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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96화 (96/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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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는 등장에 그렇지 않은 대사였다. 뒤에 있던 비다르가 라이오넬을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야, 이 멍청아! 돌아온 영웅들이라고 말하랬잖아! 경로당 노인네들이 왜 나와!”

“누구냐! 누가 감히 천둥검의 라이오넬의 몸에 손을 대느냐!”

라이오넬과 비다르가 다투기 시작하자 라우렌시오가 마법으로 악귀들을 날려버리며 말했다.

“이봐, 일단 아가씨부터 구하고 다투자고.”

베로니카는 아직 악귀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지금은 악귀들이 갑자기 나타난 영웅들에게 시선을 빼앗긴 상태라 무사했지만 언제 사지가 찢길지 모르는 일이었다. 베로니카를 구해야 한다는 말에 비다르가 혀를 차며 라이오넬과의 다툼을 멈추었다.

라이오넬이 검을 휘둘러 길을 뚫었고 비다르가 주먹으로 악귀들을 날려버렸다. 그는 끈 때문에 주먹을 자유롭게 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악귀들을 학살하는 중이었다. 라우렌시오는 그 사이에 마법으로 베로니카의 곁으로 바로 이동했다.

악귀들이 깜짝 놀라서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화려한 검술에 목이 떨어질 뿐이었다. 라우렌시오는 싱긋 웃으며 베로니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구하러 왔습니다.”

“가, 감사해요. 덕분에 살았어요.”

베로니카는 악귀들에게 붙잡혔던 손목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악귀들의 힘이 어찌나 센지 손목에 발간 자국이 남았다. 그녀는 아직 얼얼한 손목을 한 번 턴 후에 말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그것도 세 명이 다 함께?”

라우렌시오가 미소 지었다.

“저는 기사고 기사도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지요. 아리따운 아가씨를 지켜야 할 의무 말입니다.”

“이상한 소리하지 마시고요.”

“쌀쌀맞군요. 제가 여기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제 말의 움직임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설마 아가씨께서 제 말을 타고 돌아다닐 리는 없고 당연히 산적이나 그런 것들이 나타났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바로 뒤쫓았는데 산채 안에는 아무도 없고 악귀들의 시체들뿐이더군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엔디미온 하나뿐이니 이 산채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라우렌시오의 말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는 말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었고 그 뒤를 쫓아온 결과 자신의 추리가 맞았음을 깨달았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누가 더 많은 악귀를 쓰러트릴지 내기하고 있는 비다르와 라이오넬을 보며 물었다.

“그럼 저 두 사람은요?”

“그냥 오다가 만났습니다. 둘 다 사슴을 쫓다가 길이라도 잃은 모양이지요.”

과연 엔디미온의 친구였다. 어쩜 셋이서 똑같을까. 베로니카는 다시 엔디미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라우렌시오가 베로니카를 구하는 것을 보고서 악귀를 죽이는데 집중했다. 악귀들은 개미들처럼 쉬지 않고 쏟아져 나왔지만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는 무려 네 명이나 되는 영웅들이 있었다. 한 명의 영웅만 있어도 악귀들을 모두 죽이고 악마까지 해치울 수 있는데 네 명이나 있으니 악귀들과 악마에게 승산은 없었다.

베로니카는 뒤로 물러나서 영웅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라이오넬이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많은 악귀들의 목이 떨어졌고 비다르가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사방으로 악귀들의 사지가 날아다녔다.

라우렌시오는 현란하게 검을 휘두르며 악귀들을 죽이고 마법으로 이곳저곳을 빠르게 돌아다녔다. 그러나 과연 돋보이는 것은 엔디미온의 활약이었다. 그는 손아귀 힘만으로 악귀의 머리를 으스러트렸다. 목을 뽑고 머리를 부수고 허리를 꺾었다. 그의 주변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악귀들이 쓰러져 있었다.

