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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84화 (8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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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기사야! 너는 내 아우를 둘이나 죽였다! 그것도 라가르디오의 창으로 뷔브르를! 나는 결코 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널 기다리고 있으며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분노를 느끼며 벌벌 떨다 죽어라!” 엔디미온은 로아니스의 고함을 한 귀로 흘리며 곁눈질로 뷔브르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 몸에 꽂힌 창과 검을 보고 있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검은 한 자루뿐이었다. 신디아의 검은 본래 쌍검술을 사용하는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것이기에 장검에 비해서 길이가 약간 짧았다. 검 하나만 들고 싸우기에는 모자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싸우려면 뷔브르의 몸에 꽂힌 창과 검을 회수해야 했다. 사실 신디아의 검이나 라가르디오의 창은 성배기사의 무기라고 하기에는 내구성이 부족했다. 그냥저냥 쓰기에는 괜찮지만 전력으로 신성력을 뿜어냈을 때 무기가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신디아의 검은 받아들일 수 있는 신성력의 양이 정해져 있었고 그것은 라가르디오의 창 역시 마찬가지였다. 엔디미온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려면 백 년 전에 사용하던 성검이 있어야 했다. 전능자가 별을 녹여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성검만이 성배기사의 힘을 견디어낼 수 있었다. 지금은 가지고 있는 힘을 오롯이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죽어라, 성배기사야!” 로아니스의 날카로운 손톱이 허공을 가르자 바람의 칼날이 생겨났다. 엔디미온은 보이지 않는 칼날들을 검으로 쳐낸 후에 뷔브르 쪽으로 뛰었다. 로아니스가 바닥에 떨어진 바위들을 던지는 탓에 달리면서도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야 했다. 이제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더욱 세게 바닥을 박찼고 손을 뻗어서 창부터 회수하려고 했다. 갑자기 창이 갑자기 갸우뚱하면서 흔들렸다. 마치 뷔브르의 몸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엔디미온은 의아해하면서도 얼른 창을 잡았다. 하지만 창은 마치 불에 달군 것처럼 뜨거웠고 깜짝 놀란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뺐

다. 그러자 창의 흔들거림이 더 심해졌고 결국에는 스스로 뷔브르의 몸에서 뽑혀져 나왔다. 그리고 마치 실로 연결해서 잡아당긴 것처럼 하늘을 날아갔다. 그것을 날아가면서 그 크기를 점점 키워갔고 로아니스의 손에 잡혔을 때는 라가르디오가 들었을 때처럼 본래의 크기를 되찾았다. 불꽃을 형상화한 창날은 불꽃 그 자체가 되었고 사방으로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열심히 싸우던 성기사들은 물론이고 악마와 악귀들까지도 호흡이 답답해졌을 정도였다. 이글거리는 창을 손에 든 로아니스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 건방진 것아! 그게 네 창인 줄 알았느냐? 라가르디오에게 창을 준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 창의 진정한 주인은 나다! 너는 가증스럽게도 내 아우의 창을 가지고서 내 백성들을 죽였고 또한 뷔브르를 죽였지. 그러니 나 역시 널 죽이겠다! 이 창으로!” 로아니스가 창을 휘두르자 타오르던 창날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불줄기는 두꺼웠고 열기는 뜨거웠다. 불꽃에 맞은 돌이 반쯤 녹아서 흘러내렸다. 가히 용의 불꽃에 비할 만한 위력이었다. 엔디미온은 아쉬운 대로 뷔브르의 몸에서 검을 뽑은 뒤에 로아니스를 향해 달렸다. 악마는 달려오는 성배기사를 향해 불꽃을 발사했고 그것은 바닥을 녹였다. 부글거리는 용암을 훌쩍 뛰어넘어 거침없이 달리던 엔디미온을 향해서 다시 불꽃이 날아왔다. 기세가 엄청났다. 신성력으로 다리를 강화한 후에 더 빠르게 달렸다. 로아니스와의 거리는 점차 좁혀지고 있었다.

