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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86화 (86/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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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염된 땅이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대지는 거무죽죽한 색깔이었고 하늘은 마구잡이로 물감을 뿌린 것처럼 얼룩덜룩했다. 미지근한 바람은 오히려 서늘한 것보다 더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나무들은 모두 말라죽거나 아니면 기괴한 모습으로 자라났다. 나뭇가지에 열린 것은 먹음직스러운 과실이 아니라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인간의 것만이 아니라 난쟁이나 요정의 것도 있었다. 길 위에는 온갖 악귀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것들은 서로 공격하고 잡아먹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저급한 악귀들끼리 서로 물어뜯고 있으면 갑자기 커다란 악귀가 날갯짓을 하며 나타나 날카로운 발톱으로 악귀를 잡아채갔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악귀들조차도 살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곳. 라우렌시오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후······. 숨 쉬기가 힘들군.” 그는 망토의 끈을 단단히 여몄다. 이곳의 공기는 살아있는 생물에게 몹시 치명적이어서 맨살을 드러냈다가는 오염될 수 있었다. 백 년 전의 영웅도 조심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는 허리춤의 검을 단단히 잡으며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요정답게 발걸음 소리를 숨기는 법을 알았고 투명화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곳은 악마의 영역이었고 그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백 년 전의 영웅이라도 이곳에서 공격을 받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는 느낌이야······.”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금세 지쳤다. 성배기사로부터 신성한 힘을 나누어 받은 그는 강인한 체력을 가졌지만 이상할 정도로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라우렌시오는 어쩔 수 없이 바위 뒤에 숨어서 잠시 숨을 고르기로 했다. 수통을 열고 안에 든 것을 한 모금 마셨다. 온갖 약초와 함께 끓인 물인데 맛은 써도 몸에는 좋았다. 요정들이 본래 약초에 관심이 많은 것도 있었지만 라우렌시오는 살기 위해서 약초에 대해 공부했다. 그는 배신자라는 오해 때문에 다쳐도 신전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다치면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에 자연스럽게 약초에 대해 지식이 늘어났다.

“아이고, 이제 나도 나이 생각해야지. 몸이 옛날 같지가 않네.” 라우렌시오는 수통의 뚜껑을 닫고 바위 너머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악귀들이 저들끼리 싸우며 죽은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커다란 날개를 가진 악귀가 빙빙 돌고 있었다. 악귀들끼리의 싸움이 끝나면 시체를 먹으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다른 쪽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괜히 싸움에 휘말리면 위험하니까. 수통을 허리춤에 매달고 다시 이동했다. 한참 가다보니 이제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라우렌시오는 끄응 소리를 내며 허벅지를 한 번 주물렀다. 그리고 결심을 굳힌 것처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처럼 오르막길에서는 체력 소모가 더 빨랐다. 무언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

