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80화 (80/199)

80

“엔디미온은 없고 라이오넬은 뻗었고.” 비다르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고개를 움직이거나 눈을 돌릴 것도 없었다. 뷔브르의 모습은 바로 보였다. 어디를 보아도 뷔브르의 모습뿐이었다. 여섯 날개의 악마이자 다리 달린 뱀은 타르그투스조차 우습게 보일 정도로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뱀처럼 길쭉한 몸과 두꺼운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등에는 박쥐의 것처럼 생긴 여섯 날개가 달려있었다. 일견 용처럼 생긴 용모였으나 자세히 보면 용과는 달랐다. 얼굴이 특히 그랬다. 뭉툭하게 생긴 얼굴 곳곳이 차츰 갈라지더니 수많은 눈들이 솟아났다. 그것들은 바쁘게 움직이면서 사방을 관찰했다. 살갗은 희끄무레한 색깔이었고 쩍

벌린 입 안에는 진홍색 혀가 날름거리고 있었다. 기이하다 못해 섬칫했다. 뷔브르의 눈은 만물을 보았다. 그것이 그의 힘이었고 능력이었다. 비다르는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기분 나쁜 시선에 혀를 찼다.

“다른 놈들은 악마랑 싸운다고 바쁘고.” 책임은 없었다. 여기서 죽을 각오로 저 악마와 싸워야 할 책임이. 비다르는 애초에 영웅심이 없었다. 그가 악마와 싸웠던 것은 돈을 위해서였고 함께 싸우자는 성배기사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도 돈 때문이었다. 그는 아주 단순한 사람이었다. 돈이 되면 싸운다. 돈이 안 되면? 그럼 왜 싸우나? 아무리 싸움이 즐거워도 돈이 안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비다르가 뷔브르를 상대로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비다르는 백 년 전에 이미 영웅적 행동에는 금전이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경험한 일이다. 그런데 바보 같이 또 손해를 볼 이유는 없었다. 지금은 엔디미온도 없다.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진 셈이니 도망쳐서 어디 숨어버리면 찾지도 못할 것이다.

“씁,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럼에도 비다르는 뷔브르와 마주 보고 섰다. 스스로도 이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도망치지 않았다. 정신없이 사방으로 둘러보던 뷔브르의 수많은 눈들이 동시에 비다르를 보았다. 수십 개의 눈이 오직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것은 혐오스럽다 못해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비다르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 모습에 뷔브르가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너는 설마······.”

“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거냐? 우리 초면인걸로 아는데 바로 알아보는 걸 보니 내가 좀 유명하긴 해?”

“재미있군.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야. 내 작고 소중한 친구가 널 봤으면 아주 반가워했을 거다.”

“악마가 친구도 있냐? 웃기는데.”

“으흐흐, 무지한 자일수록 큰 목소리를 내지······. 모른다는 것은 축복이다. 진실을 통해 알게 되는 두려움이 있거든.”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많이 떨리는 모양이야? 하긴 당연한 일이지. 내가 네 상대니까 말이야.”

“떨려? 이 내가? 아무리. 떨고 있는 것은 오히려 네가 아니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내가 떨기는 왜 떨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두 가지 사실이 있어. 첫째,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 둘째, 강철 주먹은 두려움을 모른다.” 뷔브르가 낮게 웃었다. 그는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어올렸다. 수많은 눈들은 다시 빙글빙글 돌아갔다.

“너 혼자냐? 날 상대할 자가 너 하나뿐이냐?”

“하나면 충분하지.”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래, 다들 두들겨 맞기 전에는 그런 말을 하더라고.” 비다르가 달렸다. 주먹을 꽉 쥐고서 함성과 함께 힘껏 달렸다. 뷔브르는 아주 컸다. 용만큼이나 컸다. 그런 존재를 두 주먹만 가지고 이기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비다르는 자신이 있었다. 그가 백 년 전에 하던 일이 전부 이런 것이었다. 악마를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어려울 것은 없었다. 악마도 사람과 똑같았다. 머리를 부수거나 심장을 뽑으면 죽었다. 비다르가 이제부터 할 일도 그런 것이었다. 뷔브르의 머리를 부수거나 심장을 뽑는 것.

