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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두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앤드루가 여관 사람들을 다 깨울 것 같았다. 엔디미온은 다시 한 번 진정하라고 말한 뒤에 그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쭉 들이켜고 진정해.”
“으음.”
앤드루는 시키는 대로 술잔을 비운 뒤에 다시 얌전해졌다. 엔디미온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말했다.
“진정한 것 같으니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고. 나는 성배기사 엔디미온이고 그 검이 있어야 해. 네가 만약 성검을 여기 두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할 의향이 있다. 난 금화가 아주 많거든. 백 개? 이백 개? 말만 해. 그만한 돈이면 고향에 돌아가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거야.”
엔디미온의 손가락에서 금반지가 반짝거렸다. 자엘라 영주에게 받은 반지였다. 저것을 가지고 은행에 가면 금화를 찾을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무려 금화 천 개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백 개 정도는 그냥 정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성검을 되찾는데 금화 따위야 별 거 아닌 대가였다.
“아니, 난 돌려주지 않겠네. 어쨌거나 지금 성검의 주인은 나니까. 설령 금화 만 개를 가지고 오더라도 돌려주지 않을 걸세. 지금의 성배기사는 나일세.”
이래서야 이야기가 끝이 없을 듯 했다. 엔디미온은 결국 마지막 수단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그럼 바깥으로 나와. 누가 진정한 성배기사인지 승부를 가리자. 진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내가 가르쳐주지.”
“기사는 걸어오는 싸움으로부터 결코 도망치지 않지. 받아들이겠네! 가세나!”
앤드루가 벌떡 일어나서 엔디미온의 뒤를 따랐다. 꿈쩍도 않던 성검이 그의 손에 의해 가볍게 들리는 것을 보자 엔디미온은 입맛이 썼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검의 지금 주인은 앤드루였다.
“조용한 곳으로 가지.”
남들이 오지 않을 만한 곳, 싸움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한 곳을 찾아서 두 사람은 마을 주변을 돌아다녔다. 이런 늦은 밤은 악귀들이 활동하는 시간인데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앤드루가 모두 정리한 덕이었다.
“여기가 괜찮겠군. 그런데 무기도 없이 괜찮겠나?”
적당한 공터에서 앤드루가 성검을 뽑았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나온 성검은 몹시도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전능자가 별을 녹여 만들었다는 전설이 거짓이 아닌 것처럼 은은한 빛을 뿜어내며 주변의 공기를 따스하게 만들었다.
그리운 느낌이었다. 엔디미온은 착잡한 심정으로 성검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나보고 널 죽이란 소리냐.”
“자신감이 넘치는 자로군. 자, 그럼 승부다! 누가 진정한 성배기사인지 한 번 가려보자고!”
자신감은 내가 아니라 네가 넘치는 것 같은데. 엔디미온은 한숨을 내뱉은 후에 전투 자세를 잡았다. 슬쩍 앤드루를 보니 영 엉거주춤한 자세로 검을 잡고 있었다. 공격을 우선하는 자세도 아니고 방어를 우선하는 자세도 아니었다. 가슴은 여기를 찔러달라는 듯 훤히 열려있었고 머리 가까이 들고 있는 검은 오히려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초심자였다. 검술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앤드루는 본래 농부였고 검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니까. 보아하니 낙승일 게 뻔했다. 엔디미온은 긴장도 되지 않는 싸움에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그럼 내가 먼저 가겠네! 흐아압!”
정직하게 머리를 노리는 검.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공격은 가장 간단하고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허점도 많았다. 엔디미온은 고개만 살짝 움직여서 가볍게 공격을 피하고 거리를 좁혀서 앤드루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맞지 않았다. 주먹은 앤드루는 마치 그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피한 뒤에 곧장 반격했다. 아주 빠른 움직임이었다. 검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농부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성배기사를 상대로. 아무리 엔디미온이 힘을 빼고 날렸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앤드루가 휘두른 검이 간발의 차로 엔디미온의 가슴을 스쳐지나갔다. 저번에 악마들과 싸운 이후로 갑옷을 새로 구하지 않아서 그는 지금 일상복 차림이었다. 성검의 날카로움은 살짝 스친 것만으로 옷을 찢고 그 아래의 단단한 근육에 상처를 남겼다. 핏방울이 몽글몽글 맺히는 것을 보면서 쯧 하고 혀를 찼다.
