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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이 아주 간단하게 성기사를 쓰러트리자 연병장 안이 조용해졌다. 승부의 결과를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특등기사가 졌다는 것 자체는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그림발드의 추천을 받은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특등기사와 비슷한 수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슷한 실력끼리 붙었을 때 누가 이기든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놀란 것은 승부의 내용 때문이었다. 그것은 제대로 싸웠다고 볼 수도 없을 만큼 아주 싱겁게 끝났다. 엔디미온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모두가 치열한 싸움을 기대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그 누가 특등기사를 저만큼 압도적으로 이기겠는가. 오직 교황의 여섯 기사만이 가능하리라. 모두가 그리 생각했지만 억지로 부정했다. 성기사도 아닌 일개 악마사냥꾼 따위가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엔디미온의 강력함에 감탄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이 가지는 감정은 강자에 대한 동경이거나 호승심이었다.
“죽지는 않았을 거요. 얼른 데려가서 쉬게 하시오. 내 실력에 대한 증명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다들 만족하셨소? 아니면 한 번 더 싸워야겠소?”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에스메렐다가 말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그럼 다음 대련을 시작하지요. 누가 나올 건가요?”
엔디미온은 자신의 무구를 모두 챙겨서 자리로 돌아왔다. 그가 벗었던 갑옷을 입는 사이에 다음으로 나간 것은 라이오넬이었다. 그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뒤에 손으로 턱을 긁었다. 장님에 노인, 누가 보아도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성기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굳이 대련을 할 이유가 있나? 애초에 싸우지도 못할 것처럼 보이는데? 라이오넬은 다시 한 번 하품을 한 뒤에 말했다.
“아무나 나오게. 누가 상대든 똑같으니까.”
성기사들도 동의했다. 저런 노인을 상대로 누가 나가든 결과는 똑같지 않겠는가. 그 누구도 라이오넬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노인에 장님인 적을 상대로 누가 지겠는가.
웅성거리던 성기사들 중에서 한 명이 훌쩍 연병장으로 내려왔다. 특별할 것 없어보이는 흔한 생김새였지만 그래도 특등기사였다. 라이오넬과 성기사가 서로 마주 보고 서자 연병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에스메렐다 역시 라이오넬을 보고서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않았다.
“대련 시작하겠습니다. 양측 위치로.”
성기사는 검을 들고서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설마 이걸 지겠어? 대련이 시작됐지만 라이오넬은 검을 뽑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대련이 시작됐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무방비한 상태의 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영 찝찝했던 성기사는 검을 내리고 외쳤다.
“영감님, 대련 시작했다고. 뭘 그리 멍하니 있는 거야?”
그제야 라이오넬이 움직였다. 느릿하게 검을 머리 위까지 들어올렸다. 그리고 검의 끝부분으로 성기사를 노렸다. 마치 돌격하려는 황소와 같은 자세였다. 성기사는 그 모습을 보고서 먼저 움직였다. 상대가 노인이니 상처만 약간 내서 제압할 생각이었다. 눈도 안 보이는 사람이 무슨 수로 싸우겠는가.
검이 공기를 가르며 움직였다. 노리는 곳은 어깨였다. 소리를 들은 라이오넬이 움직였다. 그는 내밀고 있던 검으로 어깨를 방어했다. 그리고 검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 손목을 비틀어 검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 상태 그대로 상단에서 하단을 향해 대각선으로 크게 베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반격에 성기사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라이오넬은 발자국 소리를 쫓아서 추격했다. 그가 휘두르는 검은 아주 빨랐고 묵직했다. 성기사는 방어에 집중했으나 쉴 새 없이 날아오는 공격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입술을 깨물면서 억지로 반격을 시도했다. 건틀릿 낀 손으로 공격을 막아내고 빈틈을 노려서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라이오넬은 모든 공격에 반응했다. 분명 장님인데도 눈이 보이는 것처럼 움직였다. 몇 번이나 검이 부딪치며 불티가 튀었으나 그 어떤 것도 라이오넬에게 상처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무리한 공격은 반격의 기회를 내주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라이오넬의 검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무시무시한 천둥소리가 귀를 때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갑옷에는 길게 칼자국이 남아있었다. 성기사는 눈을 크게 떴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만약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더라면 방금 공격으로 배가 잘리고 내장을 모두 쏟았을 것이다. 반응조차 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명확했다.
