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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메렐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토벌대를 보았다. 다친 사람도 많았고 죽은 자도 제법 있었다. 이번에는 악마들을 보았다. 동굴 안을 꽉 채운 악마와 악귀들, 그리고 사도왕 로아니스.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어서 찝찔한 맛이 났다. 영웅이 돌아온다니. 그게 누구란 말인가. 엔디미온? 그가 범상치 않은 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백 년 전 성배기사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가진 능력까지 똑같을까? 그가 돌아온다고 해서 이 불리한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까? 에스메렐다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베로니카의 믿음은 확고했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멜리사도 그랬고 율리아도 그랬다. 심지어는 엘런조차 몸을 떨면서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엘런 경.”
“네.”
“경의 생각은 어떤가요? 엔디미온이 돌아오면 우리가 이 싸움을 이길 수 있을까요?”
“저는 엔디미온에 대한 대단한 믿음은 없습니다. 물론 그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악마숭배자 신디아를 혼자서 죽였으니까요. 돌아온다면 분명 큰 전력이 될 것입니다만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제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도망가지 않지요?”
“그게 의무니까요. 성기사들의 의무.” 에스메렐다는 입술을 비틀었다. 의무, 빌어먹을 의무. 그까짓 게 목숨보다 중요한가? 여기서 죽어봤자 개죽음일 뿐이다. 하다못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악마들을 다 죽일 수 있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죽음이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이 싸움은 가망이 없다. 엔디미온 한 명만을 믿고서 싸움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도박이었다. 에스메렐다는 토벌대의 지휘관이었고 이들의 목숨을 책임져야 할 입장에 있었다. 그녀는 이제 결정을 내렸다.
“······모두 후퇴합니다. 여기서 항전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그 말에 토벌대가 움직였다. 그들은 한데 뭉쳐서 악마와 악귀들을 뚫고서 도망치려 했다. 다행히도 로아니스는 뷔브르를 쳐다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지금이 바로 기회였다. 에우레킬슨이 선봉에 서서 길을 뚫기로 했다. 토벌대가 악귀들을 무찌르며 출구 쪽으로 달려갈 때였다.
“이 깜찍한 것들! 내가 말했지! 너희들의 순서는 뷔브르 다음이라고! 안달하지 않아도 죽여줄 것이니 쓸데없이 명을 재촉하지 마라!” 로아니스가 손을 한 번 휘두르자 거기서 보라색 광선이 발사됐다. 그것은 벽을 박살냈고 돌무더기를 떨어트려서 출구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토벌대는 당황했다. 도망쳐야 하는데 출구가 막혀버렸다. 로아니스는 이제 길을 막아버린 뒤에는 토벌대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뷔브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싸워야겠군, 추기경.” 사르하가 낮게 웃었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싸워야 했다. 성기사들은 죽음을 각오했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는 것은 그들도 잘 알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벽을 등지고 섭니다. 모두 모여요! 그리고 로아니스의 부하들부터 우선적으로 공격하세요!” 이 싸움은 세 세력의 충돌이었다. 로아니스와 뷔브르와 토벌대. 로아니스의 세력이 강성하고 나머지 두 세력은 약했다. 우습게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뷔브르의 세력을 도와서 로아니스를 공격해야 했다. 로아니스가 뷔브르를 죽이는 순간 수많은 악마와 악귀들이 토벌대를 공격할 것이고 그러면 승산이 없었다. 강력한 적의 출현은 모두를 단합시킨다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물론 토벌대가 뷔브르와 힘을 합치자고 결의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두 세력 다 로아니스를 우선적으로 공격할 뿐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뷔브르는 여전히 적이었다.
“로아니스, 우리가 친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형제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짓거리는 좀 실망이군.” 뷔브르는 으르렁 소리를 내면서 로아니스를 노려보았다. 수십 개의 눈이 한꺼번에 노려보는 것은 몹시 두려운 일이었으나 로아니스는 결코 겁을 먹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불 같이 화를 내며 외쳤다.
“뷔브르, 이 뻔뻔한 놈! 감히 내 아우를 죽이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내가 너의 날개를 다 뽑아버리고 그 눈깔들을 모두 짓뭉개주겠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네 아우? 라가르디오가 죽었으면 마땅히 성기사들에게 복수할 것이지 왜 나한테 와서 난리를 치는 거냐?”
“네 부하가 내 아우를 죽였으니까!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건 또 무슨······. 내 부하가 라가르디오를 대체 왜 죽인단 거냐?”
“그거야 날 견제하기 위해서겠지!” 뷔브르는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는 공동의 목적을 가졌고 그것을 위해 협력하는 사이다. 그런데 내가 널 견제해? 대체 무엇 때문에? 머리가 염소이니 생각하는 것도 염소 수준인 거냐?”
“말조심해라! 네 부하가 라가르디오의 창을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똑똑히 보았다! 큰 키에 커다란 덩치, 그리고 금발! 네 부하 중에 이런 자가 없다는 소리냐!” 큰 키, 커다란 덩치, 금발······. 곰곰이 생각하던 뷔브르가 수십 개의 눈을 크게 떴다. 그거 설마?
“이 멍청한 놈아. 그건 내 부하가 아니라 성배······.”
“듣기 싫다! 전부 죽여주마!” 로아니스가 땅을 박차고 뛰어서 뷔브르에게 덤벼들었다. 두 악마가 싸움을 시작하자 비다르는 얼른 라이오넬을 둘러업고 토벌대 쪽으로 달렸다. 대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악마들끼리 서로 싸워준다면 그로서는 감사한 일이었다.