지켜보던 베로니카는 이 광경이 꿈처럼 느껴졌다. 겨우 네 명이서 끝도 없이 쏟아지는 악귀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들의 위용은 실로 비현실적이었다. 특등기사 네 명을 이 자리에 데려다 놨을 때, 똑같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을까? 물론 그들 역시 이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여유롭게 승리를 쟁취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지막.”

엔디미온이 악귀의 머리를 발로 으깼다. 바닥이 질척거렸다. 그는 몸에 묻은 오물들을 손으로 털어낸 후에 알을 향해 말했다.

“네 악행도 여기까지다.”

“······너희들 대체 뭐냐? 내가 지금까지 열심히 모은 수백 마리의 아이들을 겨우 네 명이서 다 죽이다니? 특등기사라도 되는 거냐?”

“악마사냥꾼 비슷한 일 하는 사람들이지. 이제 널 죽이겠다.”

알이 꾸물거렸다. 갑자기 알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미성숙한 악귀 한 마리를 화살처럼 쏘았지만 엔디미온의 주먹에 박살날 뿐이었다. 마지막 발악은 그걸로 끝이었다. 악귀가 체념한 듯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기랄, 이 냄새나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하며 때를 기다렸는데 결국 이런 꼴이라니.”

엔디미온이 성검을 뽑았다. 뤼미에르는 빛이란 뜻이었고 그녀는 세상 모든 빛의 공주였다. 이곳에는 횃불의 주홍색 빛뿐이었으나 성검은 그것을 오색찬란하게 반사했다. 마치 만화경의 일부 같았다. 베로니카는 숨을 참으며 성검의 자태를 감상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죽이기 전에 하나만 묻자. 왜 악귀들로 하여금 사람 흉내를 내게 했지? 왜 산채를 짓고 산적들로 위장했지?”

“내가 그걸 너한테 말해줘야 할 이유가 뭐냐?”

알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엔디미온이 싸늘하게 말했다.

“조금 덜 고통스럽게 죽기 위해서지. 난 지금까지 수많은 악마들을 죽였다. 그건 악마를 죽이는 수많은 방식을 알고 있다는 뜻이지. 난 널 단칼에 죽여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네 몸을 찢고 그 안을 헤집거나 몸에 불을 붙이고 상처에 재를 뿌릴 수도 있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치유하여 그 온갖 고통을 다시 맛보게 해줄 수도 있지. 선택은 네 몫이다.”

엔디미온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알은 몸을 꾸물거리다가 목소리를 냈다.

“······그래야 기사수도회에게 토벌당하지 않으니까. 그들은 사악한 것들이 나타났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토벌하지만 산적이 나타났다고 하면 신경도 쓰지 않거든. 그건 영주의 병사들이 할 일이고 그깟 놈들은 내 상대가 되지 않지. 그래서 산적으로 위장했던 거다.”

“산적들로 위장해서 사람들의 짐과 말을 뺏고 그들까지 잡아먹었던 거냐? 힘을 기르기 위해서?”

“그래, 내 아이들을 늘려서 근처의 도시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하지만 널 만나서 제대로 된 싸움을 하기도 전에 다 끝나버렸군. 이제 그만 날 죽여줘. 내 꼴을 보면 알겠지만 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너희가 내 아이들을 다 죽였으니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고 먹을 것을 먹지 못하면 새로운 아이를 만들어낼 힘도 없지. 난 이제 다 끝났다.”

엔디미온은 성검으로 알을 갈랐다. 안에 가득 들어찼던 양수가 튀어나오며 바닥을 적셨다. 알의 거대한 크기만큼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양수가 발목까지 들어찰 정도였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알을 죽여주는 것은 분명히 자비였으나 성배기사인 엔디미온이 그래야 할 의무는 없었다. 이대로 놔두고 돌아서는 것이 악마에게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럼에도 알을 죽인 것은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만에 하나 다른 악마가 알을 찾아내서 서로 힘을 합친다면? 더 큰 위협으로 자라날 것이다.