성기사는 검을 떨어트리고서 말했다.
“······항복하겠다.”
라이오넬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두 번째 대련 역시 엔디미온 일행의 승리로 끝났다. 아까 전처럼 압도적인 승리는 아니었지만 눈썰미가 있는 자들은 라이오넬이 일부러 힘을 빼고 싸웠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특등기사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진 자들이 두 명이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성기사들은 이제 비다르를 보고 있었다. 큰 키와 커다란 덩치, 두꺼운 주먹과 튼튼한 허벅지. 누가 보아도 강자였다.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의 대련을 생각해보면 비다르 역시 압도적으로 강할 것이 분명했다. 성기사들은 괜히 나갔다가 추태를 보일 것을 두려워했다. 그 모습을 보며 비다르가 낄낄 웃었다.
“여기는 겁쟁이들뿐이냐? 나와 싸울 자가 누구냐! 아무나 상관없다! 얼른 나와라! 강철 주먹이 상대해주마!”
모두가 서로의 눈치만 볼 때 용감하게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비다르만큼 덩치가 컸고 각진 얼굴에 단단한 턱을 가진 남자였다. 성기사보다는 뱃사람에 어울리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는 연병장으로 내려오면서 소리쳤다.
“덤벼라! 내가 상대하겠다!”
“오우, 목소리 한 번 큰데.”
비다르가 씩 웃으며 연병장으로 나가려다가 뒤로 고개를 돌려서 엔디미온에게 말했다.
“야.”
“뭐.”
“이것 때문에 주먹을 쓸 수가 없잖아.”
엔디미온이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그러자 비다르를 괴롭혔던 빛나는 끈이 사라졌다. 드디어 두 주먹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그래, 이거지. 다들 잘 보라고. 강철 주먹 나가신다.”
“야, 비다르.”
“아, 또 왜?”
엔디미온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죽이지 마라.”
“이야, 오늘따라 지하투기장이 그립네. 거기선 그냥 다 죽였는데.”
비다르가 구시렁거리면서 연병장으로 나갔다. 그는 쏟아지는 햇볕을 맞으며 기지개를 크게 켰다. 오랜만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허공에다 주먹을 몇 번 날렸다. 그 모습을 보던 성기사가 말했다.
“격투가라면 나도 격투로 싸우겠다.”
“이 친구 밑밥 잘 까네.”
“뭐?”
“너 지금 그거잖아. 아, 내가 무기 들고 싸웠으면 이겼는데 맨손으로 싸워서 졌다. 지금 그러려고 맨손으로 덤비겠다는 거잖아. 새끼, 머리 좀 쓰네?”
“건방진 놈! 무기가 없어도 너 따위는 이길 수 있다. 난 그저 공정한 대련을 하려는 것뿐이다!”
“공정한 대련을 하려면.”
비다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성기사에게 다가갔다. 주먹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로 가깝게 바싹 붙어서 속삭이듯 말했다.
“네가 무기를 들어야지, 멍청한 놈아. 엔디미온이 싸우는 거 보고 느낀 게 없어? 생각이 없는 거냐, 아니면 멍청한 거냐?”
성기사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오기가 생겼다. 그는 무기를 들지 않았고 굳이 맨손으로 싸우려고 했다. 비다르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뒤로 돌아갔다. 에스메렐다가 말했다.
“마지막 대련 시작하겠습니다. 양측 위치로.”
에스메렐다가 대련 시작을 외치자 비다르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라이오넬처럼 상대를 봐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강철 주먹은 성기사의 얼굴을 노렸다. 성기사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들어올려서 얼굴을 방어했다.
