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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75화 (75/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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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은빛새벽회는 엔디미온이 기억하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백 년 전의 은빛새벽회는 좀 더 학자의 느낌이 나는 집단이었고 악마들과 싸울 때도 성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후방에서 마법을 날렸다. 그런데 지금 모습은 혼자서 마법사와 성기사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백 년이면 많은 것들이 변할 시간이지만 은빛새벽회의 변화는 갑작스럽다 못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엔디미온은 근처에 있던 베로니카를 불렀다.

“야, 저것들 꼴이 왜 저래?”

“누구요? 은빛새벽회요?”

“그래. 마법사라며? 세상에 어떤 마법사가 갑옷을 입고 돌아다녀?”

“저게 왜요? 저 사람들은 옛날부터 그랬는데요?”

“옛날이 얼마나 옛날인데?”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요.”

베로니카의 나이는 스무살 남짓이다. 은빛새벽회의 모습이 하루아침에 변했을 리는 없으니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지간히 역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은빛새벽회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변했는지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엔디미온은 설명을 해줄 다른 사람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비다르와 눈이 마주쳤지만 얼굴을 보니 그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엔디미온과 마찬가지로 은빛새벽회의 변해버린 모습을 이번에 처음 본 듯했다.

“야.”

“왜?”

“너는 왜 몰라? 왜 처음 본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냐고.”

“아니,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관심을 가져야 해? 은빛새벽회란 이름도 방금 기억났다. 나 살기도 바쁜데 굳이 알아야 하냐고.”

비다르가 모르면 라이오넬도 모를 것이다. 엔디미온은 조용히 눈을 반짝이고 있는 멜리사를 발견했다. 그녀는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약간 발돋움을 한 채로 엔디미온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말을 걸어주길 바라는 아이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할 말 있나?”

“아, 성배······가 아니라 엔디미온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매일 밤 엔디미온님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전능자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신 모양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보람이 있군요!”

“멜리사, 할 말 있으면 하고 아니면 조용히 해.”

“아······. 그게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은빛새벽회에 대해서 설명해드려도 될까요?”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사가 은빛새벽회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 의외로군.”

“저희 가문은 본래 은빛새벽회와 교류가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 대에서 끊기기는 했지만요. 엔디미온님도 알겠지만 백 년 전에 은빛새벽회를 이끌던 것은 아캄이라는 마법사였습니다. 그는 대악마가 죽고 나서 마법 연구에 몰두했는데 말년에, 네, 크흠, 정신이 좀 나가버렸습니다. 마법사들이 대개 그래요. 신비에 대해서 연구하다가 감당할 수 없는 지식에 돌아버리지요.”

“아캄, 그 친구가? 안타까운 일이군. 총명한 친구였는데.”

“어쨌든 말년의 아캄은 강철에 대한 집착을 보였습니다. 자신의 몸이 나이를 먹고 점차 약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강철 인형 안으로 옮기는 마법을 연구했습니다. 물론 연구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성공했다면 아캄이 아직 은빛새벽회를 이끌고 있었겠지요.”

아캄은 강력한 힘을 가진 마법사였지만 그조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이겨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한때 함께 싸웠던 전우의 추한 말년에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가 기억하는 사람들 중에서 행복한 죽음을 맞은 사람은 몇 없었다. 마땅히 그래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은빛새벽회는 아캄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캄이 죽은 이후로부터 그들은 강철과 마법을 숭배하며 강철 인형에 대한 연구를 이어갔지요.”

엔디미온은 새까만 갑옷을 입고 죽음의 사자처럼 서 있는 은빛새벽회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은빛새벽회라 불리던 것은 은빛으로 빛나는 별과 달을 문장으로 삼고 마법의 진리를 연구했기 때문인데 지금 모습을 보니 이름을 바꾸어야 할 것 같았다.

“혹시 성공했나?”

“아닙니다. 대신에 그들은 두꺼운 갑옷을 입는 것을 택했습니다. 저것은 마법이 걸린 갑옷으로써 착용자의 근력을 늘려주고 육체를 보호합니다. 덕분에 성기사들의 도움 없이도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며 악마들을 퇴치할 수 있지요. 지금도 꾸준히 강철 육체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정말 성공할 지도 모르지요.”

엔디미온은 백 년의 시간이 정말 길었다고 생각했다. 그 은빛새벽회가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변하다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 고맙다, 멜리사. 도움이 됐다.”

“정말입니까! 영광입니다!”

멜리사는 완전히 성배기사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엔디미온은 그녀의 모습이 영 부담스러웠다. 그가 자신이 성배기사임을 밝히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이 귀찮아서기도 했다. 성기사들 중에서 성배기사를 존경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을까. 그들은 모두 성배기사의 적생자이며 그 의지를 잇는 자들인데.

“잠시 뒤에 다시 출발한다! 모두 자리를 정리해라!”

먼저 말에 올라탄 그림발드가 소리쳤다. 성기사들은 빠르게 자리를 정리했다. 그들은 숙련된 병사들이었고 이런 일에 익숙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성기사들은 모두 출발 준비를 마쳤다. 에스메렐다가 말의 배를 차며 손을 까닥이자 그림발드와 에우레킬슨이 출발한다고 크게 외쳤다. 처음의 외침은 성기사들에 의해 뒤로 전달됐다.

은빛새벽회는 성기사들의 뒤쪽에서 따라왔다. 그들은 말도 없이 두 발로 걷고 있었는데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전혀 지쳐보이지 않았다. 또한 말을 타고 있는 성기사들을 뒤쳐지지 않고 따라왔다. 성기사들이 보급부대와 발을 맞추기 위해 천천히 말을 몰고 있음을 감안해도 경이로운 체력이었다.

