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88화 (88/199)

88

가짜 성배기사 일당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배기사의 이름을 대면 두려워하며 짐을 바치고 달아났다. 하지만 이들은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었고 오히려 덤비라고 도발하고 있었다. 거짓말은 들통이 났고 도망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니 그들은 무기를 손에 들고서 엔디미온 일행을 겨누었다.

말라깽이 남자가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것을 보고 좀 놀랐지만 사실 그의 체격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 건방진 놈! 하는 짓을 보니 분명 악마의 하수인이로구나! 성배기사로서 널 용서하지 않겠다! 모두 공격해!”

가짜 성배기사를 선두로 자칭 성배기사단이 돌격했다. 엔디미온은 다른 사람은 나서지 말라는 듯이 손을 들어보였다. 그는 손목을 가볍게 빙글빙글 돌리다가 제일 먼저 다가오는 적을 향해서 주먹을 날렸다. 검을 든 남자는 무기를 한 번 휘둘러보기도 전에 주먹에 맞고 나자빠졌다.

그 다음도 똑같았다. 달려드는 적을 향해서 주먹을 날리고 뒤로 쓰러지는 몸을 붙잡아서 다른 적에게 휘두르듯 던졌다. 다른 남자 하나가 비명 같은 기합을 지르며 도끼를 휘둘렀다.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도끼날을 박수를 치듯 손바닥으로 잡아내자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도끼를 뒤로 잡아당기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무심하게 손바닥에 힘을 주어 도끼날을 유리 깨듯 부숴버렸다. 사람이 맨손으로 도끼날을 부수는 것을 보고서 남자는 거의 기절할 만큼 놀랐다. 이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도망치려 했지만 그 전에 얼굴에 주먹이 꽂히는 것이 먼저였다.

“너 하나 남았군.”

“······너, 너, 감히 성배기사에게 덤비고도 무사할 줄 알아?”

“이런 상황에서도 성배기사 타령이냐? 괘씸해서 안 되겠군.”

엔디미온이 얼른 덤비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얼굴이 빨개진 가짜 성배기사가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두꺼운 다리를 보면 양치기나 그런 일을 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양을 지키고 돌보는 것은 보통 체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체격을 보면 힘도 상당할 것이다.

그가 가짜 성배기사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덩치와 힘 덕분일 것이다. 아무리 입으로 성배기사라고 떠들어봤자 힘이 없으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창을 휘두르는 자세를 보면 저런 무기를 자주 써본 적이 있는 듯 했다. 아마 양치기 일을 할 때 막대를 무기처럼 썼겠지.

“죽어라!”

엔디미온은 이제 적에 대한 탐구는 그만 두었다. 첫 공격은 찌르기였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가짜 성배기사는 엔디미온의 접근을 막기 위해 곧바로 창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그 다음에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창을 찔렀다. 빠르게 여러 번 찌르는 창은 제법 위협적이었으나 엔디미온에게는 그저 느리게 보일 뿐이었다.

그는 날아오는 창을 겨드랑이에 끼워 단단히 붙잡았다. 가짜 성배기사가 당황해서 어어 소리를 냈다. 그 사이에 훌쩍 거리를 좁혀 주먹을 날렸다. 부하들이 모두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것과 달리 그래도 대장이라고 가짜 성배기사는 고개를 돌려 공격을 피했다. 그는 창을 회수하는 것을 빠르게 포기하고 곧장 격투 자세를 잡았다.

기합을 지르며 날리는 주먹은 묵직했지만 단 한 대도 엔디미온에게 맞지 않았다. 커다란 동작은 오히려 빈틈이 되었고 엔디미온에게 반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배에 주먹이 한 번 꽂히고 그 다음에는 얼굴에 꽂혔다. 엔디미온은 컥컥 소리를 내고 있는 가짜 성배기사의 턱을 후려쳤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어나고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가짜 성배기사는 몸을 비틀거리다가 나무에 몸을 기댔다. 거친 숨을 내뱉는 그를 향해 엔디미온이 말했다.

“네가 널 때리는 것은 성배기사를 사칭했기 때문이 아니다. 성배기사랑 안 닮은 게 괘씸해서야.”

“그게 무슨······.”

가짜 성배기사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주먹에 맞고 쓰러졌다. 엔디미온은 손을 탁탁 털고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식사를 시작하는 그를 보고 베로니카가 이죽거렸다.

“화 안 낸다면서요?”

“양심적으로 너무 안 닮았잖아.”

“웃겨, 진짜.”

베로니카가 킬킬 웃는 것은 무시하고서 엔디미온은 식사를 마저 끝냈다. 다른 사람들도 식사를 끝내고 뒷정리를 했다. 모닥불의 불길은 거의 사그라져서 이제 회색의 재와 보석처럼 반짝이는 불씨만이 남아있었다. 엔디미온은 불길을 살리기 위해서 마른 나뭇가지를 몇 개 모닥불 안으로 던졌다. 부채질을 몇 번 해주자 다시 불길이 살아났다.

그들은 불침번을 정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밤이 되어도 악마나 악귀가 습격하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그들은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고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나왔다. 새가 울기 시작하고 새벽이슬이 머리 위로 한 방울 툭 떨어졌다. 마지막 불침번이었던 비다르를 제외하고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은 엔디미온이었다.

농사는 부지런해야 한다. 백 년 동안 몸에 익은 농부로서의 마음가짐은 그를 근면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엔디미온은 근처의 개울로 가서 세수를 하고 왔다. 그 사이에 다른 사람들도 잠에서 깼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다시 성검을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본래 목적지였던 호수의 여왕에게 가는 길로부터 조금 벗어나겠지만 그래도 성검은 찾아야 했다. 말 위에서 베로니카가 졸린 듯 하품을 했다.

