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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 애석한 일이지만 자네들이 토벌대에 참가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리고 내 인생도 끝난 것 같고. 아마 난 죽을 때까지 소똥 냄새나는 헬리드에서 술이나 마시다가 죽겠지. 참 안타까운 일이야.”
성도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집에서 엘런은 자꾸만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이곳은 슐리츠 가문의 소유지만 성도에 올라올 때면 엘런이 주로 사용한다고 했다. 가끔씩 그의 형제들이 이용할 때가 있어서 마주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다행히도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엔디미온 일행은 그곳에 짐을 내려두고 휴식을 취했다. 집을 관리하는 중년의 여자가 간단한 요깃거리들을 가져다 주었다. 이름은 타릴리아 부인이라고 했다. 라이오넬은 꾸벅꾸벅 졸다가 잠들었고 비다르와 베로니카는 스콘에 귤잼을 발라 먹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한가롭게 볕을 쬐고 있었다. 그는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손차양을 하면서 말했다.
“글쎄. 나는 에스메렐다란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멍청한 것 같지는 않던데.”
“아니, 그건 당연한 소리고. 에스메렐다 경은 가장 어린 나이에 추기경 자리에 오른 사람일세. 멍청할 리가 없지.”
“그럼 무엇이 걱정이오? 내가 장담하는데 날이 저물기 전에 에스메렐다 경이 사람을 보낼 거요.”
“왜? 그 불경한 자를 잡아죽이라고?”
“그런 짓을 하면 그 여자가 먼저 내 손에 죽겠지.”
“허······. 진짜 싸움만 잘하는 사람이었군. 이제는 허언증까지.”
엔디미온은 웃으며 창문 너머를 쳐다보았다. 멀리서 따각따각하면서 말발굽 때리는 소리가 났다. 엘런은 불안한 얼굴로 거실 안을 배회하느라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말발굽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고 소리의 간격이 점차 좁아지더니 결국 잦아들었다. 툭 하는 소리는 말 위에서 뛰어내려 발로 바닥을 때리는 소리일 것이다.
아마 십 초 내로 문을 두드릴 것이다. 엔디미온은 조용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정확히 아홉에서 열로 넘어갈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엘런님, 손님이 오신 모양입니다. 제가 나가볼까요?”
타릴리아 부인이 말하자 그제야 누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엘런이 머리를 잡아뽑는 것을 멈추었다. 그는 크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나가보지요, 타릴리아 부인.”
엘런은 손빗으로 머리를 정리한 후에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비록 가문에서 내쳐진 입장이라고 해도 그는 존귀한 슐리츠 가문의 태생이었다. 남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바깥에 누구인가?”
“안녕하십니까, 엘런 경. 추기경 각하께서 보내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흐끕. 엘런이 딸꾹질을 했다. 추기경?
“추기경? 어떤 추기경 말인가? 혹시 아버님?”
슐리츠 가문의 주인이자 엘런의 아버지는 추기경들 중 하나였다. 설마 못난 아들이 돌아왔다고 집에 부르려는 것인가?
“아닙니다. 에스메렐다 각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엘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엔디미온을 보았고 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서 문을 쳐다본 엘런은 침을 한 번 삼킨 뒤에 말했다.
“아, 들어오시게. 손님을 너무 오래 바깥에 세워두었군. 자자, 들어오시게.”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했다. 흰색 망토와 금색으로 반짝이는 장미 문양은 에스메렐다 추기경이 이끄는 기사수도회의 사람이란 것을 의미했다.
“안녕하십니까, 엘런 경.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칼립손입니다. 저번에 연회장에서 뵙고 정말 오랜만에 뵈는군요.”
엘런은 칼립손이 말하는 연회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분명 몇 년도 전의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 칼립손 경. 에스메렐다 경께서 보냈다고 했는데 어쩐 일인가? 혹시 잡아가야 할 사람이 있다면 저기 있네.”
엔디미온을 가리키는 손을 보고서 칼립손이 웃었다.
