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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81화 (8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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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브르는 입을 벌려서 웃음소리를 냈다. 다리의 비늘이 뜯겨져 나가고 강철 주먹에 맞아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웃었다. 우스웠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다리와 주먹뿐이면서 감히 덤비려고 하는 꼴이.

“배움이 없는 자로구나. 너는 날 이길 수 없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너는 강하다. 강철 주먹으로 수많은 악마들의 머리를 으깼지. 하지만 너는 마법을 부리는 자를 이길 수 없다. 물이 불을 꺼트리는 것과 같은 일이야. 기세와 근성만으로는 불리함을 극복할 수 없다는 소리다.”

“무슨 소리냐. 세상이란 건 대개 기세와 근성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는 법이야.”

“흐흐흐. 멍청한 것. 그럼 그 잘난 기세와 근성으로 날 한 번 이겨봐라.” 비다르가 달렸다. 그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박살나면서 돌조각이 튀었다.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가 빠르게 얼어붙으면서 뒤를 쫓아왔다.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비다르는 달리고 또 달렸다. 수많은 마법들이 날아왔지만 뛰어난 신체 능력과 튼튼한 몸을 믿고서 그냥 달렸다. 몸 곳곳에 상처가 늘어날수록 비다르의 웃음도 짙어졌다. 백 년 전의 싸움이 생각났다. 수많은 악마들과 싸우고 수없이 많이 죽을 뻔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살아남았다. 궁지에 몰렸을 때도 기세와 근성으로 살아남았다. 그럴 때마다 이 빌어먹을 영웅 행세를 얼른 그만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대악마를 죽일 때까지 그러지 못했다. 그는 역사

에 남은 영웅이 되었고 영웅인 채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같잖은 영웅 행세를 하고 있으니 어쩌면 그게 천성일지도 몰랐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쥐새끼 같은 놈!” 뷔브르가 발을 쿵 구르자 수많은 바위의 손들이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하지만 비다르는 오히려 그것들을 밟고서 더 빠르게 달렸다. 악마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가 영웅을 얼리려 했으나 강력한 근력은 얼음을 박살냈다. 비다르는 다리에 힘을 집중하고서 바위의 손을 박차고 뛰었다. 엄청난 각력 때문에 바위의 손이 바스라졌다. 힘껏 뛰어오른 비다르가 뷔브르의 다리를 손으로 붙잡았다. 이미 비늘이 뜯겨져 나간 부분에 손톱을 박아서 더 위로 올라갔다.

“크아아악! 떨어져라!” 뷔브르가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비다르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나무를 타는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뷔브르의 등 위로 올라갔다. 그에게 무기는 없었다. 오직 강철 주먹만이 있을 뿐. 그가 등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뷔브르의 여섯 날개가 날갯짓을 시작했다. 바람이 불고 뷔브르의 몸이 흔들리자 비다르가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날갯짓

을 하여 공중으로 떠오른 뷔브르가 등 위에 달라붙은 해충을 떨어트리기 위해 비행을 시작했다. 동굴 안은 아주 컸다. 거대한 덩치의 뷔브르가 내부를 한 바퀴 비행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며 날아다니던 뷔브르는 토벌대의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성기사들을 잡아챘다. 그리고 악마들 위로 떨어트렸다. 갑작스럽게 적진 한가운데에 떨어진 성기사들은 악마들의 공격을 받고 금세 숨이 끊어졌다.

“이런, 씹!” 비다르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비늘을 꼭 잡았다. 너무 세게 잡은 탓에 비늘이 뽑혔지만 바로 살갗에 손톱을 박아서 억지로 버티었다. 상황이 나빴다. 토벌대는 이미 악마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뷔브르가 날아다니면서 성기사들을 공격하면 버틸 수가 없었다. 본래라면 뷔브르가 토벌대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비다르가 막아줄 생각이었는데 이러면 의미가 없었다. 무슨 수로 써서라도 뷔브르를 다시 바닥에 떨어트리고 토벌대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비다르! 너는 날 이길 수 없다! 강철 주먹이라고? 그깟 주먹이 무엇이라고! 주먹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응? 말해봐라! 무엇을 할 수 있냐고!” 무술이란 것은 제대로 익히면 강력하다. 주먹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발차기로 상대를 불구로 만들 수도 있다. 가지고 있는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기술이고 배우면 배울수록 강력해진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상대로 가정한 기술일 뿐이다. 주먹으로 호랑이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발차기로 곰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체급의 차이 때문이다. 사람이 아무리 힘을 효율적으로 쓴다고 해서 짐승과 같은 힘을 낼 수 있을까? 전력으로 휘두른 주먹과 곰이 가볍게 휘두른 주먹이 같을까? 그리고 맷집은? 곰이나 호랑이가 사람이 휘두른 주먹에 맞고 뻗을까? 타격기, 관절기, 그 외의 다른 기술들 전부는 오직 사람이 상대일 때만 유효하다. 사람을 상대할 때조차 방어구를 착용하면 크게 의미가 없다. 무술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그래서 무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철퇴로 갑옷을 부수고 검으로 상대의 목을 베는 것이 더 위협적이고 강력하니까. 비다르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맨손 격투를 고집했다. 미련한 짓임을 알면서도 그랬다. 자신의 주먹을 강철로 바꾸고 끝까지 주먹만 가지고 싸웠다. 그래도 그는 수많은 악마들을 학살하고 영웅의 자리에 올랐으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공적을 세웠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무기 없이도 악마를 죽일 수 있었던 이유, 수많은 악마들의 머리를 깰 수 있었던 이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비다르가 강하기 때문이다. 무술의 약점이니, 체급의 차이니, 악마의 강력함이니, 그런 구구절절한 사정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냥 그가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강한 놈이 강하다. 비다르는 강하다. 끝까지 가면 이기는 것은 언제나 비다르다!

