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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가 달라졌으니 움직임도 달라졌다. 움직임은 장님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날렵했고 공격은 위협적이었다. 타르그투스는 글레이브를 휘두르며 맞섰고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불티가 튀었다. 체급 차이 때문에 글레이브와 검이 정면으로 부딪치면 라이오넬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래서 그는 되도록이면 공격을 흘리는 방향으로 검을 움직였다. 매끄러운 동작으로 움직이는 검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았다. 아무리 물을 베려고 해도 결코 벨 수 없는 것처럼 타르그투스의 공격은 라이오넬의 검을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반대로 공격할 때는 벼락과 같았다. 빠르게 몰아치는 공격은 타르그투스의 몸을 자비없이 베었고 그럴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며 악마가 비명을 질렀다.
“성가신 놈!” 타르그투스는 성이 나서 발을 세게 굴렀다. 그러자 바닥이 갈라지며 라이오넬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거대한 글레이브가 라이오넬의 몸을 후려쳤다. 잘렸다기보다는 두들겨 맞았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영웅의 단단한 육체는 날카로운 날붙이도 함부로 벨 수 없었으나 힘껏 휘두른 공격의 충격 자체는 남았다. 라이오넬은 뒤로 날아가서 동굴 벽에 몸을
부딪혔다. 본래라면 충분히 반응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아무리 세월을 이기지 못해 약해졌다고 해도 타르그투스는 다르디낭의 적자도 아닌 그냥 일개 악마일 뿐이었다. 그런 적을 상대로 이만큼 고전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상황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라이오넬은 장님이었다. 그는 상실한 시력을 다른 발달된 감각들로 대체했다. 피부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 두 발로 바닥의 진동을 느꼈다. 하지만 만약 발달된 감각들이 제한된다면? 바람이 불지 않으면 공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다. 수많은 소리가 한데 섞이면 분간해낼 수 없다.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면 진동을 느낄 수 없다. 이곳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고 사악한 것들과 토벌대가 싸우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타르그투스의 소리만을 온전히 들을 수 없었다. 또한 방금 바닥에서 발이 떨어졌으니 진동을 느낄 수도 없었다. 세 가지 감각이 모두 상실된 그 순간에 라이오넬은 완전한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다시 바닥에 발을 딛고 섰지만 한 가지의 감각만을 사용할 수 있는 지금은 반응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라이오넬은 피 섞인 침을 뱉어냈다. 하지만 하나면 충분하다.
“와라!” 타르그투스가 움직였다. 그는 쿵쿵 소리를 내며 질주했다. 마치 기마병이 돌격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의 육중한 덩치와 커다란 글레이브가 합쳐지니 엄청난 박력이 있었다. 성벽조차 일격에 무너트릴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라이오넬은 돌격을 피해서 바닥을 굴렀다. 타르그투스가 달리면서 바닥을 모두 박살내서 사방으로 돌조각이 튀었다. 그는 돌조각들을 공중에서 베어버리고는 다시 공격 자세를 잡았다. 끝까지 달려갔던 타르그투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라이오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여섯 개의 다리는 다그닥 소리를 내면서 거침없이 질주했다. 타르그투스가 발굽으로 바닥을 때릴 때마다 털들이 곤두섰다. 단련된 육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저 돌격에 휘말리면 뼈 하나 부러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란 것을. 타르그투스의 글레이브는 라이오넬의 몸을 자르고 찢고 부술 것이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타르그투스와 도망만 치는 라이오넬의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바닥을 부수며 거침없이 내달리는 타르그투스의 모습은 엄청난 박력이 있었다. 토벌대 중에서도 그 모습에 깜짝 놀라는 자들이 있었다. 싸움을 지휘하던 에스메렐다는 라이오넬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병력을 약간이라도 뺀다면 전열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화가 나지만 지금은 자리를 지켜야 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아!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거냐!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라고? 아무리 장님이라도 귀는 있을 것 아니냐? 천둥소리가 그리 연약하더냐? 그리 겁쟁이더냐? 네가 천둥검이라면 나는 천둥의 군주다! 내 발굽이 땅을 박차는 소리를 들어라! 이것이 천둥이다! 나는 천둥 그 자체다!” 타르그투스는 술래잡기에 진절머리가 났는지 들고 있던 글레이브를 던졌다. 그것은 라이오넬의 퇴로를 가로막았고 빠르게 달려온 타르그투스의 두꺼운 다리가 라이오넬을 쓰레기 차듯 날려버렸다. 공중에 떠오른 라이오넬의 몸은 타르그투스의 손에 붙잡혔고 다시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반사적으로 튀어오른 몸이 발차기를 맞고 뒤로 날아갔다. 동굴의 벽에 부딪히고 쿨럭 소리를 내던 라이오넬이 피를 뱉어냈다. 그의 하얀 수염이 피로 젖었다.
