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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은 종족차별과 요정을 싫어한다. 하지만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린 것은 여자 요정이 자신에게 뛰어와서가 아니라 그녀의 몸에서 사악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요정이라서 일단 때리고 본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정말로.
그는 길쭉한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악귀를 보았다. 혀끝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는데 바닥에 닿을 때마다 칙칙 소리가 나면서 연기가 났다. 그냥 침이 아닌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한 발자국 내딛으면서 악귀에게 주먹을 날리려고 했다.
그러자 악귀는 뒤로 물러나는 동시에 입에서 침을 뱉었다. 초록색 침은 척 보기에도 위험해 보였고 엔디미온이 손등으로 그것을 쳐내자 따끔한 감각과 함께 희끄무레한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그러는 동안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났다. 엔디미온은 주먹을 휘둘러서 연기를 흩트렸다. 악귀는 그 사이에 사라지고 없었다.
“재빠른 놈이군.”
“손은 괜찮은 것이오?”
허리춤에 달려있던 성검이 진동할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났다. 엔디미온은 악귀의 침을 받아낸 손등을 쳐다보았다. 살갗이 약간 발간색이 되었지만 움직이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이만한 상처는 가만히 두면 나았다.
“쫓아가야겠군.”
“굳이 그럴 것까지 있소? 저급한 악귀 따위야 그냥 두어도 누군가 처리할 것이오.”
“나는 성배기사로서 사악한 것들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처단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저 악귀는 그냥 악귀가 아니야.”
“요정으로 변신을 해서?”
“아니, 말을 하잖아. 이성도 있고.”
악귀는 사악한 힘을 가진 짐승이나 다름없다. 짐승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악귀도 말 대신에 울음소리만 낼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 무언가를 죽이고 먹기 위해 움직인다.
악마도 아니고 악귀 따위가 변신 능력을 가지고 사람을 습격한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악귀가 이성을 가지는 것은 악마가 힘을 나누어 주었을 때뿐이야. 이 근처에 악마가 있다는 뜻이지. 잔챙이 한 마리 잡는 것보다 대어를 잡는 게 낫지.”
성검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얼른 악귀의 뒤를 쫓았다. 그는 사냥꾼은 아니지만 성배기사였다. 사냥꾼이 사냥감의 흔적을 뒤쫓는 것처럼 그 역시 악귀의 냄새를 쫓아 달렸다.
하지만 이곳은 엔디미온에게 낯선 곳이었고 악귀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다. 냄새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복잡한 길까지 더해지니 추격에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성검이 방향을 제시했다. 에투알은 길 잃은 수도자들의 수호성이었다. 언제나 옳은 길만을 알려주기에 길을 잃는 일은 없었다.
“어어, 잠깐! 잠깐 정지!”
거침없이 산길을 내달린 결과 엔디미온이 마주한 것은 도망친 악귀가 아니라 산적들이었다. 저들끼리 시시한 잡담을 나누고 있던 산적들은 엔디미온을 발견하고 무기를 들이밀었다. 창을 들고 조잡한 무장을 한 남자가 총 다섯 명이었다. 엔디미온은 일단 시키는 대로 제자리에 멈추었다.
산적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엔디미온에게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자, 일단 가지고 있는 거 다 내려두고······. 응? 아니, 너는······.”
엔디미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산적의 태도가 이상했다. 분명히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인데 마치 자신을 아는 것처럼 당황하지 않는가. 엔디미온은 이 산적들이 사실 변장한 악귀들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설마 자신이 성배기사란 것을 알아봤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럼 먼저 도망간 악귀가 이들에게 자신에 대해 알려준 것일까? 가능성 있는 일이지만 영 석연치 않았다.
“모두 공격해! 저 자식을 죽여!”
산적들이 엔디미온에게 달려들었다. 적이 다섯 명이나 됐지만 엔디미온은 성검을 뽑지 않았다. 악귀 따위를 상대로 성검을 뽑는 것은 너무 아까운 짓이었다. 대신에 그는 단단한 주먹으로 가장 먼저 달려드는 산적의 머리를 부쉈다. 바위에 부딪힌 달걀이 그러하듯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내용물을 뿌렸다.
다음은 양쪽에서 달려드는 산적 두 명의 멱살을 붙잡아서 서로를 향해 휘둘렀다. 산적 두 명의 머리가 부딪쳐서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 사이에 강철 같은 주먹이 얼굴에 꽂혔다. 순식간에 세 명을 쓰러트리고 이제 남은 것은 두 명뿐이었다. 산적들은 그제야 악귀의 모습으로 변했으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엔디미온은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차서 악귀 한 마리의 눈을 맞추고 그 틈을 이용해 손으로 목을 붙잡아 으스러뜨렸다. 머리가 축 늘어진 악귀를 바닥에 내던지고 마지막 악귀의 정강이를 발로 차서 부러트린 후에 주먹으로 얼굴을 박살내서 끝장을 냈다.
