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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의 말에 성검은 더욱 빠르게 빛을 점멸했다. 마치 화가 나서 연달아 쏘아붙이는 것처럼 빠르게 빛을 번쩍거리던 성검은 엔디미온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서 몸을 한 번 흔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성검은 이제 빛을 뿜는 것은 그만두고서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얌전한 척을 하다가 또 가까이 가면 날려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던 엔디미온은 화가 난 맹수와 대치하는 기분으로 성검을 쏘아보고 있었다. 성검 에투알과 성배기사 엔디미온은 한참동안 같은 거리를 유지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지친 것은 에투알이었다. 백 년의 의무를 수행했던 엔디미온은 기다림의 명수였던 것이다.
“백 년 만에 돌아온 주제에······.”
별빛이 내렸다. 그 말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늘에서 광채가 내렸고 이제 성검은 없었다. 아가씨 에투알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발목까지 오는 광택 넘치는 은색의 머리카락과 물빛으로 빛나는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엔디미온의 눈이 바다라면 이쪽은 하늘이었다. 살결은 한 번도 햇볕에 타지 않은 것처럼 희었으며 옅은 분홍색으로 빛났다.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생기 덕분에 창백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생명력이 넘쳐보였다. 연약해보이지만 그 누구보다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고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성검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그녀가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에투알은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눈을 부릅뜬 채로 말했다.
“한다는 말이 뭐? 씨발? 씨―이―발? 내 기사님, 내 엔디미온, 내가 누구인지 잊으셨소? 나는 가장 환하게 빛나는 별이자 전능자의 칼날이며 내 어머니의 일부인 동시에 길 잃은 수도자들의 수호성이오! 그런데 씨발이라니? 씨발이라니! 대체 그런 상스러운 말은 어디서 배워 와서 날 눈물짓게 하는 거요, 내 기사님?”
씨발을 발음하는 것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아마 백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엔디미온의 이름을 부르며 발음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아한 자태의 아가씨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아니, 그 말은 그냥, 음, 그냥 감탄사야. 나쁜 뜻으로 한 말 아닌 거 알잖아? 그리고 아무리 화가 났어도 다짜고짜 날려버리다니? 이건 아가씨가 할 만한 짓이 아니야.”
“지금의 난 당신의 아가씨가 아니라 전능자의 칼날이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게 맞는 일이 아니오? 당신은 날 무려 백 년이나 기다리게 했소! 일 년도 아니고 십 년도 아니고 무려 백 년이나!”
“그건 오히려 널 위해서였어. 내가 백 년 동안 놀았던 게 아니잖아. 난 백 년 동안 호밀밭에서 의무를 다했어. 호밀밭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말이야. 네가 그런 따분한 생활을 견딜 수 있었을까? 차라리 자연을 즐기며 사는 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오! 그럼 차라리 날 어머니께 돌려보냈어야지요! 그게 맞는 거 아니오?”
엔디미온은 쨍한 목소리에 귀를 막으려다가 참았다.
“그럼 일을 두 번 해야 하잖아. 성배도 돌려줘야 하는데 나중에 겸사겸사······.”
“겸사겸사? 성배를 돌려주는 김에 겸사겸사? 진짜 어이가 없어서! 당신이 아무리 성배기사라도 나 없이 악마들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소? 그딴 말이나 할 것 같으면 그냥 성배랑 잘 먹고 잘 살지, 나는 왜 찾아왔소?”
네가 없어도 악마는 죽일 수 있는데. 엔디미온은 튀어나오려는 말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그는 그냥 성검 없이 악마들과 싸울까 생각했다. 싸움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성검을 되찾으려고 했던 것인데 이러면 정신적으로 너무 지쳤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여기까지 온 게 억울해서 일단 에투알을 달래보기로 했다.
“그래, 알겠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나빴어.”
“백 년 전에는 아주 신사와 같더니 지금은 그 한량 같은 태도가 대체 뭐요? 백 년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기에 그리 변한 것이오?”
“미안하다니까. 전부 다 내 잘못이야.”
“그럼 뭘 잘못하셨소?”
“뭐?”
“뭘 잘못했느냐고.”
엔디미온은 눈알을 한 번 굴린 후에 말했다.
“어, 널 버리고 간 거.”
“그거 말고는?”
잘못이 또 있어? 엔디미온은 자신을 째려보는 에투알의 시선에 한숨을 내뱉었다.
“아까 욕한 거.”
“그리고.”
“그리고?”
호수의 여왕은 노인과 아이와 여자를 때리지 말라고 했다. 엔디미온은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이것저것······.”
“이것저것? 장난하시오, 지금?”
엔디미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아니, 웃으려고 했다. 그의 웃음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버리고 갈까? 사실 지금 아쉬운 것은 오히려 에투알이었다. 엔디미온은 성검이 없어도 악마들을 죽일 수 있지만 에투알은 혼자서 움직일 수 없다. 만약 엔디미온이 여기에 에투알을 버리고 간다면 그녀는 또 아주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야 했다.
앤드루는 이미 기절했고 그를 다른 곳으로 치워버리면 성검을 들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제 에투알을 달래는 것에 지친 엔디미온은 한 마디 쏘아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잘못을 한 것은 엔디미온이었고 그런 주제에 널 그냥 두고 가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성배기사가 할 만한 짓이 아니었다.
엔디미온은 큼큼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에투알은 아직 화가 난 얼굴로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내가 왜 집 나갔다 돌아온 남자마냥 죄스럽게 굴어야 하지? 엔디미온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서 넘겼다. 그 모습이 또 에투알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고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또 한 마디 쏘아붙이려고 할 때였다.
“애정 싸움하는데 미안한데 말이야.”
