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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미쳤어, 정말······.”
베로니카가 중얼거리는 사이에 영웅들은 싸울 준비를 했다. 청지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난시를 제외하고 스물아홉. 그들이 전부 모이자 아말리오가 할버드로 바닥을 쿵 찍었다.
“위대한 아르말락님의 청지기들이여! 성배기사와 그 일당들이 우리를 우습게보고 감히 무기를 들이미니 죽음으로 참회하게 만들어라! 아르말락님을 위하여!”
아말리오가 할버드를 머리 위로 들면서 함성을 질렀다. 그 소리에 악귀들이 호응했고 금세 전투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가장 먼저 성배기사의 목을 베는 자에게는 큰 상이 있을 것이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아르말락님뿐이다!”
악마와 악귀들의 기세가 올랐다.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과 흥분한 목소리, 짐승의 울음소리, 그리고 바람소리. 온갖 것들이 한데 모여서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어냈다. 얼룩덜룩한 하늘과 거무죽죽한 땅이 배경이 되니 그야말로 지옥의 광경이었다.
기세등등해진 아말리오가 왼손에 든 사슬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을 때였다. 청지기 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소의 머리를 가진 거인이었다. 그가 콧김을 내뿜을 때마다 보라색 연기가 흘러나왔다.
“아말리오.”
“오, 라굴라. 오랜만이군. 지난번 싸움 이후로 처음인가.”
라굴라는 연신 콧김을 내뿜었다. 투우장의 성난 소 같았다.
“우리 모두는 너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청지기다. 우리들의 대장이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는 건 그만해라. 그 역겨운 입을 잘라버리기 전에 말이야.”
“라굴라, 이 주제도 모르는 놈. 내게 지고 도망치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한데 이 상황에서 자존심을 세우느냐?”
“하! 한 번 졌다고 두 번도 질까. 싸움이라 언제든지 환영이다!”
“지금 나를 도발하는 거냐?”
아말리오와 라굴라가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그 모습을 보며 베로니카는 제발 서로 싸우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둘 다 거기까지 해라. 우리의 목적은 성배기사잖나. 서로 자웅을 가리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서로 다투는 두 청지기를 중재한 것은 염소처럼 수염을 길게 기른 악마였다. 키는 아말리오와 엇비슷했지만 덩치는 그 반쪽이었다. 얼굴에는 수십 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고 머리에는 신사처럼 모자를 썼다. 손에는 짤막한 완드를 들고 있었다. 마법사라기보다는 마술사 같은 생김새였다. 모자에서 비둘기를 꺼낼 것 같은 그런 생김새였다.
“나중에 보자, 라굴라.”
“바라던 바다. 나중에 도망치지나 마라!”
아말리오와 라굴라가 서로 떨어졌다. 중재를 끝낸 악마가 웃자 입이 좌우로 길게 찢어지며 뱀처럼 기다란 혓바닥이 튀어나왔다. 라굴라는 웃고 있는 악마를 향해 말했다.
“너도 주제넘게 끼어들지 마라, 샤락스. 세도 약한 것이 건방지게 말이야.”
샤락스가 가진 수십 개의 눈들이 라굴라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들이 다투는 것을 지켜보던 엔디미온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서 언제 싸울 거냐.”
“언제 싸울 거냐고? 멍청한 놈! 우리는 언제든지 싸울 수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말이야!”
호전적인 성격인 라굴라가 먼저 엔디미온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싸움이 시작됐다. 스물아홉 악마들이 부하들을 이끌고 엔디미온 일행을 습격했다. 아말리오와 라굴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엔디미온을 노렸다. 두 악마가 거대한 덩치로 바닥을 진동시키며 달려왔다.
“에투알.”
“아, 싸울 때인가! 잠깐 졸았소.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성검 에투알! 악을 베는 것이 내 역할이지! 가자고, 내 기사님!”
왜 이리 신났어. 엔디미온은 픽 웃었다. 아무래도 백 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싸움을 하는 탓인 듯 했다. 성검이 빛을 발했다.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을 끝내는 여명의 빛이었다.
“죽어라, 성배기사!”
라굴라가 손에 들고 있던 철퇴를 휘둘렀다. 엔디미온은 슬쩍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정면으로 뛰었다. 철퇴는 허공을 가르고 애꿎은 바닥만 박살냈다. 그 사이에 라굴라의 다리를 베려고 하는데 갑자기 아말리오의 할버드가 날아와 진로를 방해했다. 그 다음은 사슬이 날아와 엔디미온의 몸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를 오래 붙잡아둘 수는 없었다. 사슬을 당겨 엔디미온을 끌어오려는 순간 그가 일신의 힘만으로 사슬을 끊었다. 차르륵 소리가 나며 끊어진 사슬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엔디미온은 아말리오를 향해 달렸다.
“네 상대는 나다!”