오십 명의 마법사들은 철컥철컥 소리와 가끔씩 내는 잡음이 낀 숨소리만을 냈다. 사람이 아닌 것처럼 과묵했다. 대부분의 성기사들은 이들을 꺼려했다. 마법사라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가 꺼려졌다. 본능적인 일이었다.

“나약한 육신은 강철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는 몹시 유용했다. 악귀들이 나타나면 성기사들이 나서기도 전에 마법으로 먼저 처리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강철 지팡이는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그저 적을 향해 겨누는 것만으로 마법을 발사했다. 주문 없이 바로 마법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베로니카는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가 상당한 실력을 가졌거나 아니면 대단한 도구의 도움을 받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마법사의 고질적인 약점들은 지켜줄 사람이 있어야 하고 마법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은빛새벽회는 그러한 약점들을 강철의 힘으로 극복했다. 갑옷은 그들의 나약한 육신을 보호했고 지팡이는 마력을 주입하는 것만으로 미리 준비된 마법을 빠르게 발사했다. 그들 하나하나가 특등기사와 대등한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 저 새끼들 좀 마음에 안 들어.”

비다르는 말 위에서 툴툴거렸다. 그의 뒤에는 은빛새벽회가 걷고 있었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서 말했다.

“겁쟁이도 아니고 갑옷 입었으면 몸으로 부딪쳐야지 멀리서 마법이나 쓰는게 뭐냐? 그럼 갑옷 왜 입은 거야? 난 저런 놈들이 강철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거 인정 못해. 강철 주먹의 비다르로서 인정 못한다고.”

“네가 인정하고 말고 저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쓸 걸. 밤에 잘 때 조심해라. 네 주먹이 탐난다고 잘라갈지도 모르니까.”

“자기 대가리가 단단한지 내 주먹이 단단한지 궁금하면 한 번 해보라고 해.”

엔디미온이 픽 웃었다. 옛날부터 비다르는 호쾌한 성격이었다. 그게 좀 과할 때도 있었는데 싸울 때는 그게 장점이었다.

“정지! 여기서 휴식하고 간다!”

토벌대는 은빛새벽회가 합류하고 나서 이동에 박차를 가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도 더 부지런히 움직여서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을 줄이려고 했다. 완연한 가을 날씨 덕분에 행군하기 딱 알맞았다. 서늘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고 식은 몸은 다시 따스한 햇볕이 데워주었다.

뒤르겔에서 출발한 지 아흐레째 되는 날이었다. 토벌대는 드디어 뷔브르의 영역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 분위기는 스산했다. 여섯 날개의 악마는 커다란 산 하나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정상에 있는 동굴 안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토벌대는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이 산 전체가 뷔브르의 영역인 탓에 나무들을 모두 앙상하게 말랐고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씩 머리 위로 까마귀가 날아가며 우짖기도 했다. 모두가 혹시 모를 적의 습격에 대비하면서 이동했다.

산의 중턱쯤 왔을 때 토벌대가 잠깐 휴식을 취했다. 휴식 덕분에 체력을 회복한 토벌대는 다시 빠르게 산 정상을 향해 움직였다. 저녁이 되기 직전에 정상에 도착한 그들은 뱀의 아가리처럼 쩍 벌린 커다란 동굴의 입구를 발견했다.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토벌대는 수많은 악마들과 싸운 경험 많은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다르디낭의 적자라 불리는 뷔브르의 이름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진지를 구축해라!”

에스메렐다가 명령을 내리자 두 백인대장에 의해 각 부대에 빠르게 전달됐다. 보급부대는 능숙하게 천막을 세웠다. 산이라 그런지 빠르게 어둠이 찾아왔다. 곳곳에 세운 횃불이 주변을 밝혔다.

“어쩌겠나? 오늘은 휴식하고 내일 아침 일찍 들어가겠나?”

그림발드는 로게나 대교구장이었고 경험 많고 명망 있는 성기사였으니 에스메렐다에게 하대를 받아야 할 입장이 아니었다. 에스메렐다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오늘 들어갑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똑같으니까요. 오히려 내일까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이곳은 적진입니다.”

그림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에우레킬슨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메렐다의 결정이 떨어지자 성기사들은 곧장 돌입 준비를 했다. 그들은 보급부대와 말, 그리고 일부 성기사들을 남겨두고서 어두컴컴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어둡군.”

성기사들은 두 눈에 신성력을 집중했다. 들고 있던 횃불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둠은 특별한 힘이 담기지 않은 빛들을 모두 집어삼켰다. 횃불 따위로는 어둠을 몰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가장 뒤쪽에서 따라오던 은빛새벽회는 쿵 소리를 내면서 지팡이로 바닥을 때렸다. 그러자 지팡이 끝에서 하얀 빛이 생겨났다. 그것은 동굴 안의 기이한 어둠도 어찌할 수 없는 마법의 빛이었다.

천장에서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가끔씩 물방울이 목덜미 위로 떨어지면 누군가 작게 신음했다. 이곳에서는 물방울조차 기분 나빴다. 토벌대는 조용하게, 그러나 재빠르게 이동했다. 아직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정신을 지치게 만들었다. 언제나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한참 가도 적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토벌대는 긴장감과 싸우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란 통로는 점차 넓어지더니 갈림길이 나타났다. 오른쪽 길과 왼쪽 길 둘 다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풍겼다.

동굴에 들어온 뒤부터 엔디미온에게 바싹 붙어다니던 베로니카는 몸을 떨었다. 엔디미온은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

“준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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