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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78화 (7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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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토벌대는 거침없이 전진했다. 첫 번째 전투에서 사상자가 몇 나오기는 했지만 전투의 치열함을 감안하면 그리 큰 손실은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동굴은 점점 커졌고 어둠도 더욱 짙어졌다. 그들은 신성력을 통해 어둠을 투시할 수 있었으나 완벽하지는 않았다. 볼 수 있는 것은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까지고 그 외는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서로의 시선에 의지해서 움직였다. 내가 볼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 봐주는 식인 것이다. 얼마나 갔을까. 어두컴컴한 통로의 끝에 광장이 나타났다. 그곳에도 어둠이 짙게 자리하고 있어서 내부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알아맞추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짙은 어둠 위에 상상으로 그려진 그림이 나타났다. 아마 저곳에는 수많은 악귀들이 있을 것이고 그 뒤에는 뷔브르를 숭배하는 악마와 악마숭배자들이 있을 것이다. 토벌대의 목적인 뷔브르의 토벌을 위해서는 이들을 반드시 물리쳐야 했다. 성기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단단히 쥐고서 전능자의 말씀을 외웠다. 그것은 그들의 의식을 고양시켰고 두려움을 날려보냈으며 끝없는 용기를 북돋았다. 그것은 그저 정신적인 자기암시였을 뿐이고 육체를 강화시키는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 창칼을 잡고 악마를 죽이기 위해 기꺼이 모인 자들은 오직 전능자의 뜻을 위해 분연히 일어난 것이었다. 백 년 전의 성기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능자의 말씀을 되새기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들은 전능자의 의지를 대신하는 창날이었으며 성배기사의 의지를 잇는 적생자였다.

“천천히 전진합니다. 공격 명령이 있을 때까지 함부로 나서지 마세요.” 적들이 얼마나 있을지 몰랐다. 경거망동하는 것은 위험했다. 토벌대는 천천히 전진했고 광장으로 진입했다. 눈보다 몸이 먼저 적들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만큼 사악한 기운이 지독했다. 일부 성기사들은 구역질날 정도로 농밀한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베로니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위험할 때면 언제나 엔디미온이 지켜줬지만 지금은 그가 없었다. 비다르가 자신을 지켜줄까? 라이오넬은? 두 사람은 영 믿기 힘들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멜리사의 등 뒤에 숨었다. 그러나 멜리사의 키가 작아서 숨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걱정마세요.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저도 열심히 싸울게요.” 율리아는 검을 꽉 쥐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사악한 것들이 내뿜는 기운 때문에 몸이 찌릿거렸다. 그녀는 경험 많은 성기사였으나 토벌대에 참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만큼 많은 적들을 상대하는 것은 당연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그게 그들의 의무니까.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불쌍한 것들아. 나는 여섯 날개의 악마이자 다리 달린 뱀을 모시는 청지기요, 그 뜻을 전하는 기수로다. 너희는 겁도 없이 어둠군주의 영역을 침범했으나 그 잘못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죽음 그 자체로 배상해야 할 것이다.” 쾅 소리가 나면서 거대한 크기의 악마가 나타났다. 하반신은 다리 여섯 달린 말이었고 상반신은 네 개의 손을 가진 뱀이었다. 황금색 두 눈은 요사스럽게 빛났고 그것을 본 자는 가벼운 두통을 느꼈다. 혼자서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악마였다. 베로니카와 멜리사는 저 악마가 라가르디오만큼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강한 악마도 결국 뷔브르의 부하일 뿐이니 여섯 날개의 악마이자 다리 달린 뱀이며 어둠군주라 불리는 악마는 얼마나 강할 것인가.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는 주인님을 모시는 서른셋 종복들 중 첫 번째이며 목숨을 거두는 자다. 이곳에는 수백 마리의 악귀들이 있으며 충직하고 날카로운 칼날들이 모두 모였다. 나는 이들을 이끄는 자로 그 이름은 타르그투스이니 너희는 생명의 수확자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이다.” 타르그투스는 목소리는 낮고 음울했다. 심약한 자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몸을 약간 떨었을 뿐 결코 겁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차분히 적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뷔브르가 거느린 서른셋 악마 중 서른 마리가 이 자리에 있었고 뷔브르의 칼날이라 불리는 악마숭배자들이 다섯 명 있었다. 그들은 악마숭배자였지만 악마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악귀들 수백 마리가 있었다. 이쪽은 이백 명을 조금 넘었으니 숫자상으로 토벌대가 불리했다. 하지만 그들은 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기를 꼭 쥐고서 공격 명령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너희가 만약 자비를 바란다면 주인님의 하수인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진실로 복종하려는 의지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서로의 목을 베어라. 목을 가져온 자는 살려줄 것이고 목이 잘린 자는······.” 타르그투스의 말이 끊어졌다. 그는 갑자기 날아온 화염구에 맞고서 비틀거리며 뒤로 약간 물러났다. 그 뒤로 수십 발의 마법 화살들이 날아갔다. 악귀들의 몸이 터지면서 뼈와 살점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에 에스메렐다가 뒤를 돌아보며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르하님!”

