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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으로 움직이는 갑옷은 라우렌시오도 만들지 못하는 귀한 물건이다. 그런 것이 왜 이런 곳에 있을까. 혼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겨우 악귀 따위나 부리는 악마가 이것을 수집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바이올렛이 악마에게 선물했을까?”
라우렌시오는 그 말을 하면서도 참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바이올렛이 악마에게 붙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정말 영웅들을 배신했다고 해도 다르디낭의 적자가 아니라 이런 저급한 악마와 협력할 리는 없었다. 만에 하나 정말 악마와 바이올렛이 서로 협력하는 사이라면 이 갑옷은 왜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을까.
“바보 같은 질문인 거 알고 있지?”
엔디미온의 말에 라우렌시오가 멋쩍게 웃었다. 그는 분해된 갑옷을 이리저리 확인했다. 갑옷의 각 부분 사이에는 마법적인 연결이 작용하고 있었는데 방금 비다르의 주먹에 맞고서 연결이 전부 끊어졌다. 때문에 다시 마력을 주입하더라도 움직일 일은 없었다.
라우렌시오는 흐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거 자세히 보니 연구 초기 때의 물건이군.”
라우렌시오는 바이올렛과 마법적 성향이 달랐다. 똑같이 마법을 배웠지만 라우렌시오에게 마술은 기술이었으나 바이올렛에게는 학문이었다. 지향하는 지점이 다르기에 도달하는 지점도 달랐다. 그런 이유 때문에 라우렌시오는 바이올렛의 연구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때로 그녀가 연구 일지를 보여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종종 연구의 결과물도.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연구 초창기 때의 물건이었다. 그때의 바이올렛은 완벽한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 수많은 갑옷들을 만들고 온갖 장소에서 시험했다. 산이나 들 그리고 강과 바다, 악마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기에 여러 곳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해야 했다. 워낙 많은 장소에 많은 갑옷들을 뿌린 탓에 가끔씩 제대로 수거가 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여기 있는 갑옷도 바론 그런 경우일 것이다. 라우렌시오는 발끝으로 사바톤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아마 이건 제대로 된 정비도 받지 못하고 작동이 정지된 상태로 산에 버려져 있었겠지. 악귀들은 이게 그냥 갑옷인 줄 알고 들고 왔을 거고.”
“아마 그게 맞는 것 같군. 설마 바이올렛이 이런 저급한 악마와 붙어먹었을 리가 없으니까.”
라우렌시오가 엔디미온을 보며 말했다.
“오, 바이올렛에 대한 신뢰가 대단한데. 너 요정은 안 믿는 거 아니었냐.”
“착한 요정은 믿지.”
“······죽은 요정 말이지?”
난쟁이 전사 칼라딘도 죽었으니 어쩌면 바이올렛도 죽었을지 몰랐다. 영웅들이라고 해서 불사의 존재는 아니었다. 백 년 전과 달리 영웅들은 추종자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기에 많은 적들을 만나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엔디미온, 마법 잘 쓰고 비밀 많은 요정을 뭐라고 하게?”
“배신자?”
“정답은 요정 마법사야. 너 그거 요정 혐오야.”
라우렌시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엔디미온은 입을 다물었고 비다르가 말했다.
“그래서 출발은 언제 하냐? 입지도 못하는 갑옷이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만에 하나 바이올렛이 배신했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거 없어.”
“왜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왜기는? 내가 때려잡으면 되잖아.”
라우렌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비다르를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넌 마법사한테 약하잖아. 분명 달려가는 중에 마법만 실컷 얻어맞고 뻗을걸.”
“시끄러! 가까이 붙으면 내가 이겨!”
“그러니까 가까이 붙을 수가 없잖아······”
“시끄러, 인마!”
지켜보던 베로니카가 킥킥 웃다가 비다르가 쏘아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나가자. 여기서 꾸물대고 있을 이유가 없군.”
엔디미온이 먼저 바깥으로 나가자 다른 사람들도 뒤를 따랐다. 라우렌시오는 가장 마지막까지 무기고 안에 남았다. 그는 쓰러져 있는 갑옷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바깥으로 나왔다.