“어리석은 것!” 뷔브르가 입을 쩍 벌렸다. 불이라도 뿜을 것 같은 생김새였지만 정작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살을 에는 듯한 냉기였다. 그것이 비다르를 향해 날아갔고 바닥을 전부 얼려버렸다. 순간적으로 다리가 얼어붙었으나 근력으로 부수고 탈출한 비다르는 미끈거리는 얼음바닥을 발로 부수며 질주했다.

“바위의 손이여, 솟아라!” 뷔브르가 외치자 갑자기 바닥에서 거대한 손들이 솟아올랐다. 그것들은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 유연하게 움직이며 달리는 비다르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강철 주먹은 그것들을 자비없이 부쉈다. 바위 따위가 강철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달리던 중에 갑자기 서늘함이 느껴져서 머리 위를 보니 수많은 얼음 화살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비다르는 빠르게 달리면서 머리를 노리는 얼음 화살들을 주먹으로 붙잡아 으스러트렸다. 그럼에도 워낙 숫자가 많아서 얼음 화살 몇 개가 몸에 생채기를 남겼다. 그 다음은 강풍이 불어와 몸을 뒤로 밀어냈다. 어찌나 강력한 바람인지 거인이 손으로 미는 것만 같았다. 비다르는 쿵쿵 소리를 내며 두 다리를 바닥에 박았다. 그리고 자세를 낮추어 날아가지 않도록 버텼다. 이제 바람이 멈추나 했더니 다시 바닥에서 바위의 손이 솟아올랐다. 뷔브르와 비다르 사이의 거리는 힘껏 달려서 십 초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그럼에도 비다르는 아직 절반조차 가지 못했다. 그것은 전부 뷔브르가 사용하는 다양한 마법들 때문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강철 주먹과 튼튼한 두 다리뿐인 비다르는 악마가 부리는 마법에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아무리 다가가려고 해도 마법으로 접근을 방해하니 거리를 좁힐 방법이 없었다. 약이 오른 비다르는 방금 자신이 부쉈던 바위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뷔브르를 향해 힘껏 던졌다. 하지만 바위는 뷔브르의 마법에 산산조각이 날 뿐이었다.

“주문쟁이 흉내일랑 그만두고 정정당당하게 싸우자, 이 뱀대가리야!”비다르가 흥분해서 외쳤지만 뷔브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싸움을 하면서 유리한 이점을 스스로 버리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싸움은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강하고 비겁한 자가 이기는 것이었다.

“흐흐흐, 내가 말했지.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고. 이건 강함의 문제가 아니라 상성의 문제다. 주먹질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너 따위가 어찌 나를 이길까.” 뷔브르의 말대로 이것은 상성의 문제였다. 백 년 전에도 사술을 부리는 악마들이 많았고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언제나 라우렌시오나 바이올렛의 역할이었다. 둘의 부재는 컸다. 비다르는 이를 악물고서 달렸다. 그저 달리기만 했다.

“바위의 손이여, 솟아라! 냉기여, 얼려라! 바람이여, 불어라!” 뷔브르가 부리는 마법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비다르를 괴롭혔다. 한참 달리다가 갑자기 바닥에서 솟아오른 바위의 손 때문에 공중으로 떠오르거나, 한쪽 발만 얼어붙어서 넘어질 뻔 하거나, 불어오는 바람이 마치 방벽처럼 길을 막거나 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뷔브르는 마법으로 접근을 방해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적으로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비다르의 튼튼한 육체는 마법 공격을 잘 막아냈지만 그래도 몸에 자잘한 상처가 생기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누가 보아도 그가 불리한 싸움이었다. 도무지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바위의 손에 부딪혀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을 때, 날아오는 얼음의 창에 어깨를 찔렸을 때, 불어오는 바람에 뒤로 날아가서 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을 때, 비다르는 자신이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냥 성립이 안 되는 싸움이었다.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도망칠 힘 정도는 남아있었다. 뷔브르는 굳이 쫓지도 않을 것이다. 별 생각도 없이 덤빈 게 잘못이었다. 얼른 도망가야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막아! 물러서지 마라! 물러나면 다 죽는다!”