다시 한 번 라굴라의 철퇴가 바닥을 때렸다. 엔디미온은 두 눈을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누구부터 처리할까. 그는 라굴라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그래, 덤벼라! 내가 널 산산조각 내주마!”
엔디미온이 라굴라를 향해 달리자 악마는 철퇴를 매섭게 휘둘렀다. 묵직한 철퇴를 자꾸만 휘두르니 가까이 접근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철퇴와 부딪히기 일보직전의 상황에서 미끄러지듯 몸을 던졌다. 아슬아슬하게 철퇴가 그의 머리 위를 스쳐지나갔다.
곧바로 다시 일어나서 다리의 탄력을 이용해 라굴라를 향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라굴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철퇴를 뒤로 당겨서 다시 후려칠 준비를 했다. 그 사이에 아말리오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끊어진 사슬을 바닥에 던지고 할버드를 내질러 엔디미온의 뒤를 찌르려고 했다.
정면과 후방에서 엔디미온을 철퇴와 할버드가 날아왔다. 양쪽 다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누구라도 오금이 저릴 듯한 상황에서 엔디미온이 취한 행동은 간단했다.
오른쪽으로 뛰기.
“엇?”
“이 멍청한!”
챙! 날아오던 철퇴와 할버드가 서로 부딪쳤다. 엔디미온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버린 탓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오던 두 무기가 서로를 노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라굴라가 신경질적으로 철퇴를 뒤로 회수했다. 힘껏 휘두른 무기들이 부딪힌 탓에 손목이 저릿했다.
그는 애써 고통을 무시하며 엔디미온을 향해 철퇴를 내리쳤다. 쾅 소리가 나면서 바닥이 다시 한 번 박살났다. 돌조각들이 공중으로 튀었고 그가 다시 한 번 공격을 하려는 때였다.
“어?”
바닥에 엔디미온이 없었다. 어디를 보아도 없었다. 설마 철퇴에 맞고 짜부라졌나? 하지만 바닥에는 그런 흔적이 없었다. 정말로 엔디미온을 제압했다면 라굴라가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 어디지?
“어딜 보는 거냐.”
라굴라는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오싹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공중에는 아직 바닥이 박살난 충격으로 튀었던 돌조각들이 있었다. 천천히 떨어지는 그것들 중 하나가 십자 모양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그 뒤에서 엔디미온이 나타났다.
그는 죽은 것도 아니었고 어디로 도망친 것도 아니었다. 바닥이 박살날 때 돌조각들과 함께 공중으로 뛰어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돌조각 뒤에 숨어서 라굴라가 방심한 틈을 노리고 있었다.
“와봐라!”
라굴라가 눈을 부릅떴다. 기세는 나쁘지 않았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거대한 머리는 눈을 부릅뜬 채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다음은 머리를 잃은 몸통이 쓰러졌다.
가뿐하게 바닥에 착지한 엔디미온은 다시 뒤로 돌아서 아말리오를 끝장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할버드가 날아와 그의 몸을 후려쳤다. 갑작스런 공격에 엔디미온은 뒤로 홱 날아갔다. 악귀들 사이에 떨어졌으나 신성한 빛이 터져 나오며 그것들을 모두 날려버렸다.
“죽여주마!”
아말리오가 쿵쿵 소리를 내며 질주했다. 그의 기세는 성난 짐승과 같았으나 그것은 후광을 뿜어내는 성배기사를 상대로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창날의 이가 나갔다. 그 다음에는 창대가 부러졌다. 다음에는 손목이 떨어지고 또 다음에는 어깨, 마지막은 목이였다.
아말리오는 성배의 힘을 다루는 엔디미온을 상대로 열 합도 버티지 못했다. 거대한 몸이 라굴라가 그랬던 것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주인을 잃고 통제에서 벗어난 악귀들이 날뛰었지만 모두 성검의 빛 아래에 재가 될 뿐이었다.
엔디미온은 순식간에 청지기 둘을 해치운 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베로니카도 아직 무사했다.
영웅들 중에서 가장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있는 것은 당연 라우렌시오였다. 비다르가 아무리 주먹을 날려봤자 결국 한 번에 한 마리를 죽일 뿐이고 라이오넬이 검을 휘두르면 한 번에 서너 마리를 죽일 뿐이었다.
하지만 라우렌시오가 마법을 한 번 쓸 때마다 악귀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그의 마법은 악마에게도 치명적이었다. 뒤에서 악귀들을 지휘하던 한 악마가 날아온 화염구를 맞고 바닥을 뒹굴었다. 자연히 청지기들은 라우렌시오를 먼저 죽이려고 했다. 수많은 악귀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가 온갖 마법을 맞고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저 주문쟁이를 죽여! 죽이란 말이다!”