바이올렛이 배신했을 리는 없다. 저것은 그저 우연찮게 이곳에 있었을 뿐이다. 심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라우렌시오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걱정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 뿐이었다. 그는 생각을 하느라 벌써 저만치 멀어진 일행들의 뒤를 쫓았다.
베로니카가 손을 흔들면서 얼른 오라고 소리쳤다. 라우렌시오는 웃으며 잰걸음으로 걸었다. 환한 웃음 뒤에는 그늘이 있었다. 그는 한 가지 생각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무기고를 나올 때부터 하던 생각이었다.
만약 바이올렛이 배신을 한 게 아니라면 갑옷은 왜 비다르를 공격했지?
***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머리가 뚝 떨어졌다. 그러자 악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머리의 썩은 살점들을 뜯어먹었다. 하늘에서 바람소리가 났다. 악귀들 몇 마리가 깽깽 소리를 내며 우악스런 발가락에 잡혀 하늘로 날아올랐다. 먹잇감을 붙잡은 거대한 악귀는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날아갔다.
다른 곳에서는 악마 두 마리가 악귀들끼리 싸움을 붙이고 그것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더 강력한 악마에게 둘 다 머리를 잡아 뜯겼다. 그 자리에서 게걸스럽게 식사를 하는 악마를 노리고 수많은 악귀들이 달려들었다.
이곳은 그런 장소였다. 서로가 서로를 먹잇감으로 생각하고 죽기 전에 죽여야 하는 곳. 모두가 사냥감인 동시에 사냥꾼이었다. 바람이 불 때면 비명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고서 더 많은 악마와 악귀들이 몰려들었다가 일부는 살고 일부는 죽었다. 악귀 한 마리는 다른 악귀에게 하반신을 물어뜯기면서도 자신이 잡은 사냥감을 씹어 먹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싸움이 끝없이 이어지고 언제나 살육의 바람이 불었다.
오직 악마와 악귀들만이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이 땅의 주인이 가진 강력한 힘으로 만들어진 이 공간은 오직 허락된 자만이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청객들이 가끔씩 찾아올 때가 있었다.
“너무 지저분한데. 좀 청소라도 하고 사는 게 어떠냐.”
싸늘하다 못해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불청객은 청색 망토를 두르고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주변의 악귀들이 불청객에게 관심을 보이며 몰려들었으나 가까이 가기도 전에 몸이 터져나갔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지켜보던 악마들이 몸을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지성이 없는 악귀들도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도망쳤다.
덕분에 불청객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이 죽음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 도달할 수 있었다.
“천둥군주 아르말락.”
천둥과 번개를 마음대로 휘두른다고 전해지는 악마의 이름은 아르말락이었다. 그는 이 무시무시한 공간의 주인이었고 대악마의 몇 안 되는 적자였다. 그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자는 오직 아버지와 형제들뿐이었다. 이 불청객은 아니었다.
아르말락은 수많은 다리들 중 하나를 움직여 불청객을 가리켰다.
“오랜만이구나.”
다리의 끝부분에서 창백한 빛이 번쩍이더니 불청객을 노리고 날아갔다. 아주 빠르고 강력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불청객은 손을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공기를 뜨겁게 달구며 날아간 창백한 빛은 불청객이 만들어낸 보호막에 부딪혔다.
강력한 공격과 충돌했음에도 보호막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빛을 반사하는 거울처럼 날아왔던 공격을 아르말락에게 되돌려 주었다. 악마는 거대한 다리를 휘둘러 빛을 쳐냈다. 그러나 흠집도 없이 공격을 막아낸 보호막과는 달리 빛을 쳐낸 다리는 검게 타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르말락은 상처 입은 다리를 재생시켰다.
“대단한 실력이야.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군.”
“이딴 짓거리를 하는 걸 보니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모양이지. 아니면 하나뿐인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냐.”
“이런, 너무 화내지 말라고. 그냥 가벼운 인사였어. 우리 사이에 이 정도 장난은 괜찮잖아.”