“으아아악! 죽어라, 이 사악한 것들아!” 죽을 각오로 싸우고 있는 성기사, 악마에게 붙잡힌 성기사, 악귀를 죽이고 있는 성기사, 악마에게 죽은 성기사, 그 위를 지나쳐가는 성기사, 성기사, 성기사, 수많은 성기사들.

“베로니카님! 위험합니다! 잠깐 물러나시지요!”

“멜리사 씨도 같이 물러나요! 적들이 너무 많아요!”

“성기사는 결코 물러나지 않습니다!” 고함을 지르며 서로를 챙기는 꼬맹이들.

“눈이 안 보여······.” 바닥에 쓰러져서 골골거리는 노인네.

“······.” 비다르는 생각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도망치면? 이들을 다 버리고 내 목숨 하나만을 위해서 도망친다면?

“하, 진짜 씹.” 비다르는 한숨을 내뱉으며 두 다리로 똑바로 섰다. 그는 몸에 묻은 흙들을 탈탈 털어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뒤가 아니었다. 정면이었다. 뷔브르를 향해 걸었다. 싸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걸었다.

“귀가 있으면 들어라.” 비다르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손가락이 서로 부딪히면서 철커덕 소리를 냈다.

“눈이 있으면 보아라.” 뷔브르는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비다르를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은 마치 점액질과 같아서 기분 나쁠 정도로 몸을 휘감았다.

“그 이름 찬란하구나. 그 모습 눈부시구나. 사악한 것들을 징벌하니 과연 영웅의 기개로구나.” 비다르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걷는 듯 했으나 이제는 달리고 있었다. 뷔브르의 거대한 덩치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달렸다.

“일기당천의 영웅, 강철 주먹의 비다르, 여기에 등장!” 뷔브르가 입을 벌리며 냉기를 끌어모았다. 비다르가 말했다.

“오늘 누가 죽나 끝까지 한 번 가보자, 이 씹새야.” 바닥에서 바위의 손이 솟아올랐다. 그것을 밟고서 더 멀리까지 뛰었다. 얼음의 창이 날아왔다. 주먹으로 박살냈다. 바람이 불어왔다. 억지로 버텼다. 그리고 달렸다. 다시 달렸다. 비다르는 달리고 또 달렸다. 십 초, 겨우 십 초. 눈 몇 번 깜빡이면 끝날 그정도 시간만 있으면 충분했다. 고함을 질렀다. 그것이 승리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힘껏 고함을 질렀다. 이제 한 발자국이었다. 솟아오른 바위의 손이 턱을 때렸다. 고개가 크게 뒤로 젖혀지며 한쪽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비다르는 이를 악물면서 억지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크게 들린 발로 바닥을 찍었다. 다른 쪽 발로 크게 한 걸음 내딛었다. 거리를 좁혔다. 이제 뷔브르와 비다르는 같은 위치에 있었다. 비다르는 강철로 만들어진 손을 뻗었다. 매끈한 비늘을 뜯어내고 부드러운 살 안으로 손가락을 억지로 박았다. 뷔브르가 몸을 꿈틀거렸다. 비다르는 마치 암벽등반을 하듯이 악마의 몸을 타고 올랐다. 뷔브르가 몸을 흔들었으나 엄청난 악력을 가진 비다르는 결코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악마의 등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길게 뻗은 목을 타고 달렸다. 노리는 것은 머리였다. 그가 제일 잘하는 일, 제일 자신 있는 일, 주먹으로 머리 박살내기.

“강철 주먹 나가신다!” 콰앙! 주먹으로 때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타격음이 났다. 뷔브르의 몸이 크게 흔들리면서 고개가 홱 돌아갔다. 주먹에 맞은 곳의 눈들이 완전히 뭉개져서 바닥으로 투두둑 떨어졌다. 뷔브르는 반사적으로 날개를 휘둘러서 비다르를 날려버렸다. 채찍처럼 휘두른 날개에 맞고서 바닥을 향해 떨어지던 비다르는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뷔브르의 머리를 가리켰

다.

“다음에는 두 대다, 이 새끼야.” 쿵 소리가 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강철 주먹의 영웅은 다시 일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