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무료 마지막)
고요하기만 하던 갈림길 안에서 쿵쿵 소리가 났다. 한 방향에서만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오른쪽 길과 왼쪽 길에서 동시에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성기사들은 얼른 진열을 갖추었고 마법사들은 마법을 준비했다. 쿵쿵 소리가 점차 커지더니 갑자기 다시 조용해졌다.
신성력을 담은 두 눈으로도 어둠의 끝까지는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주변으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진 곳까지였고 그랬기 때문에 갈림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무언가 나쁜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은 했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꽉 잡았고 다시금 들린 쿵 소리에 잔뜩 긴장했다.
무언가 바닥을 세게 박찬 듯한 쿵 소리가 난 후에 들린 것은 묵직한 바람소리였다. 에스메렐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토벌대를 뒤로 물리려고 할 때였다. 쾅 소리가 나면서 바닥이 박살나고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악마였다. 거대한 덩치의 악마는 갈림길의 어둠 안에서 여기까지 한 번에 도약한 것이었다. 악마는 두 개의 갈림길에서 전부 튀어나왔고 그 뒤로 수많은 악귀들이 둑이 무너진 강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전투 준비! 대열을 흐트러트리지 마라! 우리는 승리한다!”
그림발드는 거대한 몸집을 이용해 토벌대에 부딪치려고 하는 악마를 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충격에 대비하라! 마법사들 보호 마법! 성기사들은 신성력으로 보호막을 강화한다!”
특등기사들은 수많은 싸움을 경험한 자들이었고 은빛새벽회와 합동 임무를 많이 수행했어다. 그들은 한 몸인것처럼 동시에 움직였다. 마법사들이 보호막을 만들면 전열의 성기사들이 신성력으로 강화했다. 달려오던 악마는 그것에 부딪혀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나서 두 주먹으로 보호막을 두들겼다.
“보호막이 곧 깨진다! 공격 준비!”
에우레킬슨과 그림발드는 성기사들을 독려하며 전투를 지휘했다. 또 한 마리의 악마가 보호막에 몸을 부딪치자 쨍그랑 소리가 나면서 수많은 조각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 틈을 노려서 악귀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성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적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전능자의 이름으로!”
“사악한 것들을 죽여라!”
성기사들의 무용은 대단했다. 그들이 창칼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악귀들이 서너 마리씩 죽어나갔고 그 기세에 놀란 악마들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날 정도였다. 마법사들의 활약 역시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강철 지팡이에서 쉴 새 없이 마법이 발사됐고 그럴 때마다 악귀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지팡이 끝에서 빛이 번쩍일 때마다 광택이 나는 검은색 갑옷에 음영이 생겼고 대조적으로 투구 안쪽에서 새빨간 안광이 번뜩였다. 그들의 모습은 무참한 살육자였으나 악귀들을 죽이는 태도는 몹시도 사무적이었다.
“키에에에엑!”
악귀들은 끝없이 쏟아졌다. 두 마리의 악마는 벌써 처치했는데 악귀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마치 개미집을 건드린 것처럼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 악귀들은 성기사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악귀들 때문에 그들은 조금도 전진하지 못했다.
“육식은 나약하며 강철은 완벽하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직 강철만이 남는다.”
사르하는 여유롭게 길 위를 걸으며 손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마법사들이 모여서 각자의 강철 지팡이를 내밀었다. 강철 지팡이는 서로 가까이 다가가자 자석처럼 착 달라붙었다. 오십 개의 강철 지팡이가 하나로 합쳐지자 마치 기둥처럼 두꺼워졌다.
그것은 감히 한 사람이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웠기에 열 명의 마법사들이 양쪽에서 들어올렸다. 그리고 지팡이 뒤쪽에 사하르가 홀로 섰다.
그는 지팡이 끝부분에 손을 갖다댔다. 그러자 세 명의 마법사들이 사하르의 등에 손을 갖다댔고 그 뒤로 마법사 한 명에게 다른 마법사 세 명씩 붙었다. 그런 식으로 마법사들이 줄지어 섰고 앞쪽으로 마력을 전달했다. 마법사들의 마력을 받은 사르하의 갑옷이 노란색으로 빛났다.
마법사 오십 명의 마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자 거대한 강철 지팡이가 웅웅 소리를 내면서 끝부분에 빛을 끌어모았다. 누가 보아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씨발, 마법 날아온다!”
그들과 몇 번 임무를 수행했던 성기사들은 얼른 좌우로 갈라졌고 그와 동시에 강철 지팡이는 엄청난 양의 빛을 토해냈다. 새하얀 빛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가서 모든 것들을 태웠다. 악귀는 물론이고 이미 죽은 시체들까지 한꺼번에 없애버렸다.
