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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메렐다가 해산을 명했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주춤거리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각 기사수도회의 대장들이 움직이지 않고 엔디미온 일행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아서 베로니카는 얼른 뒤로 돌아버렸다. 그녀의 심약한 마음은 그런 시선을 바로 받아낼 정도로 담대하지 않았다.
성기사들이 제자리에 가만히 있자 에스메렐다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를 따르는 황금장미 기사수도회가 움직였고 엔디미온 일행이 그 뒤를 따라갔다. 각 기사수도회는 그제야 자리를 떠났다.
추기경의 집무실까지 가면서 엘런이 엔디미온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들이 강한 건 잘 알겠어. 그런데 말이야, 굳이 그리 요란스럽게 굴었어야 할 이유가 있나? 응? 굳이 다른 기사수도회를 도발할 이유가 있어야 했냐는 말이야. 난 저 영감님이 천둥검이 어쩌고 하면서 난리를 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소란을 일으킨 건 자네 두 명이었군. 이 검은 친구는 저번에는 없더니 어디서 데려온 건가? 성질머리가 대체 왜 저래?”
검은 친구라고 불린 비다르가 말했다.
“우리 말도 많고 걱정도 많은 친구, 내가 묶여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 안 그랬으면 영원히 닥치게 만들었을 거니까.”
“봐, 저런 태도가 문제라고.”
엘런과 비다르가 서로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칼립손이 웃으며 엔디미온에게 다가왔다.
“대련 잘 봤습니다. 대단한 실력이더군요. 싸우는 것을 보니 저는 상대도 안 될 것 같군요.”
“겸손하시군. 그 정도는 아닐 거요.”
엔디미온도 웃었다. 칼립손은 에스메렐다의 부관이었고 황금장미 기사수도회의 부대장이었다. 같은 특등기사라고 해도 그 안에서 수준 차이는 있었다. 단지 특등기사 이상의 등급이 없어서 실력의 차이가 있어도 똑같이 특등기사라고 불릴 뿐이었다. 추기경의 부관인 칼립손이라면 분명 괜찮은 승부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칼립손은 손사래를 쳤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졌을 거라고 말했다. 비다르는 겸손을 몰라서 문제인데 칼립손은 너무 겸손해서 문제였다.
“집무실에 도착했군요. 다른 분들은 손님방에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칼립손 경, 안내해드려.”
“알겠습니다, 각하.”
엔디미온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손님방으로 이동했다. 성기사들은 각자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났으므로 복도에는 이제 엔디미온과 에스메렐다뿐이었다. 그들은 조용히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 안에서는 알싸한 냄새가 났다. 박하향이 코끝을 맴돌다가 차츰 사라졌다. 방 안으로 들어온 에스메렐다는 물조리개를 들고서 창가의 화분에 물을 주었다. 물기를 머금고 한층 더 싱그럽게 빛나는 것은 흰색의 수선화였다.
“대단한 실력이더군요. 내가 기대했던 것 만큼. 덕분에 내가 받아야 할 돈이 약간 줄어들겠군요. 대신에 비난은 약간 늘어날 거고.”
“그럼 내가 선물을 하나 주겠소.”
에스메렐다의 길쭉한 손가락이 꽃을 건드렸다.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어떤 선물이요?”
“토벌대를 꾸리려면 보급 역시 중요한 문제지. 이제부터 식량을 사들여야 하지 않소? 내가 아는 상단이 있소. 그쪽과 거래하시오. 값싸게 넘겨줄 것이오.”
“누구랑 거래하라는 소리인가요?”
“자엘라의 마르딜레아와 거래하시오. 그의 가문이 상당한 양의 식량을 가지고 있소. 이익을 거의 남기지 않는 수준에서 거래할 것이오.”
에스메렐다가 웃었다.