“야, 꼬맹아! 이것 좀 받아라!” 비다르는 토벌대에게 기절한 라이오넬을 던져주고서 동굴 안을 둘러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악마와 악귀들뿐이었다. 그에 비해 토벌대의 숫자는 제법 줄어있었고 사람들도 많이 지쳐있었다. 불리한 싸움이었다. 비다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일 선두에 섰고 달려드는 악귀의 머리를 주먹으로 박살냈다. 성기사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혼자서 뷔브르와 당당하게 맞서던 바로 그를. 그들은 저도 모르게 비다르에게 의지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변수라도 만들 수 있는 것은 그가 유일했으니까.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백 년 전에는 이런 싸움이 일상이었으니까.” 그의 격려는 사실 별 도움이 안 됐다. 백 년 전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무기를 쥐었다. 싸워야 했으니까.
“대형 유지! 혼자 움직이지 말고 함께 싸운다!” 토벌대는 동굴의 구석에서 몰려오는 악마와 악귀들을 상대했다. 비다르가 가장 선두에 서서 악마들을 상대했다. 성기사들은 일단 악귀들부터 죽였고 마법사들은 제일 뒤쪽에서 마법으로 비다르를 보조했다. 살고자 하는 의지, 의무를 행하고자 하는 의지,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 의지가 그들을 싸우게 만들었다. 수십 마리의 악귀들이 달려와 그들에게 몸으로 부딪쳐도, 악마들이 사악한 기운을 날려 대열을 흐트러트리려고 해도, 그들은 멈추지 않고 항전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고 제일 자신 있는 일이었다. 몰려드는 사악한 것들을 향해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기세는 처절했고 의지는 숭고했다. 수많은 악귀들이 토벌대를 향해 덤벼들었다가 바위에 부딪친 파도가 포말이 되듯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이 싸움에서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저항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과 같았다. 퇴로는 막혔고 사방은 적, 그리고 다르디낭의 적자라 불리는 강력한 악마가 둘이나 있었다. 그에 비해 토벌대의 사망자는 서른이 넘었고 부상자는 그 곱절이었다. 백 명 남짓한 병력으로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들은 그 물음을 잊기 위해서 더 맹렬하게 싸웠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 더 힘차게 무기를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수많은 악마와 악귀들이 죽었지만 더 많은 악마와 악귀들이 몰려왔다.
“으아아아악!”
“오른쪽이 무너진다! 막아!”
“왼쪽도 위험하다!” 에우레킬슨은 자신의 부하들이 점차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럴 때마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에스메렐다가 더 빨리 결정을 내렸어야 했다. 그랬으면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많은 성기사들은 오늘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마치 심장이 식어버린 것처럼 차가웠다. 이제 와서 책임이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는 그저 검을 들고서 한 마리라도 더 많은 악귀들을 죽이려고 애쓸 뿐이었다. 수많은 악귀들을 베었던 검은 점차 날이 무디어졌다. 이제는 벤다기보다는 거의 때리는 것에 가까웠다. 용기와 함께 샘솟던 신성력도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빛나던 검은 이제 꺼질 듯이 가물거렸고 어둠을 투시하던 두 눈 역시 차츰 보이지 않게 되고 있었다. 신성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가시왕관 기사수도회의 대장인 에우레킬슨이 신성력이 부족할 정도면 다른 성기사들은 훨씬 더 부족할 것이다. 주변에서 성기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었다. 용기와 기세만으로는 상황을 뒤집을 수 없었다. 은빛새벽회가 사용하는 마법 역시 위력이 약해지고 마법이 날아가는 빈도가 줄었다. 사르하가 분전하고 있었으나 그 혼자서 은빛새벽회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비다르가 대여섯 마리의 악마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면서 토벌대의 부담을 줄여주고 있지만 그것도 단지 잠깐 시간을 버는 것에 불과했다. 방금 또 한 명의 성기사가 죽었다. 에우레킬슨은 흐릿한 시야 때문에 눈을 한 번 찡그렸다. 시야가 불분명했다. 어둠이 시야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악마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했다. 갑자기 왼쪽에서 나타난 악마가 커다란 몽둥이를 휘둘러 성기사 몇 명과 에우레킬슨을 날려버렸다. 이미 지쳐있던 성기사 두 명이 그 공격으로 절명했고 다른 두 명은 에우레킬슨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그들은 끙끙거리기만 할 뿐 얼른 일어나지 못했다. 에우레킬슨은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신성력이 완전히 바닥났다. 깜깜한 어둠이 자신의 눈을 가리는 것을 느끼며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결한 에우레킬슨, 아델리온 가문의 적자이자 가시왕관 기사수도회의 대장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몸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식이 점차 아래로 침전했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 저 아래로. 주변의 소음도 점점 작게 들렸다. 꺼져가는 의식을 수면 위로 다시 끌어올린 것은 무언가 박살나는 듯한 엄청난 소리였다. 에우레킬슨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처음에는 뷔브르와 로아니스의 싸움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두 악마는 아주 강력하니 저런 소리를 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그런 소리가 아니었다. 소란스럽던 주변이 갑작스럽게 조용해지고 이제는 오직 발자국 소리만이 났다. 모두가 발소리에 집중했다. 그럴 만한 존재였다.
“나는 사악한 것들을 벌하는 징벌자이자 신성한 힘으로 벼린 창칼이니 감히 내게 맞설 자가 누구냐?”힘 있는 목소리였다. 차가워진 몸을 따스하게 감싸는 목소리였다. 에우레킬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눈이 부셨다. 에우레킬슨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빛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