“재빠르기가 쥐새끼가 같구나! 하지만 언제까지 내 불꽃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로아니스의 불꽃은 라가르디오의 것과 달랐다. 더욱 위력적이었다. 엔디미온이 지나쳐 온 길들은 모두 녹아서 용암이 흐르는 강이 되었고 그것은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점차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자꾸만 치솟는 열기가 성기사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두꺼운 갑옷을 입고 무거운 무기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체온이 올라가는데 바닥을 흐르는 용암의 열기까지 더해지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은빛새벽회가 마법으로 얼린다고 해도 한순간일 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엔디미온은 정면에서 날아오는 불꽃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두 자루의 검을 교차했고 그 상태에서 불꽃을 크게 베었다. 네 조각으로 갈라진 불꽃은 수많은 불씨로 변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신성력으로 로아니스의 사악한 힘을 몰아낸 것이었다. 엔디미온은 방금 전 과도하게 신성력을 받아들인 검 두 자루에 미세하게 금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로아니스를 죽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 로아니스는 쉴 새 없이 불꽃을 발사했고 그러면 엔디미온이 검으로 없애버렸다. 몇 번을 해도 똑같은 결과였다. 로아니스에게는 의미도 없는 공방이었으나 엔디미온은 달랐다. 그는 불꽃을 자르면서도 착실히 로아니스와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이제는 로아니스가 불꽃을 발사하면 자신도 같이 휘말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했다. 반사적으로 불꽃을 쏘려다가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을 깨달은 로아니스가 그냥 창을 휘둘렀다. 창날 자체가 이미 불꽃이었고 비록 불을 뿜지는 않았으나 악마의 강대한 힘과 합쳐져 그것만큼 강력한 위력을 뽐냈다. 엔디미온은 침착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검과 창이 부딪쳐 빛이 번쩍였다. 검은 창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작았으나 완벽하게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체급 차이와 과도한 신성력의 주입 때문에 쌍검의 수명이 빠르게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엔디미온은 싸움을 길게 끌지 않기로 했다. 로아니스가 휘두르는 창을 한 번 막아내고 곧장 발을 향해 달려가 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창이 날아오는 순간에 갑자기 시야 끄트머리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로아니스의 발이었고 미처 대비하지 못한 엔디미온의 몸을 뒤로 날려버렸다. 그 다음에는 창이 불꽃을 뿜었다. 뜨거운 불꽃이 엔디미온의 몸을 휘감았다. 용의 불꽃처럼 재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녹여버리는 불꽃이었다. 그것은 세차게 타오르며 불기둥을 만들어냈으나 그 안에서 빛이 한 번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기세를 잃고 사라졌다. 투두

둑 떨어지는 불씨들을 사이에서 엔디미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고 몸 곳곳이 엉망이었다. 아무리 성배기사라도 그만한 공격을 정통으로 맞고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반쯤 녹은 사슬갑옷을 손으로 뜯어서 내버렸다. 그 사이에 로아니스가 훌쩍 뛰어서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그는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창을 내질렀고 엔디미온이 그것을 피하자 엄청난 소리가 나면서 바닥이 완전히 박살났다.

동굴 안이 크게 흔들렸다. 로아니스가 다시 창을 내질렀다. 엔디미온은 각력을 이용해 위로 뛰었고 창대 위에 착지했다. 그 상태에서 곧장 로아니스를 향해 달렸다. 로아니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창을 흔들었으나 엔디미온은 두 다리가 창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로아니스의 손 위까지 도달했고 검으로 힘껏 손등을 찔렀다. 로아니스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세게 흔들자 엔디미온이 발을 삐끗하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손등에 박은 검의 손잡이를 잡은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팔 하나의 힘만으로 자신의 몸을 다시 손등 위로 올렸다. 검을 뽑고 머리를 향해 달리자 로아니스가 반대쪽 손을 휘둘렀

다. 붙잡아서 내동댕이치려고 했지만 붙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엔디미온은 반대쪽 손 위에 올라타더니 로아니스가 손을 흔드는 것을 이용해 더 위로 뛰어올랐다. 그의 위치는 딱 로아니스의 머리 바로 위. 그대로 떨어져서 머리를 검으로 찌른다면 아무리 로아니스라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로아니스에게도 기회였다. 엔디미온은 날개가 없다. 공중에서는 행동이 부자유하다는 말이다. 만약 손으로 잡아채기만 한다면 오히려 엔디미온을 죽일 기회였다. 로아니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반드시 손으로 잡는다. 그리고 끔찍한 열기를 느끼며 고통스럽게 몸을 버르적거리게 만들어주마. 그는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엔디미온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게 실수였다. 갑작스럽게 번쩍이는 빛이 그의 눈을 멀게 만든 것이다. 로아니스는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고 아차 하면서 억지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수리에서부터 목까지 길게 상처가 남은 후였다. 아주 큰 상처였지만 그것으로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로아니스는 사도왕이라 불리며 수많은 악마들을 이끄는 자였고 대악마의 힘을 이어받은 강력한 악마였다. 그는 결코 쉽게 죽지 않았다. 그것을 알기에 엔디미온은 끝을 내기 위해 다시 검을 들어 목을 베려고 했다.

