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85화 (85/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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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고개를 들어라.” 엔디미온의 말에 고개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감히 성배기사의 얼굴을 보는 것이 불경한 짓이라 여겼다. 묵묵히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을 향해 엔디미온은 나직이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사람들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경험은 백 년 전에도 수없이 많이 해보았다. 엔디미온은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에도 덤덤했다. 그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검은 유리가 깨지듯 쨍그랑 소리를 내며 손잡이만을 남기고 수많은 조각으로 분해됐다.

“너희는 내가 없는 백 년 동안 훌륭하게 의무를 다했다. 분명 칭찬할 만한 일이지.” 성기사들은 감읍하며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엔디미온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너희는 조금 더 정진해야 할 것이며 백 년 전의 순수한 투쟁심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쓴소리에 더욱 고개를 숙이는 성기사들 사이에서 에스메렐다가 말했다.

“전부 다 저희의 부덕입니다. 부족한 저희를 성배기사께서 이끌어주십시오.”

“불가하다.”

“어째서입니까?”

“지금은 백 년 전이 아니니까.” 성기사들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고개를 들어 엔디미온을 바라보았다. 성배기사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너희의 시대다. 내가 너희를 위해 힘을 보탤 수는 있어도 내가 너희를 구해줄 수는 없다는 소리다. 이제 영웅 같은 것은 없다. 오직 사람만이 있지.” 성기사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저희를 버리시겠다는 뜻입니까?”

“스스로 투쟁하지 않는 인생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남이 대신 살아주는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지? 나는 너희를 위해 싸워줄 수 있다. 너희를 위해 위험을 물리쳐주고 지켜줄 수 있다. 그럼 그 다음은? 내가 없어지고 나면 그 다음은? 그때도 성배기사의 귀환을 기다리며 손가락만 빨고 있을 셈이냐? 너희는 투쟁자다. 달콤한 과실을 거저 얻으려고 하지 마라.

과일이 단 것은 땀 흘려 일했기 때문이다. 영웅의 시대는 갔다. 성배기사는 과거의 망령일 뿐이며 결코 세상의 주인일 수 없다. 너희는 너희의 시대를 살아라. 힘껏, 아주 힘껏.” 에스메렐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희와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까?”

“나는 내 마지막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 물어도 되겠습니까?”

“안 된다.”

“그럼 다음 행선지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엔디미온은 그것마저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부서진 검을 보며 말했다.

“성검을 찾으러 갈 생각이다.”

“성검은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내가 버렸으니까. 하지만 이제 다시 찾아야지.” 신디아의 검은 부서졌고 라가르디오의 창은 구부러졌다. 무기를 모두 잃었으니 이제는 부서지지 않을 튼튼한 무기를 찾아야 했다. 호수의 여왕이 있는 곳까지 가는데 분명 여러 위험이 닥칠 것이다. 로아니스나 뷔브르 같은 강력한 악마들을 상대하려면 반드시 성검이 있어야 했다. 엔디미온은 성검을 버렸던 곳을 찬찬히 떠올렸다. 에스메렐다가 말했다.

“마지막 물음입니다만 성배기사가 돌아왔다는 것을 함구해야 합니까?” 엔디미온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함구하라.” 하지만 엔디미온은 이들이 진실을 숨기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인간의 입은 가볍다. 대단한 진실을 숨기기에는 알맞은 금고가 아닌 것이다. 그래도 그냥 두었다. 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았는데 그게 숨겨지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의무를 행하자. 나는 나의 의무를, 너희는 너희의 의무를. 그리하면 분명 세상 모든 사악한 것들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스메렐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에스메렐다가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다. 엔디미온은 다시 입을 열었다. “에우레킬슨, 그림발드. 가까이 와라.” 이름을 불린 세 사람이 엔디미온에게 다가왔다. 엔디미온은 다른 성기사들을 모두 뒤로 물렸다.

“나는 너희 세 명이 신실한 신앙심과 불타는 정의감으로 이루어진 자들이란 것을 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의무를 부여하니 그것을 잘 수행해야 할 것이다.” 에스메렐다가 말했다.

“그것이 어떤 것입니까?”

“여명교단을 옳은 길로 이끌어라. 그림발드, 너는 경험 많은 자이고 에우레킬슨과 에스메렐다는 젊고 혈기가 넘치니 너희 셋이 함께 힘을 합치면 분명 할 수 있을 것이다.” 에우레킬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를 믿으십니까? 제가 감히 여명교단을 옳은 길로 이끌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에우레킬슨은 자신이 성배기사에게 했던 짓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고결한 자라고 불리면서 하는 짓은 고결하지 않았던 것이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수하지 않는 자는 없다. 실수가 나쁜 것이 아니라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한 번의 실수로 어찌 능력 있는 자를 내치겠는가.” 에우레킬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엔디미온은 이제 에스메렐다에게 말했다.

“마르딜레아를 잘 써먹어라. 돈이란 것은 창칼보다 위력적일 때가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림발드.” 그림발드는 정중히 대답했다.

“말씀하시지요.”

“너는 로게나 대교구장으로서 두 사람을 성심껏 돕도록 하여라. 나는 너희 셋을 믿으니 결코 실망시키지 마라.”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엔디미온은 이제 자신의 일행을 불렀다. 모두가 돌아온 영웅들을 쳐다보았다. 비다르는 더 경외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라이오넬은 아무 말도 없었다. 베로니카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어색함에 목을 움츠렸다. 엔디미온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한 채로 동굴 출구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자, 그러면 성검을 찾으러 가볼까.”