엔디미온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주변을 확인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 아니라면 오늘 저녁이 되기 전에 마을이 나와야 했다. 거기서 하루를 보내고 마을 근처에서 성검을 수색하고 없으면 다음 마을로 떠날 생각이었다.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다. 어제처럼 성배기사를 사칭하는 자들이 나타나지 않았고 악마나 악귀도 나오지 않았다. 탁 트인 개활지를 말을 타고 달리는 것도 처음에나 즐거울 뿐이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풍경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정신을 쉽게 지치게 했다.

정오가 되었지만 점심은 그냥 달리는 말 위에서 해결했다. 시간을 아껴서 빨리 마을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말린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을 몰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말이 더운 콧김을 뿜어냈다. 가을답게 해가 빨리 졌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마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말의 배를 세게 찼다. 말이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더 빠르게 달렸다. 덕분에 밤이 되기 전에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여관부터 찾아보자고.”

작은 마을이었기에 여관은 사실상 주점에 가까웠다. 방이 두어 개 있기는 하지만 도시의 것과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마구간에 말을 맡기고 말들을 잘 챙겨주라고 마구간지기에게 돈을 주었다. 그가 웃으며 말들을 마구간 안으로 몰고 들어갔다.

여관에서 방값을 치르고 나서 저녁 식사를 했다. 술을 시키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없었다. 본래 이런 작은 마을에서 유흥이라고는 하루를 끝내고 다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여관에 사람들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길 위에서 북적거리고 있었다. 마치 축제라도 하려는 것처럼. 엔디미온은 여관 주인에게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여관 주인이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오늘 우리 마을에 성배기사님이 오셨잖어? 우리 마을 주변의 악귀들을 싹 죽이러 가셨는데 조금 있으면 돌아올 거여. 지금 다들 성배기사님께 감사 인사하려고 다 모여 있는 거여.”

엔디미온은 이 마을에 방금 전에 들어왔다. 그리고 악귀들을 죽이러 가지도 않았다. 그럼 지금 여관 주인이 말하는 성배기사는 엔디미온이 아니었다. 또 사칭이야? 엔디미온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요즘 성배기사를 사칭하는 자들이 많다던데 이 마을에 온 자가 정말 성배기사요?”

“말조심혀! 우리 마을에 온 사람은 진짜 성배기사란 말여!”

“성배기사를 생전 본 적도 없을 건데 그 사람이 진짜인지 아닌지 어찌 믿소?”

“어허, 그냥 딱 보면 알어. 성배기사처럼 생겼어. 그리고 혼자서 악귀들을 다 죽이는데 그게 성배기사 아니면 뭐여?”

다른 가짜 성배기사들이 순진한 사람들을 속여서 돈을 뜯어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래도 이 가짜 성배기사는 성배기사다운 선행을 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감격해서 흥분하고 있겠지.

엔디미온은 그 가짜 성배기사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조금 있으면 돌아온다고 하니 나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맥주잔을 단숨에 비운 후에 식탁 위에 동전을 몇 개 던졌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자 일행들도 뒤를 따랐다.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서 성배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삼십 분 정도 기다렸을까. 멀리서 빛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아마 가짜 성배기사일 것이다.

엔디미온은 발달된 시력은 어둠을 넘어서 가짜 성배기사의 모습을 제일 먼저 발견할 수 있었다. 가짜 성배기사는 손에 자루를 들고 있었는데 바닥에 질질 끌리는 것을 보면 그 안에 무언가 많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구역질나는 냄새.

자루 안에 든 것은 분명 악귀들의 머리일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전공을 보여주기 위한 증거. 마을 사람들도 이제 가짜 성배기사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환호하면서 성배기사의 영웅담을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마을 전체가 축제라도 벌어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베로니카가 엔디미온을 툭 치며 말했다.

“그래도 어제 만났던 그 가짜보다는 낫네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이번에 만난 가짜 성배기사는 덩치만 제외하면 그런대로 엔디미온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엔디미온처럼 듬직한 느낌은 없었지만 날렵한 몸매 덕에 잘 싸울 것처럼 보였다.

엔디미온은 여관 주인의 말을 이해했다. 저 가짜 성배기사는 괜찮은 생김새를 가졌고 대가 없이 악귀들을 처리해주기까지 했으니 순박한 사람들이 진짜 성배기사라고 믿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저 자가 성배기사를 사칭했더라도 나쁜 일을 하는 게 아니라면 엔디미온도 딱히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그는 만족하며 돌아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눈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모두 걱정하지 마시게! 악귀들은 모두 내가 처리했으니! 이제 악귀들의 습격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네! 나, 성배기사 앤드루가 보장하리다!”

비다르가 웃었다.

“저 자식은 성배기사의 이름도 모르는 모양인데?”

엔디미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앤드루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장식도 없는 보통의 검집이었다. 갈색의 검집은 낡았으나 검은색 손잡이는 눈썰미가 있다면 상등품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앤드루의 이름을 연호하자 가짜 성배기사는 흥이 나서 검을 뽑아들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들어 올린 검은 창백한 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그 순간 모두가 경건해졌다. 저 검은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엔디미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성검이었다. 자신이 버렸던 바로 그 성검.

“아니, 저거 아무나 들 수 있는 게 아니라면서요?”

베로니카가 말하자 엔디미온이 입술을 씹었다.

“······아내를 빼앗긴 남자의 심정이 어떤 건지 알아?”

“전 여자라서 모르겠는데요? 애초에 결혼도 안 했고.”

“나도 몰라. 그런데 지금 딱 그런 기분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