반드시 이기는 카드. 이런 입씨름을 할 것도 없이 그냥 내기만 하면 다 끝나버린다. 겨우 그것뿐이랴. 그 누구도 엔디미온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며 건방지게 굴었던 것들 모두 그의 처벌을 두려워하며 벌벌 떨게 될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냥 일어서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기만 하면 된다. 빛을 뿜어내고 기적을 행하며 영웅들이 돌아왔음을 알리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어째서 가시밭길을 가느냐고, 곧게 뻗은 길이 있는데 어째서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가느냐고 말하고 있었다.

성배기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 안에서 반짝이던 빛은 점차 희미해지더니 결국 사라졌다. 그는 결국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영웅들의 시대는 백 년 전에 끝났다. 그들은 이 시대의 존재가 아니었다. 지금 세상에 있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망령이었다. 진작 안식을 가졌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망령. 의무에 매여 있는 망령.

사람들의 시대는 오롯이 사람의 것이어야 했다. 영웅들의 존재는 희망인 동시에 의존이었다. 성배기사가 다시 세상에 나타났음을 알리고 악마들을 처죽인다면 당장은 안온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은? 엔디미온은 결국 호수의 여왕에게 성배를 돌려주어야 했다. 마지막 의무가 끝나고 나면 세상에는 어떠한 영웅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누가 사람들을 지키는가?

영웅이 없어야만 사람들은 전진할 수 있다. 단단한 껍질이 깨지고 어린 새가 마침내 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것은 혼자 날아야 했다. 아주 먼 곳까지. 몹시 힘들고 고단한 일이지만 반드시 그래야 했다.

“차는 됐고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에스메렐다는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장식장 안에서 술을 꺼내왔다. 잔 두 개를 탁자 위에 내려두고서 잔의 절반씩 술을 따랐다. 찰랑거리는 술은 입에 가져가기 전부터 냄새만으로 상당히 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에스메렐다는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웃었다.

“독한데, 그거.”

졸졸 소리가 나면서 다시 잔이 가득 찼다. 엔디미온은 이번에는 마시지 않고 잔을 잠깐 잡았다가 다시 가만히 두었다. 그는 에스메렐다가 잔을 잡는 것을 보며 말했다.

“옛 이야기를 좀 해야겠소.”

“옛 이야기라면?”

“영웅들의 이야기 말이요. 진짜 영웅들.”

성기사가 영웅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을 리가 없다. 백금궁의 주춧돌은 영웅들의 업적으로 만들었고 기둥은 영웅들의 후광으로 올렸으며 지붕은 영웅들의 희생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전부 영웅들의 덕분이었다. 그들이 여명교단과 함께 한 덕분이었다.

“대악마 다르디낭이 처음 나타났을 때를 아시오?”

“글쎄요. 대악마에 대한 이야기라면 책에서 봤습니다만 자세히는 모릅니다. 나는 그 시절의 사람이 아니니까요.”

“대악마는 혼자서 도시 하나를 부수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소.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했지.”

엔디미온은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대악마가 이끄는 사악한 존재들은 마치 거대한 홍수처럼 세상을 집어삼켰소. 그들이 가는 곳마다 불길이 솟고 사람들이 죽었으며 끔찍한 비명이 세상을 가득 채웠소. 그들의 기세는 엄청났고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소.”

에스메렐다는 손에 든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한 모금을 마시는 것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항하는 자들도 있었소. 그들은 스스로 창칼을 들고 있어섰고 처음으로 악마를 죽였소. 아주 작은 승리였소. 그러나 커다란 승리였지. 각지에서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악마들과 싸우기 시작했고 잃어버린 도시들을 서서히 탈환하기 시작했소. 그들은 본래 기사도 아니었고 병사도 아니었소. 그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고 했던 자들이었을 뿐이오.”

“감동적인 이야기로군요. 그래서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그 누구도 성기사가 아니었다는 소리요. 그들은 그저 전능자의 말씀을 믿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고 애썼던 자들이오. 성기사만이 사람을 구하고 악마들을 처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오. 우리가 성기사가 아니란 이유만으로 토벌대에서 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정의롭지 않은 일이오.”

“정의라······.”

에스메렐다가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잔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 어떤 것이 정의로운 일일까요? 당신들을 토벌대에 참가시키는 것? 겨우 그런 일이 정의로운 것이라면 정의란 것은 참 값싸군요.”

“정의란 불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불의를 행하려고 하고 있지.”

“당신들을 토벌대에 참가시키지 않는 것이 불의인가요? 놀랍군요.”

“백 년 전의 성기사는 가장 낮은 곳에 임하고 가장 먼저 죽는 자들이었소.”

엔디미온의 눈은 고요했다. 소리도 없고 시간도 흐르지 않는 공간처럼 보였다.