고 다리는 아래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점차 무거워졌다. 라우렌시오는 다시 수통의 물을 마셨다. 몸이 약간이지만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힘겹게 숨을 내뱉으며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딛은 그는 수많은 악귀들이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고서 얼굴을 굳혔다. 사실 들킬 가능성은 없었다. 그는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고 모습은 마법으로 감추었다. 냄새는 이곳의 진흙을 곳곳에 발라서 지웠다. 어쩌다 몸이라도 부딪히지 않는 이상 들킬 일은 없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 들킨다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게 뻔했다. 악귀들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소란을 감지하고 나타날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을 두려워했다.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움직였다. 바삭.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제기랄.” 라우렌시오는 너무 긴장한 탓에 바로 발밑에 있는 나뭇가지를 보지 못했다. 수많은 악귀들이 그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라우렌시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본능적인 감각에 의존해 달려들었다. 공격을 받은 라우렌시오의 망토가 찢어졌고 그것으로 투명화 마법이 해제됐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요술검이라고 불리는 무기는 고대의 유물 중 하나로 온갖 신비를 부렸으며 결코 부러지지 않았다.검을 한 번 휘두르자 갑자기 불꽃이 일어나 악귀들의 접근을 막았고 그 사이에 라우렌시오의 마법이 발사됐다. 수십 개의 창칼들이 바닥에서 솟아올라 악귀들의 몸을 관통했다. 순식간에 악귀 대여섯 마리를 해치웠으나 악귀들은 겁을 먹기는커녕 더 흥분해서 달려들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라우렌시오가 검으로 악귀들을 베었다. 그는 상당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유물의 힘이나 본인이 가진 마법에 기대지 않아도 충분히 이 악귀들을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검은 한 번에 하나씩만 죽일 수 있었고 마법은 한 번 부리는 것만으로 여러 마리를 죽일 수 있었다. 효율을 따지자면 뛰어난 검술 실력을 자랑하는 것은 사실상 비효율적인 일인 것이다. 요술검이 빛을 발하며 바위로 벽을 만들었다. 그것은 등 뒤에서 공격하는 악귀들을 막았고 이번에는 라우렌시오의 오른손이 빛났다. 거기서 냉기가 뿜어져 나가 악귀들을 얼렸다. 그 다음은 검으로 내리쳐서 얼어붙은 머리를 깨버리면 될 일이었다. 눈 몇 번 깜빡일 시간에 수십 마리의 악귀들을 모두 죽인 라우렌시오는 검을 겁집에 꽂으려다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오른쪽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몸이 사라졌다. 그것과 동시에 등 뒤쪽에 있던 바위의 벽이 박살나고 악마 한 마리가 나타났다.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가 철퇴에 맞고 박살났다.

“재빠르구나!” 라우렌시오는 악마의 외침을 들으며 다시 한 번 마법을 사용했다. 짧은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는 마법은 그가 수많은 전장에서 이름을 떨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그의 목숨을 수십 번이나 살려준 마법이었다. 빠르게 악마의 뒤쪽으로 이동해서 허리를 찌르고 검을 비틀어 상처가 더욱 벌어지게 했다. 두 발로 걷는 소처럼 생긴 악마는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홱 돌렸다. 반사적으로 상처가 크게 벌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철퇴를 휘두르자 라우렌시오는 허리를 숙여서 피했고 그 다음에는 검으로 오금을 베었다. 악마가 몸을 휘청거리자 불타는 검으로 심장을 찔러 일격에 숨통을 끊었다. 악마라고 해도 라우렌시오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그는 수십 마리의 악귀들과 악마 하나를 쓰러트리고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이미 들켰으니 이제 빨리 자리를 떠야 했다. 당장 도망치는 것이 옳은 선택이지만 그는 오히려 정면으로 나아갔다. 아직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온 것은 이 땅의 주인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라우렌시오는 다시 투명화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고서 빠르게 이동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길을 가다가 만난 악귀들은 모두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저급한 악귀들 따위가 투명화 마법을 알아차렸을 리는 없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라우렌시오는 마법으로 악귀들을 태우고 몸을 터트리며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등 뒤로는 두 마리의 악마가 악귀들을 이끌고 나타나 있었다.

“이 사악한 것들! 비켜라!” 요술검이 빛을 발하는 것과 동시에 수많은 악귀들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고 악마 하나의 어깨가 잘려나갔다. 그것을 신호로 싸움이 시작됐다. 라우렌시오는 일단 어깨가 잘린 악마부터 해치우기로 했다. 왼손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반투명한 화살이 날아가 악마의 눈을 관통했다. 그 사이에 마법으로 악마의 뒤로 이동해 허리를 베었다. 악마 한 마리를 죽이고

그 곁에 있던 악마 역시 마법으로 다리를 얼린 후에 힘차게 뛰어올라 목을 잘라서 죽였다. 그 다음은 요정답게 우아한 착지로 마무리했다. 악마들이 상대가 되지 않는데 악귀들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라우렌시오를 이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는 마법과 검술을 사용하여 수많은 악귀들을 모두 해치웠다. 그는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청년의 모습이었지만 그건 마법에 의한 거짓된 모습일 뿐이었다. 몸 자체는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 요정다운 날렵한 몸놀림도 사실 그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지친 탓인지 감각이 무디어졌다. 라우렌시오는 악귀들에게 입은 자잘한 상처들에 혀를 찼다. 그는 붕대와 약초가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들리는 쿠르릉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번개라도 칠 것처럼 하늘이 어두워졌고 바람의 세기가 달라졌다. 기분 나쁠 정도로 미지근했던 바람은 이제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무언가 온다. 그것을 깨달은 그가 미간을 좁혔다.

