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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89화 (8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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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베로니카가 배를 잡고 웃었다. 엔디미온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악마인 뷔브르나 로아니스를 상대할 때도 저런 얼굴을 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정말 아내를 빼앗긴 남자처럼 심각했다.

한참 웃던 베로니카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친 뒤에 슬쩍 엔디미온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고 여차하면 힘으로 뺏으려고 들 것 같아서 베로니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여기서 저 사람 때려눕히고 뺏으면 안 되는 거 아시지요?”

“난 그런 생각은 안 했는데. 그런데 네 말을 들으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힘으로 뺏는 건 상관없는데 좀 조용한 곳에 가서 하세요.”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검을 뺏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저 가짜 성배기사가 무슨 수로 성검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봤자 가짜일 뿐이다. 엔디미온이 뺏으려고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뺏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기에는 마을 사람들의 눈이 신경 쓰였다. 저들은 앤드루를 진짜 성배기사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데 그들이 보는 곳에서 앤드루를 쓰러트리면 어찌 되겠는가. 엔디미온은 귀찮은 일에 휘말릴 생각이 없었다.

“성배기사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안심하고 마을 주변을 돌아다닐 수 있겠습니다.”

청년 한 명이 앤드루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앤드루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숨을 쉬었다고 칭찬을 받는가?”

“네? 무슨 말씀이신지······.”

“나한테 악귀들을 죽이는 것은 숨 쉬는 것과 같은 일이란 소리일세. 어찌 숨만 쉬었는데 칭찬을 받겠는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일세.”

“아, 네에······.”

청년은 떨떠름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앤드루는 이제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다들 승리를 축하하러 가세! 다 함께 축배를 들자고!”

앤드루가 여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자 다른 사람들도 환호하며 뒤를 따랐다. 이 마을에 술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유일한 유흥이기 때문이었다. 앤드루와 사람들은 여관으로 향했고 엔디미온 일행만이 뒤에 남아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있는 엔디미온을 향해서 비다르가 이죽거렸다.

“야, 성검 아무나 들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어? 그런데 왜 아까 그 자식이 들고 있냐? 사실은 네가 가짜인 거 아냐?”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

“무슨 가능성?”

“첫째, 저 사람이 진짜 신실한 믿음과 의무에 대한 헌신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

“그럼 두 번째는?”

“자기가 성배기사라고 믿는 망상증 환자일 가능성.”

“아니, 그럼 너는 그 망상증 환자한테 성검을 빼앗긴 거냐?”

비다르가 배를 잡고 웃었다. 엔디미온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자 베로니카가 말했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에요? 저 사람한테 성검을 그냥 맡겨둘 수는 없잖아요?”

“기회를 봐서 돌려받아야지. 방법은 일단 차차 생각하자고. 일단은 우리도 여관으로 돌아가자.”

엔디미온 일행은 여관으로 돌아가자 벌써 술자리가 거하게 벌어져 있었다. 여관 주인은 고이 보관하고 있던 귀한 술까지 내왔고 급사가 바쁘게 돌아다니며 술과 안주를 나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앤드루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셨다. 마을 축제 같은 흥겨움이었다.

숟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는 사람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엔디미온 일행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가만히 기다렸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취하고 있었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잠들었다. 언젠가 앤드루가 혼자 남게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럼 그때 말로 잘 타일러서 성검을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아니면 앤드루가 술에 취해서 잠들었을 때 성검을 가져가도 된다. 도둑질 같은 짓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앤드루가 딱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한테 하듯 때려눕히고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부어라! 마셔라! 하하하! 술을 더 가져오게!”

술을 마시는 모습은 가히 호걸의 기상이었다. 앤드루는 취하지도 않고 물을 마시듯 술병을 비웠다. 지켜보던 비다르가 감탄했다.

“저 자식은 취하지도 않나? 몇 병째야 지금?”

“성검 때문이야. 성검의 힘이 취하는 걸 막아주고 있는 거야.”