“으아아아압!” 쾅! 강철 주먹과 악마의 비늘이 부딪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비다르는 두 주먹을 꽉 쥐고서 뷔브르의 등을 난타했다. 때릴 때마다 비늘이 박살나서 사방으로 번쩍거리며 날아갔다. 뷔브르는 몸을 흔들면서 괴로워했다. 주먹이 한 번 꽂힐 때마다 등뼈가 박살날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아무리 여섯 날개의 악마라도 그 상태에서 제대로 비행할 수는 없었다. 뷔브르는 공중에서 비틀거렸고 방향을 잃고서 벽 쪽으로 날아갔다. 머리가 벽과 부딪치자 동굴 전체가 흔들렸다. 천장에서 돌조각들이 쏟아져 내렸고 아래에서 싸우던 성기사들과 악마들이 모두 뒤로 물러났다. 뷔브르는 다시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무자비하게 꽂히는 비다르의 주먹이 그것을 방해했다. 소름 끼치는 비명과 함께 뷔브르가 벽과 충돌하면서 날갯짓을 했다.

“떨어져라! 떨어져, 이 뱀대가리야!” 비다르는 등을 때리던 것을 멈추고 뷔브르의 머리를 쳐다보았다. 등을 때리기만 해서는 떨어트릴 수 없었다. 공중에서 날뛰는 뷔브르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엉금엉금 기어서 목을 향해 이동했다. 거기 매달려 있으니 날갯짓을 할 때마다 목이 출렁거려서 더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본래는 머리를 때려서 떨어트리려고 했지만 그 대신에 힘껏 목을 졸랐다. 뷔브르의 목은 덩치에 비해 가늘어서 한 아름 정도에 불과했다. 때문에 비다르가 충분히 목을 조를 수 있었다. 아무리 악마여도 숨은 쉬어야 했기에 뷔브르는 컥컥 소리를 내면서 몸을 비틀거렸다. 효과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비다르는 더욱 세게 목을 졸랐고 결국 뷔브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쾅 소리가 나면서 동굴 전체가 흔들렸다. 거구의 악마가 바닥과 충돌한 충격은 상당했다. 바닥이 부서지고 먼지구름이 솟아올랐다. 추락 직전에 목 위에서 뛰어내린 덕에 뷔브르 아래에 깔리는 것을 면한 비다르는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뷔브르가 컥컥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들었다.

“이 성가신 놈! 더는 봐주지 않겠다!” “오우, 무서운데?” 악마와 영웅은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성기사들은 비다르의 싸움을 보고서 힘을 냈다. 그가 뷔브르를 막아주고 있는 덕에 조금씩이지만 악마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악마들을 무찌르고 비다르에게 가세할 수 있을 것이다. 에스메렐다는 희망을 가지고서 무기를 휘둘렀다. 그녀의 검에 악마 한 마리가 쓰러졌다. 뒤에서 은빛새벽회가 날린 마법에 악마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길 수 있다. 작은 희망은 점차 그 크기를 불려나가고 있었다. 그만큼 비다르의 존재는 강렬했다. 마치 백 년 전의 영웅처럼.

“몰아붙여라!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승리하리라!” 토벌대는 기세가 올라서 악마들을 몰아붙였다. 싸움은 순조로웠다. 이대로 길었던 악마들과의 싸움이 끝날 것 같았다.

“으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에스메렐다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악마들이었다. 한두 마리가 아닌 수십 마리의 악마들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수백 마리의 악귀들이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이제 끝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악마와 악귀들의 존재는 토벌대를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겨우 생겨났던 작은 희망의 불꽃이 확 꺼져버렸다.

“뭐야, 저건 또?” 당황한 것은 비다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토벌대가 악마들을 얼른 처리하고 자신의 싸움에 가세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악마와 악귀들 때문에 그 기대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그는 이를 갈면서 외쳤다.