“콘타나디오 가문 말이군요. 내가 당신 생각을 모를 줄 알아요? 그쪽과 독점 거래를 통해서 콘타나디오 가문의 영향력을 늘리려는 생각이잖아요. 그만한 가문이 여명교단과 거래를 트면 덩치가 더 커질 것이고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여명교단 내부에 스리슬쩍 끼어들게 되겠지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그래서 어쩌시겠소? 콘타나디오 가문은 벌써 상당한 양의 식량을 사들였소. 다른 상단들보다 더 빠르게. 다른 곳과 거래하면 지출이 상당할 거요.”
“당신이 정보를 주었군요.”
“장사를 하려면 정보가 제일 중요하니까.”
“그래요. 그럼 그쪽과 거래를 하도록 하지요. 지금보다 더 위를 노리려면 힘과 돈이 함께 있어야 하지요. 나는 힘이 있고 콘타나디오 가문은 돈이 있으니 괜찮은 짝궁이로군요.”
“콘타나디오 가문을 이용하려고 하는군.”
“난 이용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이용해요.”
엔디미온은 웃었다. 에스메렐다는 자신감이 넘치는 여자였다. 그런 자신감이 그녀를 지금 이 자리로 올려보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가 범상치 않은 존재란 것을 알았다. 엔디미온은 이제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그래서 굳이 날 방으로 불러서 하려는 말이 무엇이오.”
“당신이 나가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당신은 의무에 대해서 말했지요.”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메렐다는 등 뒤쪽에서 쏟아지는 햇볕을 맞으며 두 손을 깍지꼈다. 갈색의 머리카락은 황금처럼 빛났다.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 성배기사의 적생자라 말하는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 나도 옛날에는 그런 것에 대해 고민하던 때가 있었지요. 아마 일곱 살 때였나.”
“지금은 아니고?”
“아니었는데 오늘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 때문에.”
“나 때문이라.”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에스메렐다의 도톰한 입술은 할 말을 머금고 있음에도 뱉어내지 않았다. 그녀는 엔디미온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기다리다 지친 그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엔디미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그리고 그 위를 춤추며 날아다니는 먼지들, 미적지근한 고요함. 인내심이 먼저 다한 것은 에스메렐다였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에스메렐다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소녀처럼 상기됐고 두 눈에는 열기가 감돌았다. 엔디미온은 느릿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찌 다 알겠소. 다만 스스로도 확신이 없는 생각은 대개 남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법이오. 그러니 혼자만의 생각으로 남겨두시오. 괜히 떠벌리고 다니지 말고.”
“난 알아야 해요.”
에스메렐다가 엔디미온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가 상반신을 바투 내밀고 엔디미온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금색의 머리카락, 바다 같은 두 눈, 시원하게 뻗은 콧날. 자꾸만 시선을 잡아당기는 얼굴이었다. 에스메렐다의 시선은 이제 아래로 내려갔다. 커다란 체격, 강인한 뼈, 단단한 근육, 생명력이 충만한 육체.
“어째서?”
“난 이번 토벌대를 이끄는 입장이니까. 난 모든 것을 알아야 해요. 왜냐하면 당신은 이제부터 내 명령에 따라야 하잖아?”
손이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약간 처들고 어깨 위의 손을 붙잡았다. 에스메렐다가 약간 얼굴을 찡그렸으나 그녀는 저항없이 손을 내렸다.
“충고 하나 하지.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려고 하지 마시오.”
“······쌀쌀맞군요.”
“나와 친해지려면 먼저 능력을 증명하시오. 난 능력 있고 야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지 않으니까.”
에스메렐다가 뒤로 물러났다.
“의무를 다하라는 소리인가요?”
“성기사라면 마땅히 그래야겠지.”
“그 무뚝뚝한 점이 정말 마음에 드는군요. 그래서 더욱 탐나요.”
“충고를 명심하시오.”
에스메렐다가 샐쭉하게 웃었다.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고 비뚜름하게 입술을 기울이며 웃는 것조차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어떠한 감흥도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소. 로아니스에 대해서 아시오?”
“로아니스? 사도왕 로아니스 말인가요?”
“그래, 그 악마 말이오. 아무래도 뷔브르와 로아니스가 충돌할 것 같소.”
