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그런데 짐이랑 말들은?”
짐과 말은 중요한 자산이다. 워낙 가진 돈이 많으니 없어져도 다시 사면 그만이지만 당장 먹을 것과 타고 갈 것이 없어졌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베로니카는 산채 안의 여러 건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론가 가져간 것 같은데요. 자세한 위치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람 흉내를 내는 악귀들에게 짐과 말은 유용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베로니카를 납치해올 때 같이 들고 온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랑 말들이 여기에 있다면 다시 되찾아야 했다.
“어어? 엔디미온 씨! 저기 보세요! 산적들이에요!”
엔디미온이 요란하게 날뛰었던 탓에 악귀들이 건물 안에서 나타났다. 숫자가 제법 많았다. 산채 안을 돌아다니던 악귀들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악귀들 아닌가.
마흔을 훌쩍 넘는 악귀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서 엔디미온을 향해 다가왔다. 처음에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걸어오는 사이에 점차 악귀의 모습으로 변했다. 엔디미온은 주변에 무기로 쓸 만한 것이 없을까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엔디미온! 날 뽑으시오! 아니, 왜 날 안 쓰는 거요!”
성검의 힘을 빌리면 여기 있는 악귀들을 모두 쓸어버릴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손쉽게. 엔디미온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성검을 쓰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악귀들 따위에게 성검을 쓰기가 꺼려졌다. 다른 이유로는 에투알의 힘을 빌렸을 때 그녀가 으스댈 게 마음에 안 들어서였다.
엔디미온은 그녀가 으스대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이 왈가닥 아가씨가 기고만장하게 되면 얼마나 귀찮을까. 엔디미온은 에투알에게 들키면 몹시 곤란할 생각을 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활을 집었다.
“야, 베로니카.”
“네?”
“마법 준비해서 날려. 되도록이면 뒤쪽에 활 든 놈들부터 노리고.”
“네, 알겠습니다!”
베로니카가 마법을 준비하자 에투알이 소리쳤다.
“아니, 날 쓰시오! 야! 엔디미온! 나 쓰라고!”
엔디미온은 소리치는 에투알을 무시하고 활시위를 몇 번 잡아당겼다. 그 모습을 본 베로니카가 말했다.
“활도 쏠 줄 아세요?”
“활을 왜 쏘냐. 그냥 이걸로 때리면 되는데.”
“네?”
그럼 활을 왜 드는데? 베로니카가 어이없어 하자 엔디미온이 한 발자국 내딛으며 말했다.
“지금 날려.”
“아, 네? 네! 알겠습니다!”
베로니카가 미리 준비했던 마법을 발사했다. 화염구가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듯하다가 뚝 떨어지면서 악귀들을 날려버렸다. 그것이 전투 시작의 신호였다. 엔디미온이 빠르게 달려서 악귀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손에 든 활로 악귀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그 다음 악귀의 눈을 활의 끝부분으로 찍었다.
뒤쪽에서 베로니카가 날리는 마법 때문에 악귀들이 죽어나갔다. 덕분에 엔디미온이 상대해야 할 적들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그는 악귀들을 상대하면서도 곁눈질로 베로니카의 위치를 확인했다. 마법사는 안전하게 보호받을 때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가진 힘에 비해서 생존력이 낮았다. 은빛새벽회가 그토록 강철에 집착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마법은 강력해도 육신은 나약하니까.
엔디미온은 가능한 베로니카에게 가려는 악귀들부터 처리했다. 쉬지 않고 활을 휘두르며 악귀들의 머리통을 부수며 빠르게 움직이는 눈으로 악귀들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한창 싸우던 중에 힘껏 휘두르던 활이 뚝 부러졌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부러진 활의 한쪽을 악귀의 정수리에 꽂고 다른 쪽은 악귀의 목덜미에 꽂았다.
그 다음에는 주먹질이었다. 때리고 부수고 박살내고. 쉬지 않고 적들을 분쇄했다. 하지만 악귀들의 저항도 거셌다. 그들은 엔디미온의 몸에 달라붙어서 깨물고 할퀴었다. 자잘한 상처가 생겨났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날아오는 화살이 어깨에 꽂혔어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성배기사라고 해서 고통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자잘한 상처 따위에 죽을 만큼 나약하지도 않았다. 개미가 코끼리를 물어죽일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따끔하기는 해도 단지 그것뿐인 것이다.