“크아아악! 이 증오스러운 놈! 널 반드시 죽이겠다!” 로아니스가 창대 끝부분으로 바닥을 찍었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엄청난 열풍이 불었고 그것이 엔디미온을 뒤로 날려버렸다. 그 다음은 뜨거운 불꽃이었다. 이번에는 신성력으로 몸을 보호했으나 그래도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내 진정한 힘을 보여주겠다, 성배기사야!” 갑자기 로아니스의 몸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그 주변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점 하나를 중심으로 주변이 회전하는 느낌이었다. 점이 점차 커지고 더 빠르게 회전하더니 곧 로아니스의 몸을 삼켜버렸다. 로아니스가 특수한 능력을 사용했음을 깨닫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엔디미온의 정면에서 일그러짐이 발생했다. 그리고 거기서 불쑥 주먹이 튀어나왔다. 주먹이 엔디미온의 몸을 후려쳤고 그 반동으로 뒤로 날아가는 것을 어디선가 나타난 발이 또 한 번 걷어찼다. 엔디미온은 로아니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다. 그는 자신이 만든 거짓된 세상 뒤에 숨어버렸고 발과 주먹만을 이곳으로 보내 엔디미온을 공격하고 있었다. 본체가 이곳에 없는 이상 엔디미온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그럴 때마다 주먹과 발차기가 날아왔다. 엔디미온이 주먹에 맞고 바닥을 구르자 어디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났다. 엔디미온은 비틀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누가 보아도 지친 모습이었다. 그는 로아니스의 공격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제 승부는 났다. 로아니스는 끝을 내기로 했다. 이번에는 어디에 나타날까. 어디든 상관없었다. 엔디미온은 이번 공격으로 죽을 것이다. 창을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현실을 향해 쭉 내뻗었다.

“악마들의 생각이야 단순하지. 내가 얼마나 많은 악마들을 죽였다고 생각하나, 로아니스. 너희 같은 놈들의 생각은 뻔해.” 창이 움직이지 않았다. 붙잡힌 것이다. 로아니스는 거짓된 세상 안에서 눈을 크게 떴다. 잡았다고? 지금까지는 전혀 반응도 못했으면서?

“너는 지금까지 내 등 뒤로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게 네가 가진 가장 위협적인 한 수였으니까. 그런 건 남발하면 의미가 없지. 그래서 마지막까지 아껴두고 있었을 거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등 뒤를 의식하지 않을 때, 확실하게 날 죽이기 위해서.” 창대를 손으로 잡은 엔디미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지끈 소리가 나면서 창대가 구부러졌다.

“나는 뻔한 공격에 당해줄 만큼 멍청하지 않다.” 엔디미온이 있는 힘껏 창대를 잡아당겼다. 반사적으로 로아니스의 몸도 거짓된 세상에서 현실로 끌려나왔다. 처음에는 손목까지만 나왔었는데 지금은 어깨까지 나온 상태였다. 로아니스는 깜짝 놀라서 창을 버리고 다시 팔을 뒤로 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엔디미온이 신성력을 가득 담은 검으로 손등을 찔러서 바닥에 고정시켰다. 그는 하나 남은 검

을 들고서 거짓된 세상과 현실의 연결점을 향해 달렸다. 로아니스의 세상 안으로 침입한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로아니스는 다른 쪽 주먹을 내질렀다. 검과 주먹이 부딪쳤다. 처음에는 고요했다. 그러나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뒤늦게 일어난 풍압과 함께 로아니스의 주먹이 뒤틀렸다. 처음에는 주먹, 그 다음에는 손목, 그리고 팔, 다음은 어깨. 모든 것들이 뒤틀리고 뼈가 부러지고 사방으로 피가 튀

었다. 로아니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 안으로 성배기사가 뛰어들고 있었다.

“나는 로아니스, 사도왕 로아니스! 나는 결코 죽지 않······.” 말의 시작은 있었으나 끝은 없었다. 빛이 번쩍이고 남은 것은 오직 성배기사뿐이었다. 거짓된 세상 따위는 없었다. 현실 위에서 악마의 시체만이 남아서 한때 그런 것이 있었음을 주장했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싸움은 거기서 끝이었다. 주인을 잃은 악마와 악귀들은 도망쳤고 빛을 따르는 자들만이 남아서 성배기사를 경외했다. 모두가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고개 숙여 절했다. 모두를 대신하여 에스메렐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능자의 참된 화신을 뵙습니다. 우리 모두는 당신의 뜻을 잇는 자이자 그 뒤를 쫓는 자이니 감히 청하건대 우리를 빛으로 이끄소서······.” 엔디미온은 몸에 묻은 오물을 털어내며 말없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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