“난 이해가 안 가.” 사르하는 연기가 나는 지팡이에 다시 마력을 주입하며 말했다.

“저딴 개소리를 왜 들어주고 있지? 그럴 시간에 한 마리라도 더 많이 죽이는 게 낫지 않겠나?”

“아니, 지금 그게······.”

“죽여라! 저 빌어먹을 놈들을 죽여!” 마법에 맞은 타르그투스는 크게 소리치며 자신의 무기를 휘둘렀다. 손에 들고 있는 글레이브에 사악한 기운이 모여들더니 휘두르는 경로를 따라서 검은색 칼날이 날아갔다. 은빛새벽회의 마법사들이 보호막을 만들어서 공격을 막아냈다. 전투는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성기사들이 돌격했고 곧 악귀들과 충돌했다. 물론 악귀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성기사들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신성력으로 이글거리는 칼날은 살갗을 태우며 악귀들을 벌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악마들과 악마숭배자들이었다. 성기사들이 악귀들을 상대하는 동안 마법사들이 뒤쪽에 있는 악마들을 공격했다. 악마들의 저항 역시 거셌다. 그들은 온갖 능력을 사용하며 성기사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뒤쪽에 있는 마법사들에게 가려고 했다.

“막아라! 물러서지 마! 우리가 무너지면 다 죽는다!” 성기사들이 분투하는 사이에 베로니카는 불안하게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악귀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마법을 쓰기에는 너무 늦은 순간이었다. 달려오던 악귀는 갑자기 머리가 터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있습니다.” 따스한 목소리였다. 베로니카는 멜리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을 외우며 마법을 준비했고 멜리사는 그런 그녀를 지켰다.

“자, 그럼 내가 좀 나서볼까.” 비다르는 주먹을 서로 부딪치며 씩 웃었다. 그가 날뛰기 딱 알맞은 곳이었다.

“야! 준비됐냐, 라이오넬?”

“오우,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두 사람은 커다란 함성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악귀들은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고 정신없이 악귀들을 죽이다보니 어느새 토벌대와 떨어지게 됐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겁내지 않았다. 비록 성배기사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들은 충분히 강했다. 강철 주먹의 비다르와 천둥검의 라이오넬을 과연 누가 막을 것인가?