글자 그대로 악귀들을 무더기로 소비하여 겨우 라우렌시오에게 접근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요정기사라 불리는 그는 검술 실력 역시 상당했다. 마법과 적들을 학살하고 검술로 자신을 보호했다. 그리고 위험해질 것 같으면 마법으로 도주. 마지막으로 적들을 향해 크게 웃으며 도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하하! 네깟 놈들이 아무리 용을 써봐라! 내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있는지!”
“저쪽이다! 공격해!”
“하하핫! 어딜 공격하는 거냐! 느리구나, 느려! 난 여기 있다!”
비다르와 라이오넬의 보호를 받으며 마법을 날리던 베로니카는 라우렌시오의 활약을 보고서 감탄했다. 같은 마법사지만 수준이 달랐다. 마법의 수준이 아니라 적을 농락하는 수준이. 강철과 마법을 숭배하며 갑옷을 입어 마법사의 생존력을 늘리고 독립적인 작전 수행 능력을 키우려고 했던 은빛새벽회가 보면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저런 식으로 적을 농락하면 갑옷을 안 입어도 되잖아? 물론 저게 가능한 것은 라우렌시오 혼자일 것이다. 점멸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은 이 시대에서 라우렌시오와 불완전하게나마 쓸 수 있는 베로니카뿐이니까.
“재롱잔치라도 하는 거냐? 그럼 좀 더 열심히 해봐라! 난 여기다!”
마법으로 사라졌다가 악마의 뒤쪽에서 나타난 라우렌시오가 검으로 악마의 심장을 찔렀다. 악마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그 순간 갑자기 바닥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아오르더니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았다. 조이는 힘이 상당했고 몸부림친다고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게 뭐지? 라우렌시오의 얼굴에 궁금증이 떠오를 때였다.
“죽음의 불꽃이여!”
검은색 불꽃이 라우렌시오를 향해 날아왔다. 기세가 엄청났다. 일직선상에 있던 악귀들까지 모두 태워버렸다. 악귀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불꽃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모두 불살랐다. 그림자에 붙잡혀 있던 라우렌시오는 도망도 치지 못하고 그대로 불꽃에 집어삼켜졌다.
“뭐야, 씹? 야, 라우렌시오!”
비다르가 소리치자 검은색 불꽃이 소용돌이치면서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라우렌시오를 집어삼키고 기세가 오른 것 같았다. 비다르는 주먹을 꽉 쥐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가 라우렌시오를 공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에 아말리오와 라굴라의 싸움을 중재하던 악마였다.
샤락스는 완드를 흔들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영웅이라고 해도 별 거 아니······.”
화아아악! 불꽃이 세차게 타올랐다. 마법을 썼던 샤락스조차 놀랄 만큼 엄청난 기세였다. 불꽃의 회오리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였다. 그것은 힘차게 회전하다가 다시 역방향으로 회전하며 축적했던 힘들을 사방으로 방출했다.
비다르는 얼른 뒤로 돌아서 베로니카를 보호했다. 불꽃이 쓸고 지나간 등이 화끈거렸다. 영웅의 단단한 살갗을 태울 만큼 강력한 공격이었다. 씨발, 대체 뭐야? 비다르가 다시 등을 돌려 정면을 보았다.
“지금 감히 내게······.”
목소리는 처음에는 미성이었다가 점차 낮아졌고 다음에는 탁해졌다. 청년의 것이었다가 중년의 것이었으며 마지막에는 노년의 것이었다. 샤락스는 완드를 내밀었다. 완드 끝부분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하지만 곧 꺼졌다. 뭐? 샤락스가 깜짝 놀라서 완드를 쳐다볼 때였다.
“······마법으로 도전하는 게냐?”
돌풍이 불면서 시꺼먼 연기가 사라졌다. 샤락스가 들고 있던 완드에 갑자기 불이 붙더니 그대로 주인을 집어삼켰다. 악마가 비명을 질렀다.
“주제를 알아야지, 이 천둥벌거숭이야!”
불타던 샤락스의 몸이 찢어졌다. 다른 뜻은 없다. 말 그대로 찢어졌다.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베로니카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비명이 나올 것 같았다.
“건방진 놈! 내가 누구인지 알아라! 나는 요정기사 라우렌시오다!”
베로니카는 연기가 걷히고 나타난 라우렌시오의 모습을 보고 숨을 삼켰다. 거기에는 잘생긴 요정 청년이 아니라 희게 센 머리카락을 가진 노인이 있었다. 그가 진정한 힘을 개방하면서 노화를 숨기던 마법이 사라진 것이다.
노인이 된 라우렌시오는 유쾌함이 사라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나이를 먹은 탓인 듯 했다.
악마와 악귀들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 라우렌시오를 보며 주춤거릴 때였다. 그때 장님이라 상황을 모르고 혼자서 열심히 싸우던 라이오넬이 악귀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그리고 난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