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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렌시오는 성검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며 말했다.
“화나신 것 같은데.”
“이게 다 너희들이 오냐오냐해서 그런 거잖아. 가끔은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성검이 무슨 애냐? 라우렌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가 쓰러져 있는 앤드루를 발견한 그가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야?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아, 잊고 있었군.”
성검과 라우렌시오의 등장 때문에 앤드루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성검 때문에 격렬하게 움직였던 앤드루는 진이 다 빠져버린 것이지 잠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엔디미온이 그의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어깨동무를 했다. 앤드루의 발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앤드루야. 나 대신에 성검을 들고 다니던 놈이지.”
“성검을 들어? 너 말고는 아무도 들 수 없잖아?”
“정확히 말해서 나 이외에 적법한 자격을 갖춘 자가 없었던 거지. 이 남자는 아주 정의롭고 순수하게 미쳐있어. 그래서 성검을 들 수 있었던 거야. 미친 게 아니라면 누가 이 괴로운 일을 기꺼이 하겠어?”
“그건 자기비하야, 엔디미온.”
“아냐, 가끔 생각해보면 나도 미친 게 맞는 것 같아. 남들 다 도망갔는데 혼자서 백 년 동안 호밀 농사를 짓다니, 보통 미치광이가 아니야.”
라우렌시오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여관까지 걸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달빛이 그들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달빛은 성검을 비추는 중이었다. 밤하늘의 모든 별들은 달의 자식들이었으니 별을 녹여 만든 성검 역시 밤의 일부였다.
엔디미온은 달빛을 받고서 얌전해진 성검을 한 번 내려다보고서 다시 정면을 보았다. 여관이 보였다.
뻑뻑한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술냄새가 확 코를 찔렀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병을 대충 발로 밀어낸 후에 적당한 곳에 앤드루를 내려두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잠이 깬 것인지 앤드루가 몸을 뒤척였다. 잠시 뒤에 눈을 껌뻑거리며 일어난 그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일어났나?”
앤드루는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엔디미온은 식탁 위의 술병을 가만히 잡고 있다가 앤드루에게 주었다. 그는 술병을 받아서 안에 든 것을 벌컥벌컥 마셨다. 입가에 흐르는 투명한 액체를 손등으로 훔치고서 앤드루가 말했다.
“술이 달군. 인생이 써서 그런가······.”
술이 아니라 성수니까 달지. 엔디미온은 입가를 씰룩거렸다. 앤드루는 다시 한 번 성수를 들이키고 말했다.
“내가 졌군.”
앤드루의 시선은 엔디미온의 손을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손에 들린 성검을 보고 있었다. 앤드루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로 고개를 쭉 뒤로 넘겼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놀랍군. 그래, 자네가 진짜 성배기사였어. 난 그저 자네를 모방하는 가짜에 불과했군.”
엔디미온은 그걸 이제 알았느냐고 말하지 않았다. 거만하게 상대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위대함을 떠벌리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고요한 눈으로 앤드루를 보고만 있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검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농부가 성배기사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검이 없는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악마는 물론이고 악귀조차 죽일 수 없다. 이제는 다시 농부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한바탕의 꿈은 끝났다.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하지만 앤드루의 두 눈은 아직 빛을 잃지 않았다. 그는 성검을 잃은 것을 낙담하지 않았고 상실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성검은 그저 수단일 뿐이었고 목적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돕고 사악한 것들을 물리친다. 맹목적이고 순수한 열정은 성검을 잃은 이후에도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게는 의무가 있으니 어찌 돌아가겠나? 어찌 나 혼자만의 안녕을 위하겠는가? 그것은 옳지 않아.”
엔디미온이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성검이 없잖아. 성검도 없이 무슨 수로 사악한 것들을 물리치려고? 너도 잘 알겠지만 너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아.”
“물론 알고 있지.”
“알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거냐? 자살을 희망하는 거라면 더 괜찮은 방법이 있을 거다.”
앤드루는 껄껄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술병들을 뒤졌다. 그리고 약간이라도 술이 남은 것을 집어서 입을 축이며 말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 불가능하다는 소리겠지. 그 말이 맞네. 나는 검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농부고 성검이 없으면 악귀 한 마리조차 죽이지 못하겠지. 분명 불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그래서 하는 걸세. 불가능하니까.”
앤드루의 눈이 빛났다. 순수한 빛이었다.
“인생이란 것은 별을 쫓는 아이처럼 살아야 해. 결코 잡을 수 없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쫓아가는 거야. 처음은 즐겁겠지. 그 다음은 지칠 것이고 언젠가는 쓰러질 걸세. 그럼 그때는 하늘의 별을 보세나. 그럼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어. 그리고 다시 별을 쫓으러 가는 거야. 그게 인생일세. 불가능하기 때문에 숭고한 것이네. 그리고 의미가 있는 거지.”
엔디미온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한 새벽의 침묵을 깨는 것은 앤드루 혼자였다. 그는 두 눈 안에 별빛을 담으며 말했다.
“가능한 일을 해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가능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성공일세. 시작하기 전부터 성공하는 것이지. 그저 멈추지 않고 달려가기만 하면 돼.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패배하지 않은 승리일 뿐, 위대한 승리가 아닐세. 우리는 차가운 머리로 생각하고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 하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끝없는 패배 속에서 위대한 승리를 맛봐야 하네. 그게 삶이야. 성공하는 삶에는 의미가 없어. 스스로를 파괴하고 패배하는 삶, 그것만이 의미가 있을 뿐이야.”