“덤벼라! 날 화나게 해봐라! 아까의 그 기세는 어디로 간 거냐? 이제 보니 천둥검이란 말이 딱 맞구나! 천둥처럼 한 번 성냈다가 덧없이 사라져버리니 말이다!” 타르그투스가 아가리를 쩍 벌렸다. 그 순간 뱀의 아가리에서 사악한 독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독을 담은 물줄기는 화살처럼 날아갔고 바닥에 닿자 돌이 부글부글 끓으며 녹아버렸다. 라이오넬이 조금이라도 늦게 피했다면 녹아내리는 것은 그의 몸이었을 것이다.
“넌 재미가 없구나. 차라리 저기서 날뛰는 덩치 큰 놈을 상대하는 것이 더 낫겠어. 이제 이 지루한 싸움을 끝내자. 걱정하지 마라. 내 독에 당하면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숨이 먼저 끊어질 것이니.” 타르그투스가 다시 한 번 입을 쩍 벌렸다. 토벌대가 저 공격을 정면에서 마주했다면 모두 긴장했을 것이다. 저것은 마법사들의 보호막도 녹였을 것이고 신성력으로 강화된 갑옷조차 녹였을 것이다. 또한 거대한 덩치로 달려오는 공격 역시 위협적이었다. 그 누가 정면에서 타르그투스의 돌격을 저지하겠는가? 돌격을 피하기 위해 꼴사납게 물러난다고 해도
아무도 비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당연함의 기준은 능력에 따라 다른 것이었다. 키가 작은 사람은 높이 달린 열매를 따려고 하지 않는다. 불가능한 것이 당연하니까. 그래서 라이오넬이 다른 것이다. 그의 능력은 성기사들과 달랐고 당연함의 기준 역시 달랐다. 그들이 가진 잣대는 라이오넬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사람의 두려움은 보는 것에서 나온다. 보이기 때문에 두렵고 두렵기 때문에 지는 것이다. 거대한 낫을 들고 목숨을 수확하러 다니는 자를 그 누가 두려워하지 않으랴. 태산과 같은 덩치를 가지고 바위를 던지는 자를 그 누가 겁내지 않으랴. 보는 자는 두렵다. 보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두려움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한다. 어둠 속에서 괴물이 나타났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면 누가 두려워하겠는가? 어둠 속에서 괴물을 때려잡고 아침 햇살 아래
에서 죽은 괴물을 본다면 그것이 과연 두렵겠는가? 라이오넬은 백 년을 수련했다. 그는 천재였고 성인이 됐을 때 이미 검으로 대적할 자가 없었다. 덕분에 성배기사의 선택을 받았고 성배의 힘으로 수많은 악마들을 죽였으며 종국에는 다른 영웅들과 함께 대악마 다르디낭을 물리쳤다. 그는 최강의 검사였다. 그러나 제일은 아니었다. 제일과 최강은 다른 것이다. 최강은 상대적이나 제일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더 높은 경지가 분명히 있는데 어찌 약한 자들 사이에서 제일을 자처하랴? 라이오넬은 검술의 끝을 보려고 했다. 육체는 약해지고 기력은 쇠했으나 그의 검술만은 나날이 상승했다. 노쇠한 육체가 점차 시력을 잃어갈 때는 좌절했다. 보지 않고서 어찌 싸우는가? 검사에게 시력의 상실은 치명적이었다. 꼭 검사가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그럴 것이다. 강철 같았던 의지는 구부러졌고 검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검술은 정체됐고 대신에 술이 늘었다. 매일 밤 술을 마시며 달을 보며 잠들었다. 그런 날이 몇 달 동안 이어졌다. 어느 날에는 바닥을 기어가는 뱀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꾸물거리며 기어가다가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었다. 처음에는 기이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서로의 꼬리를 물고서 빙그르르 도는 뱀들의 모습에서 벼락 같은 깨달음이 있었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꼬리를 무는 것과 같으니 얻는 것이 잃는 것이요, 잃는 것이 얻는 것이었다. 검술을 얻었으니 시력을 잃었고 시력을 잃었으니 검술을 얻었다. 어찌 잃지 않고 얻겠는가? 시력을 잃는 것조차 상승의 경지를 위한 일이었으니 검을 다시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날 그는 천둥을 베었다.