엔디미온은 턱을 괴고서 침착하게 기다렸다.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이제는 진짜 술꾼들만 남아서 서로 주량 대결을 했다. 상황을 보니 금방 끝날 것 같지가 않아서 베로니카가 먼저 자러가겠다고 했다. 그 뒤를 이어서 라이오넬도 떠났고 비다르는 남은 안주를 집어먹다가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남은 것은 엔디미온뿐이었다. 그는 인내심 있게 술꾼들의 술자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앤드루와 다른 두 사람은 상당한 양의 술을 마셨지만 결국 먼저 취해서 쓰러지는 것은 마을 사람 두 명이었다. 그들이 쿵 소리를 내며 식탁 위에 얼굴을 떨구자 앤드루가 혼자서 눈을 껌뻑거렸다.

혼자서 잔을 채우는 손이 전혀 떨리지 않는 것을 보면 전혀 술에 취하지 않은 것 같은데 눈을 보면 안개가 낀 듯 몽롱한 것이 정말 망상증 환자 같아 보였다. 아득히 멀리 있는 곳을 보는 두 눈에는 기이한 이채가 감돌았다.

엔디미온은 어째서 저 남자가 성검을 들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검이 요구하는 자격이란 가혹한 것이라서 범인은 감히 갖출 수가 없다.

신실한 믿음과 의무에 대한 열정. 말로만 들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행하는 것은 어렵다. 아무도 가시면류관을 머리에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보기에는 그럴듯해도 머리에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신실한 믿음이란 것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전능자의 뜻에 따르려고 하는 강철의 의지이며 의무에 대한 열정은 항상 침착하고 냉정하게 해야 할 일에 대해서만 집중하는 차가운 불꽃과 같다.

그래서 범인은 감히 성검을 들 수가 없는 것이다. 머리 위에 쓴 관 때문에 상처가 생겨도 웃을 수 있는 것은 고통을 모르는 광인뿐이니까. 오직 순수한 광인만이 성검을 들 수 있다. 엔디미온이 성검을 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다. 악마들이 그를 향해 호수의 여왕을 위한 인형이라고 하는 것처럼 오직 의무에만 미쳐있으니까.

“안녕하시오.”

엔디미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앤드루에게 갔다. 그리고 잔 하나를 내밀었다. 눈만 껌뻑거리던 앤드루는 이제야 엔디미온을 발견한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술로 잔을 채웠다.

“아, 아직 남은 사람이 있었을 줄은 몰랐군. 그래, 자네는 이름이 무엇인가?”

“엔디미온이오.”

“아, 엔디미온. 나는 앤드루일세.”

“아까 들었소.”

“그래? 그럼 일단 한 잔 하지.”

두 사람은 잔을 비웠다. 엔디미온은 생각 이상으로 독한 술에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술 한 잔을 마신 앤드루는 자기 혼자 떠들어댔다.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던 자인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악마와 악귀들을 죽였는지, 그리고 다음에는 어디로 갈 것인지.

엔디미온은 모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대충 흘리고 있었는데 앤드루가 성검을 집어 들며 말했다.

“혹시 이게 무엇인지 아나? 이건 성배기사의 증거인 성검일세! 그 어떤 것도 종잇장처럼 자르고 결코 날이 나가지 않지. 이 검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 나는 내 운명을 깨달았다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네!”

진짜로 벼락을 맞아서 미친 건 아닐까. 엔디미온은 조용히 땅콩 하나를 집어먹었다.

“나는 내가 농부인 줄 알았네. 농사나 짓다가 적당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은 아들 두 명에 딸 한 명 정도 낳으려고 했었지. 왜 딸은 한 명인데 아들은 두 명이냐면 아들이 두 명은 있어야 농사일이 수월할 것 같았거든. 딸은 아내의 일을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고. 아니, 생각해보니 딸 하나는 너무 외롭겠군. 두 명이 낫겠어.”

어쩌라고. 엔디미온은 두 번째 땅콩을 집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운명은 농부가 아니었던 거야. 놀라운 일이지. 성검을 딱 보는 순간 깨달았네. 나는 농부가 아니었어. 나는 성배기사였던 거야!”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정말 광인 같아서 엔디미온이 움찔했다. 앤드루는 흥분해서 외쳤다.

“난 성배기사였어! 아니, 정확히 말해서 성배기사의 환생이었던 거야!”

아니, 진짜 성배기사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엔디미온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난 바로 여행길에 올랐지. 내 운명이 나를 이끌고 있으니 어찌 거부하겠나? 그건 내 운명이자 의무였던 거야. 그 뒤로 성검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돕고 다녔다네. 사람들은 성배기사가 돌아왔다고 환호하며 기뻐했지. 난 이 세상 사람들의 희망이야. 모두에게 희망의 불꽃을 전해주어야 하지. 내일이면 또 다른 마을로 떠나야 해.”