성배기사는 성검의 날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 성검은 베지 말아야 할 것에 결코 날을 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사악한 것들과 의롭지 못한 것들을 벨 때만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그들을 벌했다.
그런데 방금 엔디미온이 그 성검에 베였다. 이건 성검이 그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잽싸군! 하지만 너무 움직이지 말게! 사실 나도 힘이 너무 넘쳐서 내 자신이 주체가 안 되거든! 내가 자네 몸 어디를 잘라버릴지도 몰라!”
엔디미온은 입술을 짓씹으며 앤드루의 움직임을 보았다. 역시나 엉성하다. 하지만 엔디미온의 공격은 단 한 대도 그에게 닿지 않았다. 유효타는 오히려 앤드루가 내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전부 엉성한데 이상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초심자의 행운일까?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이 오히려 움직임을 읽을 수 없어서 위협적인 것일까?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가끔씩 성검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럴 때마다 앤드루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잽싸게 움직였다.
‘이 괘씸한 놈이······.’
엔디미온은 확신했다. 성검이 앤드루의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위험할 때가 되면 억지로 몸을 움직여서 공격을 피하게 하고 다시 반격하게 만들었다. 엔디미온의 공격이 닿지 않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성검은 오랫동안 엔디미온과 함께 했고 그의 움직임을 세세히 알고 있었다. 어떤 자세에서 어떤 공격을 할 것인지, 이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일 것인지, 가장 선호하고 위력적인 공격이 무엇인지,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앤드루의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덕분에 공격에 맞지 않는 것이다. 시험으로 치면 정답을 다 알고 있는 셈이다. 정답을 다 알고 있는데 문제를 왜 틀린단 말인가.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움직일지 다 알고 있는데 공격에 왜 맞는단 말인가?
“자네는 날 이길 수 없네! 하지만 걱정일랑 접어두시게나! 자네를 대신해서 내가 의무를 다할 것이니!”
성검이 엔디미온의 가슴을 길게 그었다. 피가 확 튀었다가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가 보아도 유리한 것은 앤드루였다. 그는 상처 하나 없었으나 엔디미온은 이미 피범벅이었다. 물론 성배기사인 그는 그만한 상처로 죽지 않았다. 하지만 성검의 도움을 받는 앤드루를 한 대도 때리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잘못하면 죽이겠는걸.”
엔디미온은 손으로 뒷덜미를 주물렀다. 단지 뻐근한 뒷덜미를 주무르고 있는 것뿐이었다. 앤드루는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었으나 성검은 달랐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성검이 갑자기 발광하기 시작했고 앤드루의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는 어어 하는 사이에 성검을 들고 달리며 엔디미온을 찌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엔디미온의 주먹이 앤드루의 턱에 꽂혀있었다.
“······어?”
갑자기 고개가 위로 쳐들리며 밤하늘이 보였다. 앤드루는 자신의 몸이 기우뚱하는 것을 느꼈다. 그 다음에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이었다. 왜지? 그는 자신이 왜 바닥에 쓰러져 있는지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엔디미온의 공격은 아주 빨랐고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한때 농부였던 자가 반응하기에는 너무 빨랐다.
“내 움직임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해서 날 이길 줄 알았나.”
성검이 다시 발광했다. 앤드루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다음에 다시 주먹에 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성검의 힘이 그의 몸을 치유했으나 손이 덜덜 떨렸다. 주먹에 맞았을 때의 그 묵직한 충격 자체는 몸에 남은 것이다.
“아무리 내 움직임을 다 알고 있다고 해도 반응이 느리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앤드루는 기사가 아니었다. 그는 농부였고 검이라고는 잡아본 적도 없었다. 성검의 막대한 힘을 받아들이기에는 몸이 너무 약했다. 아무리 성검이 몸을 대신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육체의 성능 자체가 떨어지니 갑자기 빨라진 엔디미온의 움직임에 바로 반응할 수가 없었따.