* * * 어두컴컴한 동굴 안이었다. 한때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지금은 전투의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동굴 안에 남아있는 것은 수많은 시체들뿐이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도 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수많은 시체와 고약한 냄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은 강력한 힘을 가진 악마의 영역이었고 목숨이 아까운 자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홀연히 나타난 자가 있었다. 남자라고 하면 작고 여자라고 하면 큰 키였다. 망토를 두르고 있어서 덩치를 가늠할 수 없었고 망토에 달린 모자까지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요정처럼 소리 없이 걸었으며 그럴 때마다 망토자락이 사르륵 소리를 냈다. 어두운 공간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소리였다. 하고자 한다면 망토자락 소리조차 내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 자는 일부러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왔다고 알리는 것처럼. 수많은 악마와 악귀들의 시체는 손님을 맞을 수 없었다. 방문자 역시 그들을 그냥 지나쳐서 빠르게 걸었다. 그 자는 거대한 악마들의 시체를 보고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둘 다 아는 악마들이었다. 하나는 사도왕 로아니스, 다른 하나는 뷔브르.

“꼴이 참 우습구나.”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듣기에 따라서 여자일수도 있고 남자일수도 있었다. 마법으로 변조된 것 같기도 했다. 들을 사람이 없고 대답할 사람이 없는데도 방문자는 다시 한 번 말했다.

“혼자서 성배기사를 해치울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꼴이 이게 무어냐?” 놀랍게도 대답이 돌아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뷔브르가 몸을 움찔거리며 말했던 것이다.

“······까불지 마라. 나 혼자서도 충분했어. 이 빌어먹을 로아니스만 아니었다면 말이야.”

“둘이서 성배기사 하나를 이기지 못한 거냐. 한심스럽군.”

“······닥쳐.” 방문자는 낮게 웃더니 손을 뻗어서 로아니스의 몸을 만졌다. 차갑게 식어서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로아니스는 죽었군. 멍청하기는 해도 제법 강했는데 아까워.” 방문자의 손에서 보라색 빛이 번쩍이더니 곧 로아니스의 몸 전체를 감쌌다. 보라색 빛이 점차 강해지면서 로아니스의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방문자는 악마의 힘을 흡수하면서 고양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 힘이 충만한 이 느낌! 중독될 것 같구나.”

“역겨운 짓거리는 내가 안 보는 곳에서 해라. 구역질나니까.”

“후후······.” 뷔브르는 힘겹게 몸을 들썩이며 말했다.

“너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전해라.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거라고. 성배기사만이 아니라 다른 영웅들까지 함께 돌아왔다고.”

“날 심부름꾼으로 쓸 셈이냐, 뷔브르?”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말에 뷔브르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아니, 내 몸이 이러니까 하는 말이지. 본래라면 내 부하에게 시켰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잖나.”

“깜찍한 변명이구나.” 뷔브르는 분노를 삭였다. 지금 아쉬운 것은 그였다. 성배기사에게 입은 상처를 회복하려면 방문자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보다 날 좀 도와주겠나? 몸이 너무 쑤시는군. 시간이 더 흐르면 죽을지도 몰라. 너도 알겠지만 다르디낭의 적자는 아주 중요한 전력이지. 내가 죽는 건 너한테도 손해일 거다.”

“아, 물론이지. 너처럼 강력하고 중요한 전력을 어찌 허투루 쓰겠어? 걱정할 것 없어, 뷔브르.” 방문자가 뷔브르의 몸에 손을 댔다. 이번에도 보라색 빛이 손끝에서 뿜어져 나왔고 그것이 뷔브르의 몸 전체를 감쌌다. 상처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사라졌다. 뷔브르는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힘을 느끼며 안도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고통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데 잃었던 힘이 돌아오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제야 이게 치유의 힘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뷔브르는 방문자의 손을 몸에서 떨어트리기 위해서 몸을 흔들었지만 손은 딱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방문자가 웃으며 말했다.

“네 힘은 너를 대신해서 내가 잘 써주마.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죽어라, 뷔브르.” 뷔브르가 더욱 세차게 몸을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몸 전체에서 힘이 더 빠르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고 힘이 뭉텅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건방진 것! 배신자의 본성을 숨기지 못하고 또 배신을 하는구나! 너 따위를 받아주는 것이 아니었다! 이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것아! 이 간악한 짓거리를 당장 멈추지 못······. 크억!” 방문자는 웃음소리를 흘렸고 뷔브르는 화가 나서 날뛰다가 힘을 모두 빨려서 죽고 말았다. 다시 한 번 느껴지는 고양감에 방문자가 몸을 떨었다. 정말로 중독될 것 같은 감각이었다. 방문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출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배신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내가 너희를 대신해서 바라던 것을 이루어주는데 어찌 배신이냐? 로아니스, 그리고 뷔브르. 너희들의 힘은 내가 대신 잘 써주겠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죽어라.” 방문자가 쿡쿡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모자 안으로 감추었던 머리카락이 조금 흘러내렸다. 그것은 탁한 금색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는 즐겁게 웃으며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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