“태워 죽여라!”
베로니카의 외침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빠르게 불길이 치솟으면서 남아있던 악귀들을 모두 태웠다. 그들이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거렸다. 엔디미온은 바닥에 쓰러진 악귀의 모습을 잠깐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하아······. 힘들었어요.”
“수고했다. 이제 짐이랑 말들을 찾아서 돌아가자고.”
엔디미온이 건물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베로니카도 얼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건물들의 문을 열어보며 자신들의 짐을 찾아다녔다. 건물의 대부분은 집이거나 창고였는데 그들의 짐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말들은 마구간에 있었다. 말은 이곳에서 나갈 때 데리고 나가기로 하고 다시 짐을 찾아서 돌아다녔다.
“어, 엔디미온 씨! 여기 좀 보세요!”
산채의 가장 뒤쪽에 위치한 집에 들어간 베로니카는 지하로 통하는 것처럼 바닥이 뻥 뚫린 것을 보았다. 엔디미온은 천천히 구멍 쪽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숙이고 안을 보니 발자국이 보였다. 누군가 이곳을 드나들었다는 뜻이다.
“수상쩍은데.”
“제가 봐도 그래요.”
엔디미온은 고개를 돌려서 집 안을 보았다. 이곳은 산채 안에서 가장 큰 집이었고 빼앗긴 짐들도 이곳에 있었다. 이 집이 중요한 곳이란 사실은 명확했다. 그는 잠깐 고민했다. 짐과 말들은 다 찾았고 악귀들도 다 죽였다. 그런데 굳이 이 안으로 들어갈 이유가 있을까.
없다. 들어갈 이유도 없지만 무시해야 할 이유도 없다. 엔디미온은 베로니카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녀는 눈치껏 마법을 사용해서 빛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통로 안쪽으로 보내자 한참 내려가다가 갑자기 꺼졌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간다.”
“굳이요?”
“그래, 굳이. 싫으면 여기 있던지.”
엔디미온은 망설임 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혼자 남은 베로니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불안했다. 내려가는 것도 불안하고 여기 혼자 남는 것도 불안했다. 똑같이 불안할 거라면 차라리 엔디미온이랑 함께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녀는 혼자 끙끙대다가 결국 아래로 내려갔다.
“아, 같이 가요! 엔디미온 씨! 같이 가요! 나 무섭단 말이야!”
허겁지겁 달려오는 베로니카를 보고 엔디미온은 한숨을 내뱉으며 제자리에 멈추었다. 그녀가 가까이 오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하는 어두웠다. 베로니카가 다시 마법으로 빛을 만들었다.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곳곳에 길이 많았다. 대체 어디로 통하는 것인지 모를 수많은 길들이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고 있었다. 마치 개미굴 같았다. 만약 여기서 길을 잃는다면? 이 답답한 지하에서 살아야 하는 건가? 베로니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하기도 싫었다.
“에, 엔디미온 씨······. 길은 알고 가시는 건가요?”
“아니.”
“그런데 너무 자신감 넘치게 가시는 거 아니에요? 지도도 없는데 이러다가 길 잃는다구요······.”
“지도가 왜 있어야 하는데. 길을 모르겠으면 벽을 부수고 가면 되잖아.”
말하는 것만 보면 성배기사가 아니라 망나니인데. 대체 백 년의 시간은 엔디미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일까. 베로니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 저기 빛이 보여요!”
베로니카가 말하기도 전에 엔디미온은 이미 빛을 발견한 후였다. 길의 끝에 위치한 모퉁이 부분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다. 주황색 빛이었는데 벽에 그림자가 비쳤다. 무언가 있는 것처럼 자꾸만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거칠게 숨이라도 쉬는 것일까. 베로니카는 으으 소리를 내며 엔디미온의 뒤에 찰싹 달라붙었다.
“야, 뭐해? 떨어져.”
“아니, 무섭단 말이에요!”
“겁은 많아가지고······.”