말 그대로 일소였다. 남은 것은 오직 재뿐이었고 그것은 마치 눈처럼 살랑살랑 날렸다. 다행히도 마법에 휘말린 성기사는 없었지만 까닥 잘못했으면 재로 변했을 거라는 생각에 모두가 몸을 떨었다.
“이게 무슨, 씹······.”
엔디미온은 그 무식한 마법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백 년 전에도 저런 마법이 있기는 했지만 저딴 식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저게 마법사야, 방화광이야. 그는 껄껄 웃고 있는 사르하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하하! 육식은 나약하다! 오직 강철만이 남는다!”
“야, 이 새끼야! 나도 맞을 뻔 했잫아! 야! 야!”
엔디미온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무식한 마법에 휘말릴 뻔 했던 비다르가 주먹을 쥐고 달려가려는 것을 억지로 말렸다. 방법은 무식했어도 은빛새벽회의 마법은 효과가 있었다. 악귀들의 숫자가 크게 줄었으니까. 엔디미온은 창을 들고서 멜리사를 향해 말했다.
“멜리사, 베로니카 지키고 있어. 서로 떨어지지 마라.”
“알겠습니다!”
엔디미온은 비다르, 라이오넬과 함께 악귀들을 향해 달려갔다. 갈림길은 여전히 악귀들을 토해내고 있었고 세 영웅은 악귀들의 시체를 늘려갔다. 토벌대는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은빛새벽회의 마법사들은 다시 각자 마법을 사용하며 성기사들을 보조했다. 여기저기서 쾅쾅 소리가 나고 불꽃이 튀며 악귀들의 사지가 날아다녔다. 토벌대가 갈림길에 거의 근접했을 때였다.
갑자기 왼쪽 갈림길 안이 환해지더니 거기서 엄청난 기세의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이글거리는 불꽃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뜨거웠고 신성력으로 몸을 보호한 성기사들조차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부상자들은 뒤쪽으로! 진열이 무너지지 않게 빨리 움직여! 악귀들에게 휩쓸리면 끝장이다!”
에우레킬슨이 악을 쓰며 악귀 세 마리의 머리를 동시에 베었다. 그가 소리치자 부상자들이 뒤쪽으로 빠지고 빈 자리를 다른 성기사들이 빠르게 채웠다. 뒤쪽으로 빠진 부상자들은 신성력으로 스스로를 치유했다.
“놀잇감들이 참 많구나! 어떤 방식으로 죽여줄까, 이 하찮은 것들아!”
왼쪽 갈림길에서 튀어나온 것은 악마였다. 그는 악어처럼 길쭉한 주둥이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쩍 벌리자 입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용의 불꽃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일시적으로 성기사들을 후퇴시킬 만한 위력은 있었다.
“나는 주인님을 모시는 서른셋의 종들 중 하나이며 불꽃을 뿌리는 자다! 나를 상대할 자가 누구냐!”
이번 악마는 처음에 상대한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 성기사들이 다수 달라붙어야 겨우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악마가 사방에 불을 뿌리고 커다란 손과 발로 성기사들을 공격하니 겨우 전진했던 토벌대는 다시 뒤로 물러났다.
“강철은 부러지지 않는다!”
마법사들이 악마에게 마법을 날리자 그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쾅쾅 소리가 연달아 나며 악마의 몸에서 연기가 났다.
“성가신 놈들!”
악마가 다시 불꽃을 뿜었다. 마법사들이 급하게 만든 보호막이 녹아내렸다.
“오른쪽에서도 악마 출현!”
“이번에는 두 마리다!”
“칼립손 경! 부하들 이끌고 왼쪽으로 갑시다! 에우레킬슨 경! 그림발드 경! 오른쪽으로 가세요!”
지휘관들은 바쁘게 돌아다니며 성기사들을 지휘했다. 에우레킬슨과 그림발드가 부하들을 이끌고 오른쪽으로 가자 에스메렐다는 칼립손과 함께 왼쪽으로 갔다. 그녀는 일단 왼쪽의 악마부터 상대한 후에 오른쪽에 가세할 생각이었다.
“으하하하! 재밌구나! 너희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재밌는 놀이에 불과하지! 날 더 즐겁게 해봐라!”
불 뿜는 악마는 거칠게 저항하며 왼쪽 길을 가로막고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처치하려면 일단 악귀들부터 몰아내야 하는데 그게 여간 어려웠다. 엔디미온은 비다르와 라이오넬에게 오른쪽 길로 가라고 말한 뒤에 자신은 왼쪽 길로 움직였다.