“아닙니다. 무언가 오해하셨나 보군요. 각하께서는 엔디미온님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토벌대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증명해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토벌대에 참가하는 성기사들은 모두 특등기사입니다. 상등기사도 몇 있지만 그들의 실력은 특등기사와 같지요. 각하께서는 다른 성기사들을 납득시키려면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 제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수많은 성기사들 중에서 걸러지고 또 걸러진 것이 바로 특등기사였다. 그들은 저급한 악마 정도는 혼자서 상대할 수 있었고 강력한 악마도 충분한 숫자가 갖추어지면 대응할 수 있었다. 여섯 날개의 악마라 불리는 뷔브르는 다르디낭의 적자였고 그런 존재를 상대하려면 당연히 특등기사여야 했다.
엔디미온 일행이 바로 그 특등기사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다른 성기사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손차양을 거두고 쏟아지는 햇빛을 똑바로 맞으며 입을 열었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소.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소? 악마를 죽여야 하오? 아니면 마녀? 악마숭배자?”
칼립손이 빙긋 웃었다. 머리카락을 짧게 치고 얼굴에 긴 흉터가 있는 그는 남자다운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웃는 얼굴은 아이 같았다.
“악마를 죽여주겠다니 참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아쉽게도 성도 근처에는 악마가 없군요. 자격의 증명은 대련으로 하겠습니다. 백금궁으로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엔디미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칼립손이 웃었다.
“그럼 가시지요. 엘런 경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어? 아, 나 말인가? 그래, 가도록 하지.”
칼립손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나섰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뒤를 따랐고 타릴리아 부인이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백금궁으로 가는 동안 칼립손은 대련 방식에 대해서 설명했다. 한 사람씩 성기사 한 명과 싸우게 될 것이며 상대는 모두 특등기사라고 했다. 이기는 쪽은 토벌대에 참가할 자격을 얻고 지는 쪽은 자격을 잃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베로니카만은 불안하게 눈알을 굴렸다. 그녀는 특등기사를 혼자서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마법사가 특등기사를 싸움으로 이길 수 있다면 왜 마법사를 하겠는가. 그녀가 조심스럽게 자신도 똑같은 조건에서 싸워야 하냐고 묻자 칼립손이 말했다.
“마법사로군요. 괜찮습니다. 아가씨는 그냥 마법을 몇 개만 보여주시면 됩니다. 성기사들은 마법사를 싫어하지만 귀한 전력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베로니카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벌써 백금궁에 도착한 엔디미온 일행은 다시 중앙의 길로 갔다. 한참 걸어가다 보니 저 끝에 연병장이 보였다. 칼립손은 손으로 연병장을 가리켰다.
“저곳입니다. 가시지요.”
엔디미온 일행은 연병장으로 발을 내딛었다. 건물의 천장이 사라지고 쏟아지는 햇볕이 그대로 머리 위로 떨어졌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았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에스메렐다였다. 그녀는 정복 위에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엔디미온과 눈이 마주치자 벌렸던 입을 꾹 닫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눈빛이 달랐다.
연병장에는 그녀 말고도 다른 성기사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에스메렐다가 각 기사수도회를 소집한 모양이었다. 그들 중에는 가시왕관 기사수도회도 있었다. 에우레킬슨은 입으로 칫 소리를 냈다.
칼립손은 연병장을 둘러보고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보다 구경꾼들이 많군요. 백금궁에 있는 기사수도회 중 거의 대부분이 참석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특등기사들은 아주 강하니까요.”
“걱정하지 마시오.”
엔디미온은 성큼성큼 연병장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는 숨을 한 번 삼켰다가 내뱉으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와 싸울 자가 누구냐!”
커다란 목소리에 몇몇 성기사들이 몸을 움찔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엔디미온은 이제 보통의 목소리로 말했다.
“에스메렐다 경, 대련 방식에 대해서는 오면서 들었소. 상대는 내가 정하는 거요? 아니면 이미 정해져 있는 거요?”
에스메렐다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진중했다.
“여기 있는 성기사들은 모두 강력한 힘을 가진 실력자들입니다. 누구와 붙어도 공정한 싸움일 것이니 당신이 선택하세요.”
엔디미온은 잠깐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뻗었다.
“아무나 괜찮다면 저 자로 하겠소.”
