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99화 (99/199)

99

“이제 얼마 안 남았군.”

엔디미온과 함께 선두에서 말을 몰던 라우렌시오가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손차양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협곡 안이었다. 주변 공기는 건조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구름이 일었다. 무언가 살기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었다. 짐승들도 없어보였고 식물이라고는 협곡 벽에 붙은 작은 관목들 몇 개가 전부였다. 잡아먹을 것이 없으니 악마도 굳이 이런 곳에 자리를 잡을 이유가 없어보였다. 그만큼 가혹한 환경이었다.

“이런 곳에 악마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악마는 사람을 잡아먹어야 한다. 그들을 괴롭히고 절망하게 만들어 부정적인 감정을 짜내야 했다. 그래야 그것을 흡수하여 더욱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당연히 사람이 없는 곳에는 악마도 없었다.

“아니, 있어. 입구가 숨겨져 있을 뿐이야.”

라우렌시오는 갈고리처럼 생긴 벼랑 아래에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말을 데리고 가면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만 할 거야. 그늘 아래에서 쉬게 두고 걸어서 가자.”

비다르가 말했다.

“그러다 말들을 도둑맞기라도 하면?”

“그럴 일은 없어. 여기는 아무것도 살지 않으니까.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 말이 보호할 거다.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어.”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서 내렸다. 그들은 말들이 벼랑 아래의 그늘에서 쉴 수 있게 줄을 메어두고서 입구를 찾아 떠났다. 라우렌시오는 벽을 더듬어 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허공에 손을 뻗으며 움직였다. 한참 동안 허공을 더듬던 그가 갑자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장막을 들추는 것처럼 뒤로 확 잡아당겼다.

천 따위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일그러졌다. 베로니카는 숨을 삼켰고 다른 사람들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라우렌시오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공간의 벌어진 틈 사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양쪽으로 힘껏 찢어버리자 희미하게 보였던 장막 너머의 장소가 갑자기 확 커졌다.

벌어진 공간의 틈에서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몸을 휘감았다가 사라졌다. 마치 뱀 따위가 몸을 스쳐지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베로니카는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거무죽죽한 대지였다. 마치 썩어버린 것 같았다. 하늘은 얼룩덜룩했다. 온갖 색들이 어지럽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끔찍한 곳이었다. 들어가는 것이 꺼려지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라우렌시오는 그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베로니카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그녀도 가야 했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해. 악마의 영역이니까.”

길 위에는 수많은 악귀들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사냥하며 배를 채우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역겨워서 베로니카가 얼굴을 찡그렸다. 어떤 악마는 악귀 수십 마리를 줄에 채워 데리고 다니면서 다른 악귀들을 사냥했다. 하늘에서는 넉 장의 날 개를 가진 악귀들이 날아다녔다. 그들은 죽은 악귀나 악마가 있으면 밑으로 내려가서 시체를 쪼아 먹었다.

“악마는 어디에 있지?”

“조금 더 가야 해. 저기 언덕 보이지? 저 위에 있어.”

라우렌시오가 손으로 언덕을 가리켰다. 언덕이라기에는 좀 크고 산이라기에는 좀 작은 곳이었다. 앙상한 나무들이 마구잡이로 자라고 있었다.

“멀지는 않군.”

엔디미온 일행은 언덕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움직이자 저들끼리 사냥을 하던 악귀들이 관심을 보이고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바로 덤벼드는 놈은 없었다. 겁을 내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만 살아온 그들에게 엔디미온 일행은 새로운 먹잇감이었다.

사냥을 하기 전에는 관찰을 해야 한다. 그리고 번개 같은 빠르기로 숨통을 끊어야 한다. 그들이 이곳에서 배운 생존방식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악귀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저들끼리 몸을 부딪쳐 싸움이 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조용히 엔디미온 일행의 뒤를 따라왔다.

“이상하군.”

삼십 분 정도 걸었을 때였다. 엔디미온이 걸음을 멈추고 언덕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제법 걸은 것 같은데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했지만 십 분 정도 더 걷고 나서 확신했다. 언덕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라우렌시오.”