“너! 강하구나. 나는 여섯 날개 악마의 다섯 번째 칼날인······.” 비다르는 악마숭배자의 자기소개를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는 강철 주먹을 날렸고 악마숭배자는 뒤로 날아갔다. 물론 다시 일어나서 얼른 비다르에게 덤벼들었다. 난쟁이 출신인 악마숭배자는 악마의 힘 때문에 보통의 난쟁이보다 키가 컸고 근육이 상당했다. 묵직해 보이는 주먹을 보면서 비다르는 씩 웃었다. 싸울 만한 상대였다. 주먹을 꽉 쥐고서 악마숭배자의 얼굴을 향해 가볍게 날렸다. 악마숭배자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으나 그게 실수였다. 애초에 비다르가 날린 주먹은 시야를 가리는 용도에 불과했다. 진짜 공격은 바로 아래에서 턱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빠악! 엄청난 타격음이 나고 악마숭배자의 몸이 약간 공중으로 떠올랐다. 비다르는 악마숭배자의 멱살을 붙잡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그가 다시 일어나기 전에 주먹을 날려 머리를 바닥 안에 꽂아버리고 무자비한 주먹질로 결국에는 머리를 터트렸다.

“흐, 별 거 없잖아.” 비다르가 다시 다른 적을 향해 달려가는 사이에 라이오넬 역시 악마와 싸우고 있었다. 그는 천둥소리를 터트리며 악마 두 마리를 죽였다. 악마 따위는 영웅의 상대가 아니었다. 라이오넬은 검을 들고서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는 청각이 시각의 역할을 일부 대신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너무 시끄러워서 주변의 모습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반응이 늦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격을 미처 반응하지 못해서 결국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뼈마디가 시큰거렸다.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 후에 비틀거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스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실력이 제법이구나. 하지만 너희 둘이 분전한다고 해서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까? 우리는 다수이며 너희보다 강력하다. 한 번 보아라, 너희들의 꼴이 어떠한지. 넌 안 보이겠지만 말이야. 으하하하······.” 라이오넬은 목소리로 자신의 공격한 것이 타르그투스란 것을 알았다. 장님인 그는 볼 수 없었지만 악마의 말대로 토벌대의 상황은 나빴다. 이미 한 번의 전투로 지친 상태였고 악귀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으며 악마들이 생각 이상으로 강했다. 비다르와 라이오넬이 아무리 날뛰어도 악마들이 성기사들을 박살내는 것이 더 빨랐다. 전열이 무너지면 중열이 무너질 것이고 그 다음은 마법사들이었다. 마법사들까지 당하면 정말 끝장이었다. 숫자의 불리함을 이겨낼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으니까.

“너희는 결국 주인님의 발 아래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울면서 빌어도 늦었다. 자비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다.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 타르그투스가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검은색 칼날이 날아왔고 라이오넬이 검을 들어서 막았으나 충격을 완전히 받아내지 못해 뒤로 몸이 날아갔다. 그는 바닥을 한 번 굴렀고 벌떡 다시 일어났다. 그 사이에 가까이 접근한 타르그투스가 다시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칼날이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검은색 기운을 두른 글레이브가 직접 라이오넬의 검을

후려쳤다. 악마는 힘이 무시무시했다. 인간이 받아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단지 무기를 휘두르기만 하는 것뿐인데 공격을 받아낼 때마다 바위가 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라이오넬은 신음하며 공격을 방어했다. 타르그투스의 공격은 쉬지 않고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라이오넬은 쓰러지고 바닥을 굴렀다.

“넌 날 이길 수 없다. 자비를 바란다면 더는 일어나지 마라. 그리한다면 내가 자비롭게 단칼에 너의 목숨을 수확하겠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나 몇 번이나 쓰러지고 바닥을 굴러도 라이오넬은 다시 일어났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두 손으로 검을 꼭 잡았다. 다시 글레이브를 휘두르려던 타르그투스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기세가 달라졌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타르그투스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미 보이지 않는 검이 그의 오른쪽 팔 하나를 날려버린 후였다.

“기세는 천둥과 같고 검술은 벼락과 같으니 이름 부르길 천둥검.” 빙글빙글 돌아가던 팔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빠르기는 천둥과 같고 묵직함은 벼락과 같으니 이름 부르길 천둥검.” 라이오넬은 농후한 살기를 뿜어내며 외쳤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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