오 분도 걸리지 않고서 다섯 마리의 악귀들을 모두 처치한 엔디미온은 성검을 향해 말했다.
“어디로 가면 되지?”
“북쪽.”
엔디미온은 다시 달렸다. 점점 사악한 냄새가 짙어졌다. 하지만 이건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내뿜는 냄새가 아니라 수많은 악귀들이 함께 있어서 나는 냄새였다. 근처에 악귀들의 무리가 있다.
이만큼 많은 숫자의 악귀들이 있다면 산을 넘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큰 해를 입었을지 쉬이 짐작이 됐다. 엔디미온은 성배기사로서 악귀들을 벌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성검이 가르쳐주는 방향으로 쉬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산채였다. 수많은 산적들이 돌아다니는 거대한 산채.
“······얼씨구?”
악귀들이 돌아다니는 산에 자리를 잡을 멍청한 산적들은 없다. 저들은 모두 산적으로 변장한 악귀들이었다. 그래서 이상한 것이다. 짐승이나 다를 게 없는 악귀들이 저들끼리 뭉쳐서 산채를 짓고 조직적으로 행동한다니.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악귀들은 그럴 능력이 없다.
설령 악마가 그들에게 힘을 나누어 주어 이성과 지능을 얻었다고 해도 이만큼이나 많은 악귀들에게 힘을 나누어 주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악귀는 어디까지나 악귀다. 힘을 나누어 주는 만큼 악마의 힘이 줄어드는데 무엇 때문에 악귀 따위에게 나누어 주겠는가. 차라리 악귀가 아니라 악마숭배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이득일 것이다.
엔디미온은 자세를 낮추고 나무 뒤에 숨어서 산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숫자는 대략 서른 남짓. 완벽하게 인간이나 요정의 모습을 한 악귀들도 있었고 불완전하게 변신한 악귀들도 있었다. 일부는 목책 주변을 돌아다니며 순찰을 하고 있었고 또 일부는 잡아온 산짐승들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산적보다는 그냥 하나의 마을 같았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구역질나는 냄새를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악마는 보이지 않았다. 산채 중심부에 숨어있다고 해도 성배기사로부터 완전히 숨을 수는 없는데 기척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악마가 없는 건가?”
“외출이라도 한 모양이지.”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똑바로 섰다. 산채를 때려 부수고 있으면 악마도 나타나겠지. 그는 주변에서 적당한 나뭇가지를 집었다. 두께는 주먹 정도고 길이는 다섯 뼘 정도였다. 누구 때리기 딱 알맞았다.
“성검을 되찾았으면서 날 쓰지 않는 것이오?”
에투알이 약간 토라진 목소리를 냈다.
“악귀 따위 죽이는데 성검을 쓰는 건 아깝지. 몽둥이면 충분해.”
엔디미온은 숨어있던 나무 뒤에서 나와 산채 쪽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를 발견한 산적들은 무기를 들이밀며 위협했다.
“멈춰!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멈추라고 해서 멈출 것 같았으면 이런 곳에 오지도 않았다. 엔디미온은 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로 산적 하나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어찌나 강한 힘으로 쳤는지 목이 홱 돌아가면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산적 한 명이 쓰러지고 다른 산적들이 달려들었다.
수많은 창칼들이 엔디미온을 노렸으나 단 한 번의 공격도 그에게 닿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잽싸게 움직이며 몽둥이로 산적들을 때려눕혔다. 그저 단단한 몽둥이일 뿐이지만 성배기사의 손에 들려있을 때는 철퇴나 다름없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산적들의 뼈가 하나씩 부러졌고 그들은 악귀의 모습으로 변해 다시 달려들었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한참 휘두르던 몽둥이가 뚝 하고 부러졌다. 아무리 철퇴와 같은 위력을 내도 결국 몽둥이는 몽둥이였다. 신나게 매찜질을 하던 몽둥이가 부러지자 엔디미온은 곧장 주먹을 쥐었다. 달려드는 악귀의 창을 붙잡아서 자신 쪽으로 잡아당긴 후에 두꺼운 팔로 목을 휘감아 부러뜨렸다.
그 사이에 뒤쪽으로 돌아간 악귀들 두 마리가 엔디미온의 등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엔디미온은 잠깐 얼굴을 찡그렸으나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악귀들은 킬킬 웃으며 창을 뽑아서 다시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엔디미온이 등에 힘을 주자 창이 물림쇠에 붙잡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곧장 뒤로 돌아서 악귀들의 머리를 주먹으로 하나씩 부쉈다. 타격음이 날 때마다 악귀들이 쓰러졌다. 혼자서 순찰을 돌던 악귀들 여섯 마리를 해치운 그는 바로 산채의 입구로 향했다. 아까의 소동 때문에 산채의 입구는 굳게 닫혀있었고 목책 위에는 악귀들이 올라가 있었다. 그들이 화살을 쏘았다. 화살촉이 초록색으로 빛났는데 아무래도 독을 바른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산채의 입구를 향해서 달렸다. 굳게 닫힌 입구에는 분명 단단한 빗장이 달려있을 것이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빠르게 달려가서 그냥 몸으로 힘껏 부딪쳤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산채의 입구가 박살나고 먼지구름이 생겨났다.