남자 목소리였다. 엔디미온과 에투알은 목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짙게 깔린 어둠 뒤에서 한 남자가 발자국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갑작스런 등장이었지만 아무도 당황하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었다.
“뭐야, 살아있었냐.”
“그 말은 좀 섭섭한걸. 내가 죽길 바랐던 거냐, 엔디미온?”
“약간은.”
“마음에도 없는 말인 거 다 알아.”
갑작스럽게 나타난 자는 바로 라우렌시오였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자세히 보면 몸 곳곳이 상처투성이였다. 망토는 찢어져서 너덜거렸고 그 밑으로 붕대를 둘둘 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라우렌시오는 어디 가서 얻어맞고 다닐 만큼 약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런 꼴로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엔디미온은 거추장스러운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라우렌시오. 꼴이 말이 아니군.”
“무슨 일이 있었냐고? 많은 일이 있었지.”
라우렌시오는 희미하게 웃으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수통을 꺼냈다. 그는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듯 목소리가 많이 갈라져 있었다. 수분을 섭취한 후에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내게 누명을 씌운 악마를 뒤쫓고 있었다. 그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그만둘 수 없는 일이었지. 난 결국 그 악마를 찾아냈고 얼굴을 마주하게 됐지. 그런데 놈이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하더군. 날 아무것도 모르는 얼치기 취급하면서 말이야. 그건 개소리야. 놈이 아니면 누가 내 흉내를 내서 내게 누명을 씌우겠나?”
“그래서 내게 도움을 청하러 온 거냐.”
“그래. 네가 내 복수를 도와준다면 나도 네 마지막 의무를 도와주겠어. 그리고 엔디미온, 이건 나만의 복수가 아니야.”
“그럼 또 누구의 복수인데.”
라우렌시오가 입술을 깨물었다. 전과 다르게 몹시 수척해진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칼라딘이 죽었어. 그 악마 놈에게.”
“······칼라딘이 죽었다고? 난쟁이 전사 칼라딘이?”
놀라서 외친 것은 엔디미온이 아니었다. 성검 에투알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성배기사의 검이었지만 함께 힘겨운 싸움을 했던 모두와 친분이 있었다. 영웅들은 모두 에투알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칼라딘이 죽었다는 소식은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영웅도 죽는다. 알고 있다고 해서 충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라우렌시오는 몹시 지쳤으나 억지로 웃었다.
“뤼미에르, 우리의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에투알이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오직 성배기사에게만 자신을 에투알로 부를 것을 허락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전능자가 붙여준 이름인 뤼미에르라고 불러야 했다. 라우렌시오가 그녀를 깍듯이 대하는 것은 성검이란 존재 자체가 전능자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전능자의 모습을 본 적이 없으나 성검의 존재가 전능자의 실존을 증명했다. 비록 친분이 있는 영웅들이라 해도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성검을 귀찮게만 여기는 엔디미온이 이상한 것이었다.
“요정기사 라우렌시오, 일곱 요정 가문의 수장이자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꾀를 가진 자. 덕분에 그간 안녕했소. 다시 만나 반갑소.”
에투알이 그린 듯 웃었다. 라우렌시오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칼라딘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몹시 유감입니다. 세상의 안녕을 위해 일해야 할 저희가 도리어 악마들에게 당하다니 참으로 죄스러운 일입니다.”
“아니, 자네들은 충분히 제 역할을 다했소. 날 버리고 간 내 기사님보다는 낫지. 자책할 것 없소.”
아니, 그 새끼들은 의무를 버리고 도망쳤는데 제 역할을 다하기는 뭘 해. 엔디미온은 작게 혀를 찼다. 그는 라우렌시오에게 말했다.
“그 악마 놈은 어디에 있지?”
“이곳에서 북쪽으로 열흘 정도 떨어진 곳에. 주변이 사악한 기운에 완전히 오염된 곳이야. 생물이라고는 악마와 악귀들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살지 않지. 아주 강력한 놈이야.”
“오늘은 쉬어라, 라우렌시오. 내일 아침에 출발할 생각이니까.”
“고맙다, 엔디미온. 칼라딘도 기뻐할 거야.”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에투알을 보며 말했다.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난 이제 악마를 죽이러 갈 거다. 칼라딘을 죽였을 정도니 아주 강력한 악마겠지. 그러니 너의 힘을 좀 빌리마.”
“하! 누구 마음대로! 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소! 잘 보시오! 난 아직 당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중이요! 난 당신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하기 전에는 절대로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엔디미온은 대답을 하는 대신에 에투알에게 다가가 오른쪽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투알, 우리 아가씨.”
에투알이 윽 소리를 냈다. 엔디미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야. 내 친우를 위해서, 그리고 네 친구를 위해서. 칼라딘의 복수를 해야지. 그래야만 그도 전능자의 곁에 갈 수 있을 거야. 나는 정중하게 네게 도움을 구하고 있어. 너라면 분명 들어줄 거라고 믿는다.”
엔디미온의 태도는 아까와 달리 몹시 정중하고 진지했다. 에투알은 그의 뜨거운 시선에 눈알을 한 바퀴 굴렸다가 부끄러운 듯 다시 내리깔며 말했다.
“뭐어······. 그으렇게까지 부탁한다면야······.”
“고맙다, 에투알.”
엔디미온이 작게 웃자 에투알이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환한 빛과 함께 곧 성검의 모습으로 변했다. 엔디미온은 자신의 손 위에 들린 성검을 한 번 보고서 한숨과 함께 말했다.
“여관으로 가자, 라우렌시오. 이 말 안 듣는 성검을 달래느라 나도 너무 지쳤다.”
성검이 엔디미온의 머리 안으로 바로 목소리를 흘려보내며 항의했으나 그는 바로 성검의 목소리를 차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