“그 둘이요? 아, 본래 그 두 악마는 사이가 나빴었지요. 그런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지요?”
“로아니스가 그리 말했소. 여기 오기 전에 한 마을에서 그와 충돌했는데 내가 뷔브르를 섬기는 악마숭배자인 줄 알더군.”
에스메렐다가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출정 시기를 잘 잡아야겠군요.”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출정에서 로아니스의 존재는 가장 큰 변수였다. 만약 뷔브르와 싸우는 도중에 로아니스가 나타난다면 그가 취할 행동은 두 가지였다. 뷔브르에 협력해서 일단 성기사들부터 죽이거나 아니면 뷔브르와 성기사들을 전부 공격하거나. 어느 쪽이든 혼란스럽게 될 것은 뻔했다.
뷔브르와 로아니스가 싸우고 난 후를 노리려고 해도 로아니스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그걸 정확히 노릴 수 없었다. 만약 너무 늦게 도착한다면 이긴 쪽이 진 쪽의 힘을 흡수해서 더 강력한 악마가 탄생해버릴 것이다. 차라리 뷔브르부터 제거하는 쪽이 더 나았다.
“내가 전할 말은 이게 끝이오. 당신도 더 할 말 없다면 이만 나가보겠소.”
“아니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요.”
“그건 나에 대한 개인적인 궁금증이요, 아니면 악마에 대한 궁금증이요?”
“당신에 대한 궁금증이요.”
“그럼 묻지 마시오.”
엔디미온은 그대로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에스메렐다가 멍하니 닫힌 문을 보고 있었다.
“엔디미온 씨! 이야기는 다 끝났나요?”
“뭐하고 있었나?”
손님방은 에스메렐다의 집무실 바로 오른쪽에 있었다. 그곳에는 엔디미온 일행 말고도 칼립손도 함께 있었다. 베로니카는 손가락으로 불꽃을 조종하던 것을 멈추고 말했다.
“칼립손 경께 마법을 보여드리고 있었어요. 제가 마법사라는 걸 증명해야 하잖아요?”
칼립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충분한 증명이 된 것 같습니다. 마법 실력이 상당하군요. 토벌대의 괜찮은 전력이 될 것 같습니다.”
“어, 칼립손 경은 마법사를 싫어하지 않으세요?”
“성기사들이 마법사를 싫어한다고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 마법사들과 공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아시겠지만 백 년 전에는 성기사들과 마법사들이 함께 싸웠지요. 그 덕분에 악마들을 물리칠 수 있었고요.”
백 년 전을 기억하는 세 명의 영웅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사들은 한 번에 악마 한 마리씩을 상대하지만 마법사들은 적절한 도움만 받으면 한 번에 몇 마리씩 쓸어버릴 수 있었다. 효율의 관점에서 마법사의 존재는 몹시 유용했다.
“그럼 이번 토벌대에 마법사는 저 혼자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저희 여명교단과 협력하고 있는 마법사 단체가 있습니다. 은빛새벽회란 곳입니다.”
엔디미온은 별 생각없이 말했다.
“아는 곳이군.”
“유명한 곳이니까요. 백 년 전에도 활약했다고 들었습니다.”
백 년 전에 존재했던 단체가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제법 반가운 소식이었다. 은빛새벽회는 백 년 전에도 가장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마법사 단체였다. 악마와의 싸움에서 여명교단과 함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다.
“칼립손 경, 토벌대가 출발하는 건 언제쯤이겠소?”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일주일 뒤에 출발하겠군요.”
“토벌대의 규모는?”
“아마도 삼백 명은 되겠지요. 성기사들, 마법사들, 보급부대까지 합치면요.”
“적당하군.”
뷔브르는 엔디미온이 상대한다고 해도 서른셋 악마와 악마숭배자들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악귀들까지 해치우려고 하면 삼백 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고 칼립손이 웃었다.
“그럼 다들 일주일 뒤에 뵙지요. 그때까지 다들 무탈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