나직이 이름을 부르자 라오렌시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오른쪽 손을 뻗자 그 위에 작은 불꽃 하나가 생겨났다. 입김을 불자 불꽃은 두둥실 떠서 언덕을 향해 움직였다. 불꽃과 라우렌시오의 손은 불꽃으로 이루어진 끈과 연결돼 있었다. 불꽃이 멀리 가면 갈수록 끈의 길이도 길어졌다.

끈의 길이는 자꾸만 길어졌다. 불꽃이 충분히 멀리 갔다고 생각했는데도 끈의 길이는 쉬지 않고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가도 불꽃이 저 언덕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라우렌시오가 주먹을 쥐자 끈이 끊어졌다.

“아무래도 우리의 방문을 환영하지 않는 모양이야.”

“직접 인사하러 왔는데 얼굴 한 번 안 보여주다니, 괘씸한 놈이군.”

베로니카가 주변을 향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럼 어떡해요? 우리는 여기 갇힌 건가요?”

“걱정할 거 없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인데요.”

엔디미온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기보다 더 하겠냐.”

그게 문제야, 이 인간아. 베로니카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쿵쿵 소리가 났다. 커다란 소리가 날 때마다 바닥이 흔들렸다. 베로니카는 비명을 지르며 엔디미온의 뒤에 숨었다. 그녀는 고개만 빼꼼 내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왼쪽이었다. 왼쪽에서 커다란 덩치의 거미가 다가오고 있었다. 여덟 개의 다리를 재게 놀리면서 이쪽으로 오는 중이었다. 누가 보아도 악마였다. 저게 악마가 아니라 대체 무엇이 악마란 말인가.

거미 악마 뒤쪽에는 수많은 새끼 거미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혐오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커다란 덩치의 거미도 역겨운데 그 밑에서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는 수많은 거미들이라니! 그것도 크기가 개만큼이나 커서 거미 머리에 달린 여러 개의 눈과 빳빳하게 자란 털들이 아주 잘 보였다. 베로니카는 얼굴을 찡그렸다.

가까이 다가온 거미 악마는 멀리서 보는 것보다 더 컸다. 이 정도 크기면 혼자서 성벽도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악마는 입 부분에 가위처럼 날카로운 한 쌍의 뿔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의 거미는 가지고 있지 않는 위협적인 무기였다. 거미 악마와 새끼 거미들이 나타나자 엔디미온 일행을 노리고 있던 악귀들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들이 거미 무리를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너는 누구냐.”

거미 악마가 대답을 하는 대신에 홱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수많은 새끼 거미들이 좌우로 갈라졌다가 울타리처럼 둥글게 원을 그렸다. 엔디미온 일행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는 것 같았다. 주변에 있던 악귀들이 달아났으나 완전히 모습을 감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싸움이 벌어지고 나면 그 후에 생길 시체를 노리는 것처럼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두 번 질문하게 하지 마라. 누구냐고.”

“이곳은 천둥군주 아르말락님의 영토고 나는 이곳을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노라.”

엔디미온은 거미 악마의 머리를 빤히 노려보았다. 여덟 개의 눈이 영롱하게 빛났다. 그는 지금 이 거대한 악마를 어떤 식으로 죽여야 할 지 생각하고 있었다. 악마숭배자를 상대하는 것과 악마를 상대하는 것은 그 방식이 달랐다. 힘의 차이가 아니라 육체의 차이였다. 악마숭배자는 목을 자르거나 심장을 찌르며 죽지만 악마들은 목이 떨어지고 심장을 찔려도 발광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처음에는 다리를 잘라서 넘어트린다. 그리고 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서 등껍질에 주먹을 박아야겠지. 그 다음은 벌어진 틈 사이를 두 손으로 잡고 찢으면 될 것이다. 그래도 안 죽는다면 성검으로 목을 자르고 심장을 찔러야 했다.