“요정기사 라우렌시오.” 목소리는 하늘에서 들렸다. 그것만으로 지상의 모든 것들이 두려워했다. 하늘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처럼 모두가 모습을 숨겼다. 오직 라우렌시오만이 똑바로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라, 이 간악한 것아!”

“겁도 없이 지껄이는구나.” 우르르 쾅! 하늘에서 번개가 치며 세상을 창백한 빛으로 물들였다. 라우렌시오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슬며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거대한 악마였다. 그것은 몸이 길쭉하고 매끈했으며 수많은 다리들을 가지고 있었다. 다리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는 것은 마치 흡반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수많은 입들이었다. 눈은 몸통 중앙에 세로로 길게 찢어진

것 하나뿐이었다. 전체적으로 악마답게 구역질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악마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창백한 빛이 번쩍였다. 라우렌시오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너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백 년을 방랑했다. 내가 널 죽여야 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오, 저런. 불쌍한 라우렌시오. 누명을 썼다고? 참 딱하기도 하구나. 그런데 누명을 썼으면 범인을 잡으러 가야지 왜 날 찾아온 것이냐.”

“네가 바로 그 범인이니까.”

“내가? 으하하하하! 너는 참 가엽고 귀엽구나. 내가 너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그래, 분명히 말해서 내 특기는 인형을 만드는 것이고.” 악마가 다리 하나를 들어 올리자 거기서 끈쩍한 점액질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곧 형상을 갖추어 라우렌시오의 모습이 되었다. 아무런 색이 없는 조각상 같은 모습이었으나 분명히 라우렌시오였다.

“너를 닮은 인형을 하나 만들어주기는 했으나 내가 너에게 누명을 씌운 것은 아니다. 이건 내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단순한 인형일 뿐이고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게 하려면 다른 힘이 있어야하지. 너도 알겠지만 그건 내 능력이 아니다.” 악마는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 네가 진실을 알았을 때의 얼굴이 기대가 되는구나. 라우렌시오, 이 멍청한 것. 백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멍청해······.” 라우렌시오의 검집이 빛나더니 거기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악마의 다리 하나가 잘려나갔다. 눈 깜짝할 새에 검을 뽑은 라우렌시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는 걸 전부 말해.”

“내가 왜 그래야하지? 으흐흐흐, 멍청한 것. 그리고 너 혼자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물론이지! 덤벼라! 내가 널 토막내주마!”

“영웅이란 것들이 다 그래. 자기가 잘난 줄 알지. 하지만 가여운 라우렌시오, 너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너는 날 이길 수 없어. 네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기분 나쁘게 꿈틀거리는 다리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 그리고 자세히 보라는 듯이 바닥에 툭 던졌다. 그것은 난쟁이였다. 두꺼운 근육과 덥수룩한 턱수염을 가진 난쟁이. 일면식이 있었다.

“설마······.”

“네 오랜 친구를 다시 보니 어떠냐? 한때 영웅이라 불렸던 자도 내 상대는 되지 않는다.” 라우렌시오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 난쟁이는 그가 아는 자였다. 백 년 전에 영웅이라 불리던 자, 거대한 도끼로 악마들의 머리를 쪼개던 자, 성배기사와 함께 대악마 다르디낭을 무찔렀던 자. 위대한 난쟁이 전사 칼라딘이었다.

“······이 증오스러운 악마야. 나는 널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라우렌시오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의 주변으로 수많은 악마와 악귀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는 냉정해져야 했다. 당장의 분노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그는 살아야했고 그래서 성배기사에게 악마가 있는 곳을 알려야 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라우렌시오는 요술검을 머리 위로 들었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처절하게 외쳤다.

“번쩍여라!” 빛이 번쩍이고 라우렌시오의 모습이 사라졌다. 악마와 악귀들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친 영웅을 뒤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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