아까까지는 엔디미온이 힘을 조절하고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달랐다. 성검은 알고 있었다. 이 싸움은 무조건 진다. 그리고 지면? 성검은 몸체를 부르르 떨면서 앤드루에게 힘을 주입했다. 그의 상처가 순식간에 낫고 몸 안에 힘이 가득 찼다.
그러나 제대로 실력을 발휘한 엔디미온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앤드루는 일어날 때마다 얻어맞고 다시 쓰러졌다. 그리고 또 일어났다. 싸우고 또 싸웠으나 아무 의미도 없었다. 엔디미온은 앤드루의 부러진 코뼈가 치유의 빛에 의해 다시 붙는 것을 보았다.
다시 주먹을 날렸다. 얼굴에 한 번, 배에 한 번, 다시 발차기로 배에 한 번, 멱살을 붙잡고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그래도 앤드루는 다시 일어났다.
아무리 성검의 힘으로 상처를 치유해도 방금까지 느꼈던 고통이 없던 것이 되지는 않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성배기사의 압도적인 힘에 벌벌 떨어야 했다.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앤드루는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났다.
“왜 다시 일어나는 거지? 내 상대가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잖나.”
앤드루의 두 눈은 흐리멍덩했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불명확했다. 그의 손과 다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내가 성배기사니까······. 사악한 것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성배기사니까······.”
엔디미온은 웃었다.
“근성은 마음에 들었다.”
주먹이 깔끔하게 앤드루의 얼굴에 직격했다. 그의 몸이 붕 떴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다시 일어나려고 하는 그에게 엔디미온은 나직이 말했다.
“더는 남을 고통스럽게 만들지 마라. 그 자는 몇 번을 일어나도 날 이길 수 없으며 너 자신을 위해서 남을 괴롭게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성검이 할 만한 짓이 아니야.”
그러자 빛나던 성검이 갑자기 잠잠해졌다. 성검의 힘 덕분에 앤드루의 상처는 모두 나았으나 그는 기절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엔디미온이 땅에 떨어진 성검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성검은 다시 발광하기 시작했다. 다가오지 말라고 항의하는 듯한 모습에 엔디미온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밤하늘에서 영원히 빛나는 별이자 위대한 전능자의 칼날이며 신성한 호수의 여왕의 일부이자 그녀의 딸. 또한 사악한 것들을 태우는 정화의 불꽃이자 길 잃은 수도자들의 수호성. 찬란하게 빛나는 이름은 전능자가 부를 때는 뤼미에르, 호수의 여왕이 부를 때는 브릴리언스, 마지막으로 성배기사가 부를 때는 에투알. 빛이자 반짝임이자 별이며 내 영혼의 친우이자 우리의 아가씨.”
엔디미온은 점잔 빼는 것에 취미가 없었다. 성검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렸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에투알이니 별이니 하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성검은 그냥 성검이었다. 날이 안 나가고 튼튼한 검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외우기도 힘든 이 긴 문장을 줄줄 말하고 있는 것은 성검을 달래야 했기 때문이었다. 엔디미온이 성검을 들 수 없었던 것은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성검이 그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앤드루를 쓰러트리고 성검을 뺏는 것이 끝이 아니란 소리였다.
“성배기사로서 네게 용서를 구한다, 성검 에투알.”
엔디미온은 슬쩍 땅에 떨어진 성검을 보았다. 이제는 발광하는 대신에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뒤에 성검을 잡았다. 가벼웠다. 성검이 다시 그를 주인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몹시 가벼웠다.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을 때였다. 갑자기 성검이 번쩍이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엔디미온을 뒤로 날려버렸다. 주변의 나무가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충격이었다. 바닥을 한 번 구르고 흙투성이가 된 엔디미온은 가식을 내던지고 짜증을 냈다.
“씨발, 이만큼 비위 맞춰줬으면 됐잖아? 얼마나 더 해달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