그가 고른 것은 에우레킬슨이었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일반 성기사가 아니라 기사수도회의 대장을 고르다니.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어도 무모한 짓이었다. 에우레킬슨이 얼마나 많은 공적을 세웠는지 아는 자들은 엔디미온을 비웃었다.
에우레킬슨은 같잖은 짓거리를 봤다는 듯이 냉소했다. 그는 망토를 벗고 싸울 준비를 했다. 고결한 에우레킬슨은 정당한 결투로부터 결코 도망치지 않았다.
“안 됩니다.”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그를 멈추게 했다. 에스메렐다가 말했다.
“에우레킬슨 경은 가시왕관 기사수도회의 대장입니다. 만약 이 대련으로 다치기라도 한다면 아주 곤란해집니다. 다른 성기사를 고르세요.”
에우레킬슨은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에스메렐다는 나긋한 말씨로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엔디미온과 싸우면 에우레킬슨이 다칠 거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에스메렐다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내치면 될 일인데 굳이 사람들을 모아서 대련을 하는 것도, 자신을 싸우지 못하게 하는 것도.
화가 났지만 에스메렐다는 추기경이었고 에우레킬슨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그도 추기경의 자리에 오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직급의 차이가 있으니 당장은 참아야 했다.
“그냥 대련인데 다칠 것까지야.”
엔디미온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들고 있던 손가락을 그대로 왼쪽으로 움직였다.
“그럼 저 친구.”
가시왕관 기사수도회의 성기사였다. 누가 보아도 일부러 에우레킬슨을 도발하고 있는 짓이었다. 성기사는 굳은 얼굴로 에우레킬슨을 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연병장으로 내려갔다. 엔디미온은 자신의 상대가 내려오자 등에 메고 있던 창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 두 자루도 마찬가지였다.
무기를 모두 내려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입고 있던 사슬갑옷과 갬비슨까지 모두 벗어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성기사는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간소한 옷차림이 된 엔디미온이 이제 시작하자는 듯이 에스메렐다를 쳐다보자 성기사가 물었다.
“······뭐하는 짓거리냐?”
“혹시라도 널 죽일까 봐.”
“건방진 놈! 무기를 들어라! 아니면 나도 무기를 들지 않고 싸우겠다!”
엔디미온은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동안 가만히 있는 그를 보고서 성기사는 이를 갈며 무기를 버렸다. 그리고 갑옷도 벗으려는데 엔디미온이 말했다.
“그건 입고 있지. 안 그러면 뒈질 수도 있는데.”
“닥쳐라!”
성기사는 기어코 갑옷을 벗고 맨몸으로 싸우려고 했다. 엔디미온은 기다리기 지루하다는 듯이 에스메렐다를 쳐다보았고 그녀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대련 시작하겠습니다. 양측 위치로.”
성기사와 엔디미온이 마주 보고 섰다. 에스메렐다가 시작을 외치자 먼저 움직인 것은 성기사였다. 그는 흥분한 상태였고 엔디미온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빠르게 날아오는 주먹을 보면서 엔디미온은 자세가 괜찮다고 생각했다.
특등기사란 이름을 구슬치기로 따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위험을 뛰어넘어 훌륭하게 의무를 수행했기에 비로서 그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만약 이 성기사가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제대로 싸웠다면 제법 괜찮은 승부가 됐으리라.
엔디미온은 고개를 숙여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고 곧장 성기사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낮은 자세에서 튀어오르듯 날린 주먹은 성기사의 턱에 깔끔하게 적중했고 그 반동으로 성기사의 몸이 낮게 날아올랐다. 꽉 쥐고 있던 왼쪽 주먹은 때리기 딱 좋은 위치까지 올라온 배를 힘껏 때렸다.
배를 맞은 충격 때문에 몸이 반으로 접혔다. 엔디미온은 배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는 성기사의 등을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반사적으로 튀어오르는 머리를 붙잡고 주먹으로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
고개가 홱 돌아갔으나 비명은 없었다. 성기사의 몸은 바람에 날아가는 낙엽처럼 불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쓰러진 몸이 바닥과 부딪혀 툭 소리가 났다. 흙바닥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가 차츰 사라졌다. 모두가 침묵했고 엔디미온만이 덤덤히 말했다.
“말했잖아. 뒈진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