목책 위에 있던 악귀들이 입구가 박살나는 충격 때문에 몸을 흔들거리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엔디미온은 바닥에 떨어진 나뭇조각을 잡았다. 이제부터는 이게 무기였다.
싸우기 전에 눈으로 상대의 숫자부터 확인했다. 대략 열 마리. 정리하는데 얼마 걸리지 않을 숫자였다. 엔디미온은 차츰차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악귀들을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악귀들 뒤로 멀뚱히 있는 요정 한 명을 보았다.
여자였고 은발이었으며 보라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생김새라고 했더니 베로니카였다.
“너 왜 여기 있냐?”
“앗! 엔디미온 씨! 이런 상황에서 보니까 정말 기쁘기 그지없네요!”
베로니카가 깡충깡충 뛰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엔디미온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뭐야, 여기 있는 놈들이랑 한통속이었던 거냐?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이 요정 녀석.”
“무슨 헛소리야! 사슴 잡겠다고 저만 버리고 다 떠나서 납치당한 거잖아요! 딱 보면 몰라!”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었어.”
“······.”
베로니카가 말없이 입을 비죽거렸다. 엔디미온은 끝이 날카롭게 부러진 나뭇조각을 들고서 악귀들을 향해 달렸다. 일부 악귀들이 뒤쪽에서 독 묻은 화살을 날리자 나뭇조각으로 쳐내거나 몸을 틀어서 피했다. 그 다음에는 가장 가까이 있는 악귀의 목덜미에 나뭇조각을 박았다. 다시 뽑으면서 덤벼드는 악귀의 얼굴을 찔렀다.
그런 식으로 차근차근 한 마리씩 적을 처치해갔다. 화살을 다시 장전한 악귀들이 활을 쏘자 이번에는 악귀 한 마리의 멱살을 붙잡고 화살막이로 썼다. 투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악귀의 몸에 여러 발의 화살이 꽂혔다.
엔디미온은 숨이 끊어진 악귀의 몸을 한 손으로 들고서 돌진했다. 당황한 악귀들이 활을 쐈지만 모두 시체에 막힐 뿐이었다. 엔디미온은 충분히 거리를 좁힌 후에 들고 있던 시체를 던졌다. 악귀 한 마리가 쓰러졌고 나뭇조각이 그 곁에 있던 악귀의 어깨를 찔렀다.
강력한 발차기가 악귀의 허리를 부러트렸다. 마지막 남은 악귀가 얼른 활을 쏘았다. 엔디미온은 어깨에 화살을 맞았지만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주먹을 날려 악귀를 끝장냈다.
열 명의 악귀들을 모두 해치운 그는 들고 있던 나뭇조각을 바닥에 던지고 손을 탁탁 털었다. 베로니카가 깡충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서 결박당한 손목을 내밀었다.
“이것 좀 해결해주실래요?”
엔디미온은 성검을 뽑아 끝부분으로 밧줄을 툭 건드렸다. 그것만으로도 밧줄이 끊어져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친 끈으로 결박당해서 쓰라림이 생긴 손목에 호호 입김을 불고 있던 베로니카가 말했다.
“이야, 엔디미온 씨 덕분에 살았어요.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사슴을 쫓다가 길을 잃었다.”
“······성배기사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네요.”
“시끄럽고 이거나 좀 뽑아 봐.”
“어떤 거요?”
엔디미온이 뒤로 돌았다. 베로니카는 헉 소리를 냈다. 엔디미온의 널찍한 등에는 창 두 자루가 박혀있었다. 이 사람은 등에 이걸 박힌 채로 싸웠던 거야? 새삼 성배기사의 무시무시함이 느껴졌다.
“이걸 꼭 제가 뽑아야 하나요? 스스로 뽑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근육 때문에 손이 안 닿아.”
“······거참.”
두 자루의 창은 널찍한 등에서 아슬아슬하게 손이 닿지 않을 만한 위치에 있었다. 베로니카는 으윽 소리를 내며 창을 잡았다. 그리고 힘껏 잡아당기자 막혀 있던 상처가 터지면서 피가 확 튀었다. 눈에 피를 맞은 베로니카가 악 소리를 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악! 악! 내 눈! 내 눈!”
“엄살은. 빨리 마저 뽑아.”
다시 일어난 베로니카의 눈이 빨갰다. 그녀는 이번에는 눈에 피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창을 마저 뽑았다.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렀지만 엔디미온이 기합을 한 번 주자 근육이 뭉치며 상처를 압박했다. 지혈은 그걸로 끝이었다.
베로니카는 아연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 맞아요?”
“아니, 사람이 아니라 성배기사지.”
세상에 사람의 종류는 셋인 모양이었다. 남자, 여자, 그리고 성배기사. 베로니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