“우리 사이? 우리가 어떤 사이지?”
아르말락은 은근하게 웃었다.
“서로 같은 것을 바라는 사이.”
“목적이 같다고 해서 친구인 것은 아니지. 친한 척 하지 마라.”
“쌀쌀맞군. 백 년 전에 우리가 적이었을 때는 좀 더 재밌는······.”
쾅! 갑작스럽게 날아간 화염구가 아르말락의 다리를 몇 개나 태워버렸다. 마법사는 휘둘렀던 손을 다시 망토 안으로 숨겼다. 슬쩍 본 손가락은 아주 길고 가늘었다.
“입 닥쳐. 내가 친한 척 하지 말라고 말한 것 같은데. 그것도 방금 말이다.”
쌀쌀맞은 목소리에 아르말락이 조용히 다리를 재생시켰다. 그는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번에는 무엇 때문에 왔느냐.”
“성배기사 일행이 널 노리고 있다. 아마 며칠 내로 여기에 도착하겠지.”
“아, 그 촐랑거리는 요정 놈이 성배기사에게 고자질을 한 모양이군. 이거 겁나는걸.”
“빈정거리지 마. 충고하는 거다. 뷔브르와 로아니스가 누구에게 당했는지 알고 있나?”
아르말락의 수많은 다리들이 꾸물거렸다. 그가 거대한 몸을 마법사 쪽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뷔브르? 로아니스? 설마 성배기사에게 죽은 거냐?”
“그래. 비록 성배기사가 백 년 전보다 힘이 약해졌다고 해도 다르디낭의 적자를 둘이나 해치울 만큼 강하다. 너도 조심하란 소리야.”
“그럴 수가······. 믿을 수 없군. 그 둘이 죽었다니. 네가 직접 본 거냐?”
마법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자 안에 감추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약간 흘러내렸다.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보라색 머리카락이었다. 망토 안에서 손을 꺼내 흔들자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손가락 위에 착지했다. 마법사가 반대쪽 손으로 새를 쓰다듬자 수많은 깃털들로 화해서 사라졌다.
“아니. 나도 직접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마법사고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지.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들 말이다. 마법으로 보았다. 조만간 시체를 확인하러 갈 생각이야. 건질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흐음, 그래서 일부러 날 위해 충고하러 온 거냐? 감동적인걸.”
“난 그 징그러운 다리들을 몽땅 없애버리고 몸통만 남게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나 할 거면 입 닥쳐. 그리고 널 걱정하는 게 아니다. 내 목적은 이 세상의 멸망이고 그걸 위해서 너희들과 협력하는 거다. 너희들이 자만심에 빠져 대비를 게을리하다가 성배기사에게 토벌당하면 그건 내 손해야.”
“정말 친해지기 힘들군.”
“난 너랑 친해질 생각이 없으니까. 그럼 난 이만 가보겠다.”
“이봐, 그냥 가려고? 성배기사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데 매정하게 그냥 가는 거냐.”
마법사가 눈을 빛냈다.
“그럼 뭐? 같이 싸우기라도 해달라고? 내가?”
“오우, 눈빛이 무섭군. 꼭 그런 건 아니고.”
아르말락이 수많은 다리들을 꾸물거렸다. 짤막한 한숨과 함께 마법사가 말했다.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내 공방이 있다. 한동안 그곳에 머무를 건데 목숨이 위험해지면 호출해라. 반드시 시간에 맞춰서 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운이 나쁘면 네가 죽고 나서 올지도 모르겠군.”
“흐흐흐······. 너는 성배기사랑 싸우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
“두려워? 내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성배기사 역시 마찬가지야. 죽여야 한다면 무엇이든 죽인다.”
“옛날에는 샌님 같더니 이제 좀 마녀처럼 말하는구나.”
“하! 마녀? 난 마녀 따위가 아니다!”
모자 때문에 그림자가 진 마법사의 얼굴에서 보라색 안광이 스산하게 불타올랐다.
“룽고르의 마법사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