엔디미온은 그 말을 무시하며 말했다.

“혹시 그 성검 좀 만져볼 수 있겠소?”

앤드루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든 성검은 진짜 주인에게 돌아가야 했다. 비록 무시당했지만 앤드루는 화를 내지 않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성검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엔디미온이 그것을 잡으려고 하자 앤드루가 말했다.

“조심하게. 그거 아무래도 나 말고는 아무도 들 수 없는 모양이야.”

“걱정하지 마시오. 나라면 분명 들 수······.”

엔디미온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는 성검을 잡고 있다가 다시 손을 뒤로 가져왔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며 바지에 손을 문질렀다.

“크흠, 물기가 있어서 그런가······.”

다시 한 번 성검을 잡았다. 들려고 했다. 안 들렸다. 왜지? 씨발, 이거 왜 안 들려? 성검은 아무리 들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성검이 약간 움찔거렸다. 성검에는 입이 없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날 버렸으면서 이제 와서?

“으하하핫! 내가 말했잖나! 그건 나 말고는 아무도 들 수 없다고! 하하핫!”

엔디미온은 호탕하게 웃는 앤드루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다가 참았다. 그는 한숨을 내뱉고서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오직 등잔의 불빛에만 의존하고 있던 여관 안이 갑자기 환하게 빛났다. 그 빛은 엔디미온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찬란한 후광은 그를 신성하게 만들었고 감히 쳐다볼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앤드루는 눈이 부시지도 않은지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나는 성배기사 엔디미온이다. 네가 들고 있는 그 검은 본래 나의 것이고 나는 성배기사로서의 의무를 위해 그것을 돌려받아야겠다. 네가 성배기사를 자처하며 그 의무를 대신하려고 한다면 그럴 것 없다. 마땅히 해야 하는 자가 의무를 다할 것이니까.”

고귀한 목소리와 신성함이 느껴지는 후광. 누가 보아도 성배기사의 모습이었다. 앤드루는 한참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그럼 자네가 내 전생인가?”

“······헛소리 작작 해.”

엔디미온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성배기사는 애초에 죽지도 않았어. 그리고 너도 성배기사의 환생 같은 게 아니고. 너는 그냥 망상증 환자고 성배기사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성검 덕분일 뿐이야. 이제 알겠으면 이건 내가 가져가겠다. 왜냐하면 이건 본래 내 검이니까.”

“하지만 못들잖나?”

“······이 멍청한 검이 잠깐 주인을 까먹은 것뿐이야. 곧 다시 들 수 있게 될 거라고. 너만 없어지면 돼. 그러니까 내일 아침이 되면 얼른 사라져.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나 지으라고. 호밀 농사는 짓지 말고. 이건 경험에 의한 충고야.”

앤드루가 얼굴을 찡그렸다.

“웃기는 자로군. 내가 이 성검을 들었다는 것 자체가 성배기사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다는 증거인데 내가 왜 자네에게 검을 줘야 하나? 설령 자네가 정말 백 년 전의 그 성배기사라고 해도 지금 성검을 들 수 있는 것은 나일세. 누가 진짜 성배기사인지는 명확한 것 아닌가?”

논리적인 말이었다. 엔디미온은 마찬가지로 얼굴을 찡그렸다.

“이봐, 내가 힘으로 빼앗기 전에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가. 네가 성검을 들었다고 해도 날 이길 수는 없어.”

“내가 진다고?”

“그래.”

앤드루의 두 눈이 흐리멍덩하게 변했다.

“왜?”

“왜기는 왜야. 내가 진짜 성배기사니까. 가짜가 진짜 흉내를 낸다고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진다는 게 뭐지?”

“뭐?”

흐리멍덩하던 눈에 광기가 서렸다.

“진다는 게 뭐지? 나한테 승리란 숨 쉬는 것과 같았다! 그럼 진다는 건 숨을 참는 것인가? 뭐지? 대체 뭐지? 나는 패배를 알고 싶다! 숨을 참는다는 감각을 알고 싶다! 숨은 어떻게 참는 거지?”

미친놈인가? 엔디미온은 의자를 약간 뒤로 빼고서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알겠으니까 일단 진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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