그는 빠르게 달리다가 들고 있던 창을 힘껏 내던졌다. 빛을 뿌리며 날아간 창은 수십 마리의 악귀들을 관통하고도 위력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그대로 악마의 배에 꽂혔고 커다란 비명 소리가 났다.
“크아아악!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 감히!”
엔디미온은 두 자루의 검을 빼들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악마에게 달려간 그는 쓰러져 있는 악귀의 시체를 발판 삼아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왼손의 검을 악마의 허벅지에 꽂았다. 그것을 발판 삼아서 이번에는 악마의 머리 위까지 뛰어올랐다.
악마는 눈을 크게 뜨고서 입을 쩍 벌렸다. 아가리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지만 엔디미온의 단단한 육체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한 바퀴 회전하며 그대로 악귀의 어깨에 오른쪽 검을 꽂았다. 초록색 피가 확 튀었고 입 안에 들어간 피를 침과 함께 뱉어냈다.
호쾌한 발차기는 그대로 악마의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거대한 덩치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자 엔디미온은 발로 가슴을 꾹 눌렀다. 그리고 단단한 주먹으로 악마의 머리를 힘껏 때렸다. 바닥이 박살나며 머리가 그 안에 처박혔다. 악귀 따위였다면 방금의 공격으로 머리가 터졌겠지만 그래도 악마라 그런지 제법 단단했다.
얼굴뼈가 박살나고 이빨이 부러져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악마가 말했다.
“너······. 이 건방진······.”
“너, 노는 거 좋아하는 것 같던데 우리 간단한 놀이 하나 할까.”
엔디미온이 주먹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주먹 잡기 놀이야. 규칙은 간단해. 잡으면 살고 못잡으면 죽는다. 그럼 나부터 한다.”
주먹이 곧장 악마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왔다. 악마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었고 주먹을 잡으려고 했다. 두 손은 날아오는 주먹을 갈고리처럼 잡아챘고 악마는 킬킬 웃었다. 하지만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주먹은 손바닥을 관통해서 그대로 악마의 얼굴에 직격했다. 그 충격으로 악마의 머리가 뭉개졌다. 엔디미온은 손을 탈탈 털면서 말했다.
“아까웠어. 다음에는 꼭 잡으라고.”
엔디미온이 순식간에 악마를 처치하는 것을 보고서 성기사들의 사기가 올랐다. 대련을 할 때는 좀 아니꼬왔지만 이럴 때는 같은 편이란 사실이 너무나 든든했다. 에스메렐다는 이제 부대를 이끌고 오른쪽에 가세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바닥이 흔들거리더니 천장에서 불길한 소음이 났다.
그 원인은 오른쪽에서 날뛰던 악마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손에 잡히는 모든 것들을 때려부수고 있었다. 그 탓에 벽과 천장이 약해졌고 쿠르릉 소리를 내면서 위쪽에서 돌조각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천장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에스메렐다가 부하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다들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달리세요! 어서 빨리!”
부대가 둘로 갈라지면 위험했다. 더욱이 지금은 오른쪽에 있는 성기사들이 더 많았기에 이 상태로 반으로 갈라지면 숫자가 적은 에스메렐다 쪽이 위험에 빠질 확률이 컸다. 점차 천장이 무너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어어, 잠깐! 엔디미온! 야, 엔디미온!”
악마 하나를 주먹으로 두들겨 패고 있던 비다르가 크게 소리쳤다. 다른 성기사들은 천장이 무너지기 전에 오른쪽으로 이동했으나 아직 엔디미온만은 왼쪽에 남아있었다. 그는 다급하게 달렸지만 천장에서 떨어진 커다란 돌이 쿵 소리를 내며 길을 가로막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우르르 돌들이 떨어져서 좌우를 갈라버렸다. 돌들을 치우려고 해도 숫자가 너무 많았다. 토벌대는 통로 안에 있는 악마와 악귀들을 모두 해치웠으나 성기사들 일부를 잃었다. 또한 왼쪽 길에 엔디미온만 혼자 남겨두게 되었다.
그림발드는 그를 구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에우레킬슨이 반대했다. 고작 한 명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했다. 에스메렐다는 고심하다가 결국 뷔브르부터 먼저 처치한 후에 엔디미온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강인한 사람이니 분명 끝까지 살아남을 겁니다. 일단 우리끼리 먼저 가지요.”
비다르는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라이오넬에게 말했다.
“야, 이거 엔디미온도 없는데 괜찮은 거 맞냐?”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그래, 너한테 물은 내가 등신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