눈에 서린 이채는 일종의 광기였다. 자신을 불가능 속으로 밀어트리고 수많은 고난으로 채찍질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또한 감탄스러웠다. 그 누가 불가능을 쫓겠는가? 그 누가 승리를 마다하고 패배를 탐하겠는가?
하지만 가장 감탄스러운 사실은 그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영웅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아닌 그저 사람. 그렇기에 위대한 것이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은 사람의 특권이야. 몇 번이고 거꾸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 사람의 특권이라고. 그런데 어찌 고향으로 돌아가 나의 안녕을 바라겠는가? 그것은 승리한 패배자일세.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지. 나는 기꺼이 패배하고 위대한 승리의 미주를 마시겠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라우렌시오가 혀를 찼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정신이 아닌 놈이 말만 그럴듯하군.”
아무리 번지르르하게 지껄여봤자 결국 진실은 하나였다. 앤드루는 언제나 패배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도전이 아니고 정해진 패배일 뿐이었다.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해봤자 결국 그것이 사실인 것이다.
그 사실은 엔디미온도 알고 있었다. 앤드루를 그저 제정신 아닌 남자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엔디미온이 바랐던 것은 영웅이 없는 세상이었다. 사람들이 영웅들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저항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악마들에 비하면 사람들은 너무 약하니까. 하지만 앤드루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사람의 특권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엔디미온의 마음을 흔들었다. 세상 모두가 힘을 합쳐 불가능에 도전한다면, 패배하고 쓰러져도 수없이 다시 일어난다면, 그러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모순의 날이 오지 않을까?
결코 잡을 수 없는 별을 잡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는 아이가 그러하듯, 언젠가 지쳐 쓰러지고 넘어져도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고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은 패배하고 배우며 다시 달릴 것이다. 수많은 패배를 쌓아올려 밤하늘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별을 손에 넣을 것이다.
그게 사람이니까. 엔디미온은 사람을 믿었다. 그들의 저력을 믿었다.
“내가 추천서를 하나 써주지.”
엔디미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관 안을 뒤졌다. 그리고 잉크와 펜,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다. 그는 거기에 유려한 필체로 문장을 써내려갔다. 뒤에서 지켜보던 라우렌시오가 미간을 좁혔고 앤드루는 무슨 일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자신이 쓴 문장을 찬찬히 살펴보던 엔디미온이 종이를 곱게 접어서 앤드루에게 주었다.
“이거 중요한 거니까 잃어버리지 마라.”
“······이게 무엇인가? 뭐라고 쓴 건가?”
“직접 봐.”
“난 글을 모르는데······.”
글을 아는 농부는 드물다. 엔디미온은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이건 추천서야. 이걸 들고 뒤르겔로 가서 에스메렐다 추기경을 찾아라. 그리고 이걸 보여주면 널 받아줄 거다. 종자 생활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지만 어쩌겠어. 지금부터라도 싸우는 법을 배워야지. 그리고 요즘 성배기사를 사칭하는 자들이 늘어나서 이 추천서의 진위를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 목걸이를 보여줘라.”
엔디미온이 건넨 것은 엘런에게 받았던 목걸이였다. 본래 뒤르겔에서 만났을 때 돌려줬어야 했는데 여러 일 때문에 아직 그가 가지고 있었다. 추천서를 진짜 성배기사가 썼음을 알려주기 위해 종이를 신성력으로 싸서 찢어지거나 젖지 않게 했으나 그것만으로 증거가 불충분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엘런의 목걸이를 앤드루에게 준 것이다. 에스메렐다도 슐리츠 가문의 목걸이를 보면 앤드루의 말을 믿을 것이다.
앤드루는 당황하며 말했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건가?”
“불가능에 도전하는 자세는 칭찬할 만한 일이야. 하지만 개죽음은 면해야지. 여명교단에서 성기사가 되어라. 그리고 의무를 다해라.”
“내가 성기사가 된다고?”
앤드루는 멍하니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네. 꼭 훌륭한 성기사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네.”
“그리고 이것도 좀 가져가라. 여비다. 그리고 성수도 좀 챙겨주마. 가는 길에 다치면 성수를 마셔라.”
엔디미온은 금화 몇 개와 성수를 담은 수통을 주었다. 앤드루는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했다.
“나도 언젠가 자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네.”
“사악한 것들을 죽이는 것 자체가 날 돕는 일이야. 열심히 해라. 뒤르겔로 가는 방향은 알고 있나? 출발은 내일 할 건가?”
“뒤르겔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네. 그리고 지금 당장 출발할 생각일세.”
“지금?”
앤드루가 웃었다.
“내일이 되면 사람들도 내가 진짜 성배기사가 아니란 것을 알겠지. 그들에게 미움을 살 게 두려워서 떠나는 게 아니야. 성배기사를 만났다는 그들의 행복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서야. 변명 같겠지만 진심일세.”
“그럼 조심해서 가라. 그런데 무기도 하나 없이 괜찮겠나?”
“다음 마을에서 하나 구하면 될 걸세. 여비도 두둑이 받았잖나.”
앤드루가 여관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문을 열면서 말했다.
“다음에 또 보세, 엔디미온.”
“그래. 다음에 또 보자고, 앤드루.”
가짜 성배기사는 떠나고 진짜 성배기사는 남았다. 라우렌시오는 닫힌 문을 보며 말했다.
“저대로 고향에 돌아가겠군.”
“아니, 저 남자는 성기사가 될 거다. 성검을 들었던 남자니까.”
“아무리 성검을 들었다고 해도······.”
엔디미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그만 자자. 여명이 멀지 않았군. 칼라딘의 복수를 하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