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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98화 (9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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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쏟아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이 따스했는데 오늘은 비가 내리니 갑자기 기온이 확 떨어졌다. 때문에 망토의 깃 부분을 단단히 여며야 했다. 그래도 비바람은 옷 안쪽으로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베로니카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늘이 흐렸고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시야가 나빴다. 이대로 쭉 달리면 말들도 비를 맞고 병이 날 게 분명했다.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았기에 오늘은 이만 가기로 했다. 근처에 동굴이 있기에 그곳으로 들어갔다.

“거의 다 왔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네요.”

목적지까지 하루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라우렌시오가 이 산만 넘어가면 바로 도착이라고 했는데 갑자기 내리는 비 때문에 더는 갈 수 없게 되었다. 하루를 허비하게 되는 셈이지만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 악마를 죽이나 내일 악마를 죽이나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땔감으로 쓸 게 없군.”

다들 비를 맞았으니 불을 쬐어 몸을 말려야 했다. 영웅들이 비 좀 맞았다고 감기에 걸리거나 하지는 않지만 굳이 옷이 젖은 채로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엔디미온은 동굴 안을 돌아다니며 땔감을 찾아다녔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라우렌시오가 마법으로 불꽃을 만들어내며 말했다.

“땔감은 없어도 돼.”

라우렌시오가 마법으로 만든 불꽃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분명 태울 것도 없는데 불꽃은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올랐다. 베로니카는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불꽃이 꺼지지 않는 것은 라우렌시오가 자신의 마력을 태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땔감 대신에 자신의 마력을 이용해서 불꽃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마력 소모가 많은 일인지 베로니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마법사였으니까. 라우렌시오는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은 채로 느긋하게 불길을 쬐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마력을 땔감 삼아 불꽃을 유지하는 것이 두 발로 땅을 걷는 것만큼 쉬운 일이라는 듯이.

“우와, 라우렌시오 씨. 정말 대단해요. 과연 영웅은 다르네요!”

“과찬입니다, 아가씨. 백 년 전의 마법사들이라면 다 하던 일인걸요. 물론 제가 좀 잘나긴 했지만.”

꼭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네. 베로니카는 쓰게 웃었다.

“그게 뭐가 대단하냐. 바이올렛이 있었으면 애초에 비 맞을 일도 없었는데.”

비다르가 신발을 벗어서 탁탁 털었다. 뒤집어진 신발 안에서 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비다르는 라우렌시오가 그런 것처럼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서 다리를 쭉 뻗었다. 꼼지락대는 발가락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바이올렛과 나는 서로 지향하는 방향이 다른 것뿐이야. 물론 그녀가 나보다 실력이 더 낫기는 하지만 비를 안 맞게 하는 마법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어. 내가 배웠다면 말이야.”

“그래서 배웠냐고, 어? 배우고 나서 말해.”

비다르와 라우렌시오가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베로니카는 망토를 벗어서 탈탈 턴 다음에 잘 마르도록 모닥불 근처에 널었다. 그리고 코를 막으며 말했다.

“비다르 씨, 발냄새나요.”

“뭐? 씨발 냄새나요? 야, 아무리 냄새가 나도 그건 아니지, 인마! 내가 너보다 다섯 배는 더 오래 살았는데!”

“아니, 발냄새가 난다고요!”

“발냄새? 그럴 리가 있나! 맡아 봐! 발냄새 안 나!”

“아, 발 치워요! 뭐하는 짓이야, 진짜!”

비다르가 얼굴에 발을 들이밀자 베로니카가 질색을 하며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보며 라우렌시오가 웃었다. 엔디미온과 라이오넬은 조용히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고 불을 쬐었다. 한참 비를 맞다가 따뜻한 온기를 맞이하니 절로 노곤해졌다. 동굴 입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덕에 비바람이 안으로 들어오는 일도 없었다.

동굴 안에 가득 찬 온기 덕분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잠에 빠져들었다. 라우렌시오만 잠을 자지 않고 모닥불을 지켰다. 한 시간 정도 자고 나자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다. 사람들은 누가 깨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베로니카는 비몽사몽한 채로 가방을 뒤지며 요리 준비를 했다.

솥에 빗물을 받아 모닥불 위에 올리고 가지고 있던 식량을 모두 잘게 썰어서 안에 부었다. 이게 마지막 식량이었다. 내일 악마와의 싸움을 끝내고 다시 식량을 사야 했다. 이번에는 어떤 것을 사지. 새로운 요리를 연습해볼까.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국자로 솥 안을 젓던 베로니카는 순간 흠칫했다. 내일이 되면 악마와 싸우게 된다. 그런데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다니. 영웅들과 함께 다니면서 온갖 일들을 경험한 탓에 성격이 변해버린 모양이었다. 하긴 저번에는 다르디낭의 적자가 두 마리였는데 이번에는 겨우 한 마리잖아. 겁낼 게 있나.

베로니카는 낙천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걱정한다고 무슨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요리의 간을 한 번 본 다음에 소금을 약간 쳤다. 이제 완성이었다.

“식사하세요.”

국자로 그릇에 스튜를 조금씩 나눠담았다. 모두 모닥불에 옹기종기 모여서 스튜를 마셨다. 따뜻했다.

“그런데 성검······. 아니, 뤼미에르 씨는 식사를 안 해도 되나요?”

베로니카가 국자로 스튜를 한 그릇 더 담으며 말했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성검이 왜 식사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어서?”

“그럼 안 해도 되나요?”