엔디미온은 손가락으로 베로니카의 이마를 꾹 눌렀다. 베로니카는 으아아 소리를 내면서도 억지로 버티려고 했다. 하지만 성배기사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마가 발개진 상태로 입만 비죽거렸다.
“먼저 들어간다. 무서우면 좀 늦게 들어오던지.”
엔디미온이 성큼성큼 걸어서 모퉁이를 돌았다. 주황색 빛이 눈 안으로 확 뛰어들었다.
“이건······.”
“왜요? 왜요?”
얼른 엔디미온의 뒤를 따라온 베로니카가 정면을 보고서 윽 소리를 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자 눈초리가 바르르 떨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입을 틀어막은 손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모퉁이를 돌자 나온 것은 공동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커다란 알이 있었다. 정말로 아주 컸다. 공동 안을 거의 채울 만큼.
공동 안에 있는 것은 달걀 같은 새의 알이 아니었다. 개구리의 것처럼 끈적거리고 미끈거리는 알이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처럼 자꾸만 꾸물거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수많은 태아들이 있었다. 올챙이처럼 작은 것도 있었고 제법 악귀의 형상을 갖춘 것도 있었다.
일정한 크기로 성장한 것은 알이 스스로 몸을 벌려서 악귀를 뱉어냈다. 베로니카는 방금 막 알이 뱉어낸 악귀를 보고서 구역질이 났다. 몸 곳곳에 점액질이 묻은 악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엔디미온을 쳐다보고서 눈을 끔벅였다.
“어어엄······마아?”
“소름 끼치는 소리 하지 마.”
엔디미온의 주먹이 악귀의 머리통을 부쉈다. 악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태어난 지 일 분도 지나지 않고서 맞이한 죽음이었다.
“왜 악마의 기운이 안 느껴지나 했더니 지하에 있었나.”
“저게 악마라고요? 저 기분 나쁜 알이?”
“그래. 악귀들이 어째 지성이 있다 했더니 이런 이유였군. 나도 이런 식으로 악귀를 생산하는 악마는 처음이야.”
“으······. 엔디미온 씨. 제발 이것 좀 빨리 처리해주세요. 너무 구역질나게 생겼어요!”
그것은 엔디미온도 동감이었다. 그는 어떤 식으로 악마를 처리해야 할 지 고심했다. 알을 찢어버리면 저 안의 양수 같은 것이 쏟아져 내릴 게 뻔했다. 어떤 식으로든 옷을 더럽히게 될 것 같아서 차라리 마법으로 태워버리면 어떨까 하고 생각 중일 때였다.
“기어코 여기까지 찾아왔구나. 이 성가신 놈!”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엔디미온의 목소리가 아니었고 베로니카의 것도 아니었다. 그럼 누구일까. 두 사람은 알을 쳐다보았다. 알이 꾸물거리면서 목소리를 냈다.
“침입자들을 죽여!”
공동은 수많은 길들과 연결돼 있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수많은 악귀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개미집을 건드렸을 때의 개미들처럼. 이곳은 생김새만 개미굴인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으악! 엔디미온 씨!”
수많은 길들에서 악귀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방금 엔디미온과 베로니카가 들어온 길에서도 악귀들이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베로니카는 바로 등 뒤에서 나타난 악귀들에게 붙잡혔고 엔디미온이 그녀를 구하러 가려고 했지만 수많은 악귀들이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제기랄. 엔디미온이 혀를 차며 악귀들을 주먹으로 날려버렸다. 그래도 베로니카에게 갈 수 없었다. 악귀들에게 사지를 붙잡힌 베로니카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흐흐흐······. 성가신 마법사부터 처리해주마.”
악귀들이 기분 나쁘게 웃으며 베로니카의 사지를 찢으려고 했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고 엔디미온이 어쩔 수 없이 성검을 뽑으려고 할 때였다.
“경로당 노인네들······.”
쾅 소리가 났다. 그 다음은 쿵 소리였다. 그리고 또 다음은 서걱 하는 소리였다. 엔디미온이 들어왔던 방향의 길 쪽에서 난 소리였다. 갑자기 악귀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베로니카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서 자신의 뒤쪽을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세 명의 사람이 있었다. 모두 아는 얼굴이었다. 악귀들은 그들에게 달려들었으나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영웅들이었으니까.
라이오넬이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집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