주먹이 성기사의 팔에 부딪쳤다. 그는 무기는 들지 않았지만 갑옷은 그대로 입고 있었다. 똑같이 맨손으로 싸우더라도 갑옷을 입고 있는 쪽이 유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쭈, 막아?”
비다르의 주먹은 강철이었다. 그것은 사실상 철퇴와 같았고 힘껏 휘두른 주먹은 갑옷을 우그러트렸다. 성기사는 갑옷이 종이처럼 구겨졌다는 사실에 놀랐다. 얼른 뒤로 물러나서 거리를 벌리려는데 비다르가 빠르게 따라잡아서 다시 한 번 주먹을 날렸다. 부웅 소리를 내면서 날아오는 주먹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뭐해? 덤벼! 덤비라고! 으하하하! 어디를 때릴까? 여기? 여기? 아니면 여기? 여기다, 이 자식아!”
비다르는 완전히 성기사를 가지고 놀았다. 묵직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이는 주먹은 갑옷조차 막아줄 수 없었다. 그가 성기사를 때릴 때마다 갑옷이 우그러졌다. 하지만 성기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그저 몸을 웅크리고 반격의 기회만을 노렸다.
“뭐하냐? 왜 맞고만 있어? 때려야지! 때려보라고! 안 때려? 그럼 내가 때린다!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다시 오른쪽! 으하하하!”
성기사는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 얻어맞아서 체력이 빠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방금 전에 날린 비다르의 주먹은 동작이 컸고 그만큼 헛점도 많았다. 억지로 힘을 짜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비다르가 힘껏 휘두른 주먹은 허공을 갈랐고 처음이자 마지막 반격 기회가 찾아왔다. 성기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비다르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이건 분명히 맞는다. 빗나갈 수 없는 공격이었다. 비다르의 깜짝 놀란 얼굴이 그 증거였다. 주먹이 얼굴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크게 떴던 눈이 점차 작아졌다. 반대로 입꼬리는 점차 올라갔다. 마치 웃는 것처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혓바닥이 움직였다. 얼굴과 주먹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게 성기사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비다르가 웃었다.
“까꿍.”
주먹이 얼굴을 때렸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기사는 알고 있었다.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 것이 아니다. 얼굴이 주먹을 향해 움직인 것이다. 비다르는 날아오는 주먹을 향해서 오히려 얼굴을 내밀었다. 크게 웃는 얼굴은 마치 상자 안에서 튀어나온 인형 같았다. 분명히 주먹과 얼굴이 부딪쳤는데 부러진 것은 성기사의 손목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비다르는 껄껄 웃으며 성기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투구를 썼다고 해도 갑옷조차 우그러뜨리는 힘으로 얼굴을 가격하면 과연 머리가 버틸 수 있을까. 이것은 대련이었고 상대를 죽이는 것은 엄격히 금지됐다. 하지만 비다르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성기사들이 그를 말리기 위해 연병장으로 내려오려고 할 때 누군가 말했다.
“거기까지 해라, 비다르.”
엔디미온이 연병장으로 걸어나오자 비다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잡고 있던 머리를 휙 내던졌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씩 웃었다.
“거 미안하게 됐수다. 이 친구가 생각한 것보다 너무 약하네.”
“비다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자리로 돌아가.”
비다르는 구시렁대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태도에 성기사들이 분노했다. 연병장 안이 다시 소란스러워지려고 하자 에스메렐다가 박수를 쳐서 주의를 모았다. 그녀는 추기경다운 위엄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대련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들은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증명했고 토벌대에 참가할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엔디미온, 토벌대에 함께하게 된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비다르? 우리와 함께 가려면 조금은 겸손을 배우는 것이 어떨까요?”
“다들 너무 째려보는군. 아, 알겠어, 알겠어.”
에스메렐다는 이제 엔디미온을 보았다.
“엔디미온, 잠깐 내 방에서 이야기 좀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