“우리처럼 음식물을 섭취하지는 않지만 사악한 것들의 살점을 먹기는 하지. 정확히 말해서 살점을 먹는 게 아니라 그 힘을 흡수하는 거지만.”

“오, 과연 성검이군요.”

엔디미온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성검이 흔들렸다.

“요정 아가씨, 날 챙겨주다니 고맙군. 난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음식을 먹을 줄 모르는 것은 아니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함께 식사를 할 수 있기를 빌겠소. 오늘은 좀 날이 그래서.”

“어, 혹시 오늘은 몸이 안 좋으신가요?”

성검에게 몸이 안 좋냐고 물어보는 게 참 바보 같았다. 베로니카는 질문을 하고서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청명한 웃음소리가 났다.

“아니오. 그냥 내가 비 오는 날을 싫어할 뿐이오. 축축하고 습하니까. 걱정해줘서 고맙소, 베로니카. 그럼 다음에 봅시다.”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성검의 목소리는 위엄과 무게감이 있어서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고 식사를 마저 끝냈다. 다른 사람들도 식사를 끝내고 빗물로 그릇을 씻었다. 뒷정리를 끝내고 다들 모닥불의 온기를 느끼며 휴식했다.

라우렌시오가 슬쩍 베로니카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이 요정이 왜 또 수작일까. 베로니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왜요?”

“오늘은 좀 한가하니 도움을 드리려고요.”

“도움이요? 전 도움 받을 게 없는데요?”

지금은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도움을 받을 게 있나? 베로니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우렌시오가 웃었다.

“아가씨도 마법사지요? 마법에 관한 도움을 좀 주려고 합니다. 제가 비록 바이올렛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답니다. 남을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제가 더 나을 겁니다. 아무리 마법 실력이 뛰어나도 남을 가르치는 건 별개의 문제거든요.”

“어······. 저한테 마법을 가르쳐주시려고요?”

백 년 전의 영웅에게 마법을 배운다니. 이것은 아주 귀한 기회였다. 라우렌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싸움은 위험할 겁니다. 그것도 아주 위험하겠지요. 그 악마는 영웅들 중 하나인 칼라딘을 죽였으니까요. 싸움이 격렬해지면 우리도 당신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법을 하나 가르쳐주도록 하지요. 내일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제가 내일이 되기 전에 새로운 마법을 익힐 수 있을까요? 시간이 너무 촉박한데요.”

라우렌시오는 빙긋 웃었다.

“간단한 마법이니까 금방 배울 겁니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잘 보세요.”

라우렌시오가 마법을 사용하자 빛이 번쩍이더니 갑자기 모습이 사라졌다. 베로니카가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자 엔디미온의 뒤에서 웃고 있는 라우렌시오가 보였다.

“우와, 이걸 가르쳐주신다고요? 이건 제 스승님도 못하는 마법이에요!”

“요즘 마법사들은 수준이 낮으니까요. 이걸 배워두면 위험할 때 도망칠 수 있을 겁니다. 자, 천천히 한 번 해봅시다.”

라우렌시오는 베로니카와 함께 마법을 연습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안 됐다. 하지만 라우렌시오는 다정한 목소리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베로니카는 열심히 마법을 배웠고 그 결과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 무려 세 시간이나 노력한 끝에.

“아니, 이걸 왜 못하지? 이거 엄청 쉬운 건데?”

천재는 범재의 마음을 모른다. 라우렌시오는 베로니카가 왜 마법을 배우는데 애를 먹는지 이해를 못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주 쉬운 마법이었으니까. 물론 그의 설명은 친절했다. 하지만 베로니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웠을 뿐이었다. 라우렌시오는 백 년 전 마법사와 백 년 후 마법사의 차이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이만큼 재능이 없을 줄은 몰랐군요.”

“······제가 얼마만큼 재능이 없는데요?”

“미안합니다. 내가 백 년 전의 마법사들을 기준으로 생각했군요. 수준의 차이를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긴 나도 개한테 마법을 가르쳐 본 적은 없으니까······.”

그럼 내가 개 수준이란 거야, 뭐야? 베로니카가 입을 비죽였다. 그녀는 라우렌시오와 함께 다시 마법을 연습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몸을 움직였던 것이 마법을 익히는데 도움이 됐다. 베로니카는 점차 더 많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때때로 마법을 잘못 사용해서 다른 사람 위에 떨어질 때도 있었다. 이번에는 자고 있던 라이오넬의 위로 떨어졌는데 그가 벌떡 일어나서 천둥검을 외치며 검을 휘두르자 베로니카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요.”

라우렌시오의 말에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각고의 노력 끝에 마법을 습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이상한 곳에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만족했다.

엔디미온 일행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악마와의 결전이 있는 날이었다. 충분한 숙면은 중요한 문제였다. 달은 밤에서 새벽으로 달리고 태양은 새벽에서 아침으로 달렸다. 태양과 달이 서로의 위치를 바꾸자 세상이 다시 깨어났다. 시끄럽게 귀를 때리던 빗소리가 멈추고 새가 지저귀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엔디미온 일행은 말들에게 먹이를 챙겨주고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바깥으로 나가니 햇살이 따스했다. 식물들은 물기를 머금고 싱그럽게 빛났고 새들이 소란스럽게 날아다녔다. 악마와의 싸움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날이었다.

“그럼 가자고.”

엔디미온이 말을 타고 달리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뒤를 따랐다. 아마 오늘 점심을 먹기 전에 악마의 영역에 도달할 것이다. 싸움이 멀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겁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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