“그들은 참으로 고행자였으며 진실한 순교자였지. 에스메렐다 경, 자신을 돌아보시오. 자신이 백 년 전의 성기사들과 무엇이 다른지 한 번 생각해보란 말이오. 정말 그들처럼 싸우고 희생하며 전능자의 말씀을 전하려 하고 있소? 난 당신에게 그들처럼 살라고 말하지 않겠소. 하지만 성기사란 이름을 달고 있으면 적어도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려고 노력해야지.”

에스메랄다는 잔을 완전히 비웠다. 술은 아주 독했고 겨우 반 잔만으로도 약하게 취기가 올랐다. 그녀의 두 눈은 불꽃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하!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는 꼴이란. 엔디미온, 잘 들어요. 나도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불의가 무엇인지 압니다. 백 년 전 성기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라고? 나는 당신들을 토벌대에 끼워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 말을 들어야 할 만큼 잘못 살지는 않았어요.”

“토벌대의 자리를 가지고 장사나 하고 있으면서?”

“뭐?”

에스메렐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누가 보아도 화가 난 모습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엘런은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아주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오. 사람들이 모이면 집단이 생기고 집단이 생기면 온갖 일들이 벌어지지. 당신은 토벌대의 자리를 가지고 거래를 하고 있었을 거요. 그게 아니라면 기를 쓰고 우리를 막을 이유가 없지.”

엔디미온은 침을 삼키는 에스메렐다를 보며 말을 이었다.

“뷔브르는 강력한 악마이니 그를 죽이는데 큰 공을 세운다면 분명 영웅이라 불리게 될 것이오. 토벌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이겠지. 성기사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널리 떨칠 기회를 탐낼 것이오.

그런데 그들 모두를 데려갈 수는 없었을 거요. 당연히 데려갈 수 있는 숫자에 제한이 있었겠지. 참가하려는 사람은 많은데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정해져 있다. 장사하기에는 딱 알맞은 상황이로군.”

에스메렐다의 얼굴이 상기됐다가 다시 희게 변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진정시켰다. 화가 끝까지 차올랐음에도 억지로 참았다.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을 마신 후에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내가 그랬다는 증거가 있나요?”

“아까도 말했지만 난 많은 일을 경험해 본 사람이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럴듯한 가설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그리고 에우레킬슨의 태도가 영 이상했소. 나는 로게나 대교구장인 그림발드 경의 추천을 받았소. 본청의 성기사들이 다른 교구 출신들을 배척한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로게나 대교구는 여명교단에게 있어서 아주 상징성이 큰 곳이오. 그런 곳을 관리하고 있는 그림발드 경의 추천을 무시한다? 굳이 왜? 토벌대의 자리가 아주 민감한 사안이 아닌 이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하, 에우레킬슨. 그 짜증 많은 친구.”

버릇처럼 한숨이 나왔다. 에스메렐다는 비어있는 잔에 술을 채우고서 손으로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넘겼다. 길게 자란 황금색 머리카락은 물결치듯 이마 뒤로 넘어갔다가 다시 스르륵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난 당신의 의혹에 대해서 부정도 하지 않고 긍정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하군요. 당신들은 대체 왜 토벌대에 참가하려고 하는 건가요?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토벌대에 참가하는 것은 아주 큰 영광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에 돌아오는 영광이 큰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지요. 성기사들이 이번 토벌에서 큰 공을 세우면 얻는 것이 많습니다. 여명교단 내부에서 입지가 커지니까요. 입지가 커지면? 할 수 있는 것도 늘어나지요. 위험한 만큼 돌아오는 것도 많다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요? 성기사도 아닌 당신들이 얻는 것이라고는 악마사냥꾼으로서 몸값이 약간 올라가는 것뿐입니다. 그게 전부라고요. 그런데 왜 굳이 토벌대에 끼려고 하지요? 돈 때문이라면 괜찮은 일거리를 소개시켜줄 수도 있어요.”

“숨 쉬는데도 이유가 있어야 하지는 않지.”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하면서 엔디미온이 일어났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일어났고 엘런만이 멍청하게 엔디미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악마를 죽이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오? 왜 뷔브르를 죽이려고 하냐고? 그게 내 의무니까.”

문고리를 잡은 채로 걸음을 멈춘 엔디미온이 말했다.

“잘 생각하시오. 당신의 의무가 무엇인지. 이만 가보겠소.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길 기대하겠소.”

문이 열리고 엔디미온 일행이 바깥으로 나갔다. 엘런은 멍하니 있다가 조심스럽게 에스메렐다에게 인사를 하고 열린 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에스메렐다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툭 내뱉었다.

“의무라······.”

성기사로서의 의무. 성배기사의 적생자라 말하는 자들이 지켜야 할 의무. 에스메렐다는 혼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엔디미온의 잔을 손으로 잡았다. 머리가 복잡해서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도톰한 입술을 벌려 한 모금 마시는 것과 동시에 혀끝에서 무언가 이상함이 느껴졌다.

“이건······.”

기대했던 씁쓸하면서도 달큰한 맛은 없었다. 혀끝에 방울 맺힌 것은 투명한 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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