꼭 그런 식이 아니더라도 죽일 방법은 많았다. 선택의 문제였을 뿐이다. 엔디미온은 거미 악마가 지껄이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내 이름은 아난시, 청지기 아난시다! 너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새끼 거미들이 몸을 들어 뒤쪽의 네 다리로만 섰다. 그리고 나머지 다리로 엔디미온 일행을 위협했다. 그러나 그런 허접한 위협에 겁을 먹는 사람은 없었다. 엔디미온은 성검을 뽑을까 말까 고민하면서 말했다.

“그래, 아난시. 주인을 위하는 마음은 참 갸륵하구나. 그런데 이 정도 숫자로는 우리를 막기 힘들지 않을까? 널 걱정해서 하는 소리야. 지금 저기 있는 친구들도 좀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엔디미온이 손으로 악귀들을 가리켰다. 아난시는 코웃음을 쳤다.

“뭘 착각한 모양이구나. 이곳에 있다고 해서 전부 아르말락님의 하수인인 것은 아니다. 저들은 무리에도 끼지 못한 저급한 것들이고 저런 것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우리는 나약하지 않다. 나는 검은 거미 무리의 대장이며 우리는 이곳에서 가장 강한 무리다!”

악귀라도 다 같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각 악마와 악귀들이 속한 무리가 있고 그것들끼리 경쟁하는 듯 했다. 그리고 지금 주변을 떠도는 악귀들은 그런 무리에 속하지 못한 저급한 것들이고.

참 우스운 일이었다. 여기가 무슨 야생도 아니고. 엔디미온이 말했다.

“그래서 네가 청지기라고? 그럼 널 통해야만 아르말락을 만날 수 있는 거냐?”

“맞다!”

“네가 사술을 부려 우리를 이곳에 맴돌게 했고?”

“그래! 너희는 아르말락님께 갈 수 없다! 이 청지기 아난시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아난시가 입 부분에 달린 거대한 뿔을 휘둘러 바닥을 박살냈다. 엔디미온을 노리고 한 공격은 아니고 자신이 이만큼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돌덩이가 날아왔지만 엔디미온은 주먹으로 박살냈다. 다른 영웅들도 날아오는 돌덩이들을 잘게 부쉈다.

“자! 덤벼라! 너희에게는 오직 죽음뿐이다!”

짐승의 울부짖음이 귀를 때렸다. 아난시가 다리로 바닥을 때리며 쿵쿵 소리를 냈다. 그러자 새끼 거미들도 박자를 맞추어 바닥을 때렸다. 수십 마리의 거미와 거대한 악마가 내는 발소리는 전투의 함성처럼 느껴졌다.

엔디미온은 천천히 아난시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아까 돌덩이를 부술 때 생긴 돌멩이가 들려있었다.

“공연한 저항은 그만두고 얌전히 내 먹이가 되어라! 나는 너의 육신을 씹어 먹고 그 힘을 강탈하여 내 주인님께 바칠 것이니 천둥군주의 제물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라! 이제 곧 너희들의 세상은 멸망할 것이고 악마들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또한 대악마께서 부활할 것이며 천둥군주께서는 온누리에 대악마의 뜻을 전하는 기수가 되어······”

“야.”

“······종말의 경종을 울릴 것이니. 아니, 뭐, 뭐? 야? 야라고?”

엔디미온이 손에 잡고 있던 돌멩이를 위로 던졌다가 다시 받는 것을 반복했다. 그는 충분한 거리까지 다가간 후에 손에 들고 있던 돌멩이를 머리 위로 들었다. 그리고 던졌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공기를 찢을 듯한 기세로 날아간 돌멩이는 점차 가속하여 아난시의 머리 왼쪽에 부딪칠 때는 거의 창과 같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난시의 머리 절반이 날아갔고 뭉개진 살점과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액체들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난시는 머리 절반이 날아간 탓에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아우우 같은 소리를 냈다.

엔디미온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만 깝죽거리고 진짜 책임자 데려 와. 시간 길게 안 준다. 딱 십 초야.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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