“끝을 낼 때가 되기는 했지.” 볼 수 없는 자는 두렵지 않다. 두렵지 않은 자는 강하다. 따라서 라이오넬은 강하다.그리고 싸움은 강한 자가 이긴다.
“천둥검의 라이오넬은 강하다!” 타르그투스가 입에서 독을 뱉었다. 라이오넬의 검은 그것을 반으로 갈랐다. 그의 검은 달빛으로 벼려낸 것이었으니 독 따위에 무뎌지지 않았다. 타르그투스는 글레이브를 들고 라이오넬을 향해 돌격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강자들의 싸움은 단 한 번만으로도 끝이 날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의 싸움이 그랬다. 타르그투스는 글레이브를 휘둘렀고 라이오넬은 고개를 숙였다. 맞았다. 성기사들이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아니었다.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라이오넬의 머리 위를 스쳐지나갔다.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눈으로 보고 피하라고 해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단련된
감각만으로 해내는 것이 가능할까? 오직 한 사람만이 가능했다. 그건 운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명백한 실력이었다. 타르그투스가 당황했다. 라이오넬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목을 조르는 살기, 살을 찌르는 살기, 터질 듯한 살기. 온다. 타르그투스는 자신의 힘을 끌어모았다. 이번에 결판이 난다. 내가 죽거나 저 자식이 죽거나.
“죽어라!” 타르그투스가 다시 한 번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라이오넬이 믿기 힘든 각력으로 바닥에서 뛰어올랐다. 그의 검은 신성력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귀를 때리는 굉음, 눈을 멀게 하는 번쩍임.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누가 이겼는지 묻지 않았다. 그건 멍청한 짓이니까.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조각난 글레이브가 빛을 반사하며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거대한 몸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쿠웅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진 것은 커다란 뱀의 대가리였다. 승부는 났다. 그 순간 라이오넬이 벤 것은 글레이브도 아니었고 타르그투스도 아니었다.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히 있었다. 그의 검은 천둥을 넘어 번개를 베었다.
“야, 라이오넬!” 기운을 다 쏟아낸 라이오넬은 비틀거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비다르는 신나게 때리고 있던 악마를 쓰레기 버리듯 내던지고 라이오넬을 향해 달려갔다.
“괜찮아? 야, 괜찮냐고!”
“비다르, 눈이 안 보이는데 이거 무슨 병 생긴 거 아닌가······.”
“너 원래 장님이잖아, 인마! 정신 차려!” 라이오넬의 정신이 다시 오락가락하기 시작하자 비다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그의 뒤에서 쿵쿵 소리가 났다.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악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압박감이 몸을 짓눌렀다.
“나의 영토에서 감히 날뛰는 놈들이 너희냐.” 비다르는 기운이 다 빠진 라이오넬을 바닥에 내던지고 한숨을 내쉬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가 나타났는지 알 것 같았다.
“진짜 좆됐네.” 여섯 날개의 악마이자 다리 달린 뱀, 어둠군주라 불리며 서른셋 악마를 이끄는 자, 또한 다르디낭의 적자. 뷔브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