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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00화 (10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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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시는 으어어 소리를 냈다. 머리가 절반이나 날아갔음에도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돌멩이에 머리를 맞은 충격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진 듯 했다. 악마는 자꾸만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머리를 흔들다가 역시나 절반만 남은 네 개의 눈으로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달렸다. 그 육중한 몸이 힘껏 달리자 쿵 소리가 나며 바닥이 박살났다. 아난시가 움직이자 새끼 거미들도 엔디미온 일행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들이 지르는 비명은 몹시 날카로웠다. 라우렌시오와 라이오넬이 검을 뽑았고 비다르가 새끼 거미 하나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베로니카는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마법을 사용했다.

“으어어어어!”

아난시가 입에 달린 두 개의 뿔로 엔디미온을 들이받으려고 했다. 이성이 날아가고 본능에 의존해서 하는 우악스런 공격이었지만 워낙 아난시의 덩치가 크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그가 있는 힘껏 들이받는다면 성벽도 무너트릴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엔디미온은 작았다. 인간 중에서는 아주 크지만 악마들에 비하면 작았다. 거인과 난쟁이가 맞붙는 꼴이다. 그러나 엔디미온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검을 뽑는 대신에 두 손을 아난시 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오히려 아난시 쪽으로 달렸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달리고 있으니 거리가 좁혀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악마와 성배기사가 충돌했다. 아난시는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가 힘차게 들어올리면서 엔디미온의 몸을 멀리 날려버리려고 했다. 무언가에 부딪치는 감각은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난시는 제자리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네 개의 눈이 빠르게 움직여 이게 무슨 상황인지 확인했다. 아난시의 거대한 뿔들은 엔디미온의 두 손에 붙잡혀 있었다. 아난시와 충돌할 때 두 손으로 붙잡은 것이다. 악마의 힘이 워낙 강력하고 커다란 덩치에서 나오는 충격이 어마어마했기에 엔디미온은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났지만 거기서 더 움직이지는 않았다.

근육들이 성난 듯 불끈거렸다. 덩치 차이가 몇 배나 나는 적을 상대로 버틸 수 있는 것은 모두 이 단단하게 단련된 근육들 덕분이었다. 아난시는 더욱 힘을 짜내 엔디미온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오히려 저쪽에서 그를 밀어냈다. 엔디미온이 한 발자국 다가오면 아난시는 한 발자국 물러나야 했다. 처음에는 한 발자국, 그 다음에는 두 발자국, 다음에는 세 발자국. 점차 밀려나는 걸음수가 늘어났다.

아난시는 괴성을 지르며 발을 세게 굴렀다. 여덟 개의 다리들이 바닥에 박혔고 이제 그 역시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엔디미온이라도 이 상태의 아난시를 밀어낼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꼴에 청지기라고 힘 하나는 대단했다.

“다른 공격은 할 줄 모르는 거냐? 그냥 들이받는 게 전부야?”

엔디미온이 비웃었다.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삼켰다. 그리고 호흡을 멈추고서 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일시적으로 근육들이 더 커졌다. 그는 자세를 낮췄다가 기합과 함께 다시 일어났다. 그의 두 손이 뿔을 위쪽으로 들어올렸다. 힘이 어찌나 강력했는지 아난시의 뿔들에 금이 갔고 그 상태에서 아난시의 몸이 천천히 위로 움직였다.

바닥에 박혀 있던 다리들이 뽑혀 나오고 거대한 몸이 위쪽으로 들렸다. 이대로 가면 아난시는 뒤로 넘어진 거북이처럼 버둥거려야 할 것이다. 악마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두꺼운 다리들을 휘둘렀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공격이지만 그게 제법 효과가 있어서 엔디미온을 한 대 후려쳤다.

엔디미온은 두꺼운 다리에 얻어맞고 오른쪽으로 날아갔지만 날렵하게 바닥을 한 번 구른 뒤에 다시 일어났다. 아난시는 겨우 엔디미온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의 악력 때문에 두 개의 뿔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성배기사가 주먹을 날린다면 금세 박살날 것이다.

“다른 재주는 없는 모양이군.”

아난시가 다시 달려들었다. 뿔로 들이받는 대신에 다리를 휘둘러서 공격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재빠르게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공격을 피했다. 그 다음에는 아난시가 휘둘렀던 다리 위에 착지했다가 다시 한 번 위로 뛰어올랐다. 성큼 뛰어올라 겨우 두 번의 도약만으로 아난시의 머리 위까지 날아오른 엔디미온은 눈으로 착지할 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키에에엑!”

아난시가 입을 벌려 하얀 거미줄을 발사했다. 공중에서는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엔디미온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빛이 번쩍였다. 섬광은 거미줄을 갈기갈기 찢었고 빛의 힘으로 정화하여 땅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엔디미온은 성검을 든 채로 아난시의 등 위에 착지했다. 그는 성검의 끝부분이 아래로 가게 잡은 뒤에 말했다.

“십 초 지났다.”

콰직! 성검은 아난시의 단단한 등껍질을 뚫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엔디미온은 성검을 아난시의 등에 박은 채로 머리를 향해 달렸다. 등껍질이 길게 갈라지면서 안에 들어있던 것들이 사방으로 튀어나왔다. 성검의 신성한 힘은 악마의 육체를 불사르고 있었다. 아난시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흔들었다.

거대한 덩치의 악마가 난동을 부리는 탓에 주변에 있던 악귀들이 모두 도망쳤다. 새끼 거미들도 아난시가 발을 한 번 구를 때마다 몸이 약간 떠올랐다가 다시 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엔디미온은 아난시의 머리 근처까지 가서 성검을 뽑았다. 성검에는 지저분한 액체가 묻어 있었지만 잠깐 사이에 모두 증발하여 사라졌다.