이것은 만약의 문제다. 엔디미온은 혹시나 모를 불씨를 남겨두지 않았다.

“위로 나가자.”

엔디미온이 움직이자 찰방찰방 소리가 났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뒤를 따라서 지상으로 올라갔다. 개미굴 같은 지형 때문에 지상으로 가는 길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크게 헤매지는 않았다. 엔디미온이 했던 말처럼 길이 없으면 만들면서 가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 엔디미온 일행은 집 안에서 자신들의 짐을 챙겼다. 그리고 집 안을 둘러보는데 다른 여행자들로부터 뺏은 짐들이 많이 있었다. 식량 같은 것은 악귀들이 전부 알에게 바친 것인지 하나도 없었고 대부분 잡동사니들만 남아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건질 게 있을까 해서 짐들을 뒤져봤지만 챙길 만한 것은 은화 몇 개가 전부였다.

엔디미온 일행은 은화를 챙겨서 바깥으로 나왔다. 그들은 혹시나 해서 다른 건물들도 뒤져보았다. 역시나 별 수확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곳은 무기고였는데 무기에 통일감이 없는 것으로 봐서 대부분은 여행자들에게서 뺏은 것인 듯 했다.

무기고 안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조잡한 창칼들이었는데 유독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무기고 제일 안쪽에 세워진 갑옷이었다. 바이저가 달린 투구부터 시작해서 사바톤까지 완벽했다. 거기에 손에 검까지 들고 있었다. 좀 낡기는 해도 이런 곳에 있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저거 뭐야? 갑옷도 있네.”

비다르가 갑옷에 가까이 다가갔다. 갑옷이 탐나서라기보다는 그냥 이런 곳에 저런 게 있는 것이 신기해서였다. 라우렌시오는 흠 소리를 내며 갑옷을 보다가 뒤통수를 스쳐지나가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투구의 바이저 너머로 노란색 안광이 불타올랐다.

“비다르!”

라우렌시오가 소리를 치는 것과 동시에 갑옷이 스스로 움직였다.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휘둘러서 비다르의 어깨를 베었다. 하지만 상처는 얕았다. 갑옷이 휘두른 검은 비다르의 단단한 근육을 뚫지 못했다.

“아야.”

비다르는 갑옷에게 바싹 달라붙어서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이 날아간 거리를 아주 짧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갑옷이 뒤로 날아가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각 부위가 분리됐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씹, 이거 대체 뭐야? 요즘 갑옷은 스스로 움직이나?”

갑옷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가 갑옷을 입고 기다렸다가 습격한 게 아니란 뜻이었다. 라우렌시오는 쓰러진 갑옷에게 다가갔다.

“이거 마법이 걸린 물건이군. 보통 때는 그냥 갑옷이지만 적을 만나면 스스로 움직여서 공격하는 그런 종류의 물건이야.”

“와······. 그런 마법도 있어요? 아마 은빛새벽회도 못할 것 같은데.”

“은빛새벽회?”

베로니카의 말에 라우렌시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자들이 백 년 전의 실력을 유지하고 있다면 가능하겠지. 라우렌시오는 발끝으로 사바톤을 툭툭 찼다.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은 딱 한 명뿐이야.”

엔디미온이 말했다.

“그게 누구냐. 너?”

“내가 바보냐? 이런 걸 기껏 만들어두고 아무데나 두게? 그리고 난 이런 걸 만들 정도의 실력이 없어. 이건 나도 못하는 일이라고.”

라우렌시오 정도의 마법 실력이라면 지금 시대에서 감히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은빛새벽회의 수장조차도 그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럼 라우렌시오보다 마법에 능통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건 바이올렛이 만든 거야. 백 년 전에 성기사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연구했던 건데 실전 투입이 되기 전에 우리가 대악마를 죽여서 없던 일이 됐지. 그런데 이게 왜 여기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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