“이 개 같은 놈! 부하들을 숨기고 있었던 거냐!”

“아니야······.”

“어?” 뷔브르는 벼락처럼 고함쳤다.

“아니라고, 이 멍청한 놈아! 너는 숫자도 셀 줄 모르느냐? 내가 부리는 악마는 서른셋뿐이다! 저 자식들까지 합치면 서른셋을 훌쩍 넘는데 어찌 내 부하란 말이냐!”

“뭐야? 네 부하가 아니라고? 그럼 씹, 저 새끼들은 대체 뭐야?” 뷔브르가 이를 갈면서 다가오는 악마와 악귀들을 보았다. 제일 뒤쪽에는 그가 아는 얼굴이 있었다. 세상에 몇 남지 않는 형제, 자신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

“뷔브르, 이 찢어죽일 놈아! 이 내가 왔다! 사도왕 로아니스가 왔다! 내가 친히 널 찢어죽여 주마! 내 아우, 라가르디오를 위해서!”

“······저 미치광이는 자기 동생을 왜 여기서 찾는지 모르겠군.” 뷔브르는 왜 로아니스가 여기 나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서로 사이가 나쁘기는 해도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올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로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라, 내 하수인들아! 가서 저 가증스러운 놈을 죽여라!” 수십 마리의 악마들과 수백 마리의 악귀들이 뷔브르를 향해 뛰쳐나갔다.

“성기사들 벽으로 붙어! 은빛새벽회도! 얼른! 휩쓸린다!” 토벌대는 얼른 벽 쪽으로 바싹 붙었다. 로아니스의 부하들은 토벌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오직 뷔브르와 그 부하들만을 공격했다. 토벌대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너희들! 더러운 전능자의 종들아! 너희들은 뷔브르의 여섯 날개를 다 잡아찢은 후에 죽여줄 것이니 잠깐만 기다려라!” 하지만 로아니스가 토벌대를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우선순위가 낮았을 뿐이었다. 에스메렐다는 지금 후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째서 로아니스가 여기 나타났는지, 왜 뷔브르를 공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설마 이런 상황에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어쨌거나 지금이 도망칠 마지막 기회였다.

“토벌대, 후퇴합니다! 모두 진지로 후퇴합니다!” 뷔브르의 세력과 싸우는 것만으로 이미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이 상황에서 로아니스와 싸우면 모두 죽을 것이 뻔했다. 지금은 물러나고 다음을 노려야 했다.

“안 됩니다! 후퇴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백인대장 중 하나인 그림발드가 반대했다. 후퇴하던 토벌대가 주춤했다. 하지만 다른 백인대장인 에우레킬슨이 화를 내며 후퇴 명령을 내리자 다시 움직였다. 그래도 그림발드는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는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율리아도, 베로니카도, 멜리사도, 그리고 엘런까지도. 그들은 도망치지 않고서 여전히 사악한 것들과 싸우고 있었다. 에스메렐다가 그들을 버려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머리 위로 수많은 마법들이 날아갔다.

“사르하님! 왜 도망치지 않으십니까? 위험합니다! 물러나고 다음을 노려야 해요!”

“다음 같은 것은 없어.” 사르하의 갑옷은 온갖 오물들로 더럽혀져 있었다. 제일 후방에서 싸웠음에도 더러웠다.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던 것이다. 투구 안에서 새빨간 안광이 더욱 힘차게 빛났다.

“물러나는 것 따위는 없어. 물러나면 끝까지 물러나야 해. 다음이라고? 저 뒤까지 도망쳤는데 무슨 수로 여기까지 돌아오지? 기억하게, 추기경. 물러나는 것은 쉬워. 돌아오는 게 힘들 뿐이지.” 은빛새벽회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에우레킬슨이 성기사들을 뒤로 물렸고 얼른 바깥으로 나가자고 소리쳤다. 에스메렐다는 이제 결정해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멜리사가 다가왔다.

“물러나면 안 됩니다.”이제 물러나면 안 된다는 말이 지긋지긋했다. 에스메렐다는 입술을 비틀어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왜? 성기사는 물러나면 안 되니까? 겨우 그 빌어먹을 교리 때문에? 제발 그런 소리는 집어치워요. 일단 살아야지! 안 그래요? 일단 살아야 다음을 노리든 뭐든 할 거 아니야!” 난쟁이 성기사는 에스메렐다의 고함에 주눅 들지 않았다. 그녀는 똑바로 서서 에스메렐다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게 정말 당신의 진심이냐고 묻는 것처럼.

“도망치면 안 돼요.” 고운 목소리였다. 에스메렐다는 목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요정이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연약한 주제에 확고한 믿음으로 타오르는 눈을 가진 요정이. 베로니카는 짧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웅이 돌아올 겁니다. 반드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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