“널 죽이면 아르말락이 나오든 누가 나오겠지.”

성검이 아난시의 머리를 홱 베었다. 거대한 덩치만큼 머리의 크기도 상당했지만 성검은 가뿐히 머리를 잘랐다. 쿵 소리가 나며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새끼 거미들이 더욱 발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은 영웅들에게는 부질없는 짓거리일 뿐이었다.

그들이 새끼 거미까지 모두 죽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날렵한 동작으로 아난시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사뿐히 착지한 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망갔던 악귀들이 다시 몰려들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노리는 것은 수많은 새끼 거미와 아난시의 시체였다.

“아르말락! 모습을 드러내라! 성배기사가 왔다! 이곳에서 숨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엔디미온이 크게 소리쳤으나 아르말락이 직접 나타날 기색은 없었다. 그는 아르말락이 있다고 하는 언덕을 노려보았다. 성가시게 하는군.

“으하하하! 목청 한 번 크구나!”

목청이 크다고 말하는 주제에 자기는 더 컸다. 엔디미온 일행은 얼른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왼쪽 방향에서 악마 한 마리가 악귀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악마는 몸이 새빨간 색이었고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있었다. 오른쪽 손에는 할버드를 들었고 왼쪽 손에는 쇠사슬을 들고 있었다. 가죽갑옷을 입은 것이 악마라기보다는 거인 전사처럼 보였다.

“성배기사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난동을 부리느냐! 이 청지기 아말리오가 너에게 벌을 내리겠다!”

엔디미온은 아난시를 한 번 보았다가 다시 아말리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네가 여기 책임자냐?”

“책임자? 그것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 난 강철 무리의 대장이자 청지기다. 날 쓰러트리기 전에는 아르말락님을 만날 수 없다.”

“아까 저 거미는 자기가 청지기라고 하던데. 이 사술을 부린 것도 자기고. 그건 거짓말이었던 모양이군?”

“아난시 말이냐? 아니, 그 덜떨어진 놈도 청지기는 맞다. 나도 청지기고. 정확히 말해서 이곳에서 무리를 이끌고 있는 악마들 전부가 청지기다. 아르말락님께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무리를 이끄는 악마들뿐이니 그들 전부가 청지기인 것이지.”

“잠깐, 너희 전부가 청지기라고? 그럼 청지기의 총원은 얼마인거냐?”

아말리오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난시와 나를 합쳐서 총 서른이다! 으하하하!”

씨발, 그럼 스물아홉 마리의 악마를 더 죽여야 끝나는 거잖아. 엔디미온은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하긴 뷔브르도 서른셋 악마를 이끌고 있었으니 아르말락 역시 그만한 숫자의 부하를 두었을 것이다.

“너, 혹시 친구가 몇이나 되지?”

“친구? 악마는 그런 것 따위 없다! 오직 지배하고 착취할 뿐이지! 그게 악마다!”

“아니, 그래도 청지기들 중에서 친하게 지내는 놈들이 있을 거 아냐. 설마 서로 다 적이냐?”

아말리오가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음······. 나랑 우호적인 악마들이 몇몇 있기는 하지. 그런데 그건 왜 묻느냐?”

“그럼 지금 불러.”

아말리오는 할버드의 끝부분으로 바닥을 쾅 소리가 나게 찍었다.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내밀어 엔디미온을 향해 말했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나는 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많은 악마들을 죽였다. 셀 수도 없다는 건 비유가 아니야. 과장도 아니고. 내가 죽인 악마들은 모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뷔브르가 그랬고 로아니스가 그랬지.”

엔디미온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낮고 무게감이 있었으며 날카로웠다.

“그런데 성배기사인 내가, 지금까지 죽인 악마들에 비할 수 없이 약해빠진 너희 같은 놈들을 하나씩 상대해줘야 한다는 거냐? 그게 격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말리오의 벌건 얼굴이 더욱 새빨간 색이 되었다.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할버드를 꽉 쥐었다. 그의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악귀들이 짐승의 울음소리를 냈다. 당장 달려나가서 저 건방진 놈을 찢어버리겠다고 말하는 듯 했다.

엔디미온은 픽 웃으며 성검으로 아말리오를 겨누었다. 고개를 까닥이며 얼른 덤비라고 신호했다.

“······이 건방진 놈. 네가 그리 안달하지 않아도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넌 우리 청지기들의 강력함을 모른다! 그리고 친구를 데려오라고? 네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다! 아난시의 소동 때문에 다들 움직이고 있으니까 말이다. 네가 과연 청지기들이 이끄는 무리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말리오의 말대로 사방에서 쿵쿵 소리가 났다.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악마와 악귀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엔디미온은 그들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비다르의 등 뒤에 숨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왼쪽에서 무리를 이끈 악마 두 마리가 나타났다. 오른쪽에서 악마 다섯 마리, 그리고 정면에서 다섯 마리, 뒤쪽에서 여섯 마리. 그리고 그들 외에도 청지기들이 속속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아난시는 죽었으니 남은 청지기들은 스물아홉. 그리고 그들이 밑에 수백 마리에 악귀들을 이끌고 있으니 이 자리에 수천 마리의 악귀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에 비해 엔디미온 일행은 겨우 다섯 명. 대체 인당 몇 마리의 악귀를 죽여야 하는 걸까.

베로니카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내가 못살아, 못살아! 왜 괜히 도발해서 일을 크게 키우세요!”

엔디미온은 늘 그랬던 것처럼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오히려 좋아.”

“오히려 좋기는! 대체 뭐가 좋은데요!”

성배기사는 옛 영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옛날 생각나서 좋잖아.”

모두가 웃었다. 베로니카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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