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02화 (102/199)

102

라이오넬이 악귀들 사이에서 종횡무진으로 날뛰었다. 그에 질세라 라우렌시오 역시 마법을 부리며 악귀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마법을 한 번 쓸 때마다 무더기로 적들이 죽어나가는 탓에 비다르는 들고 있던 주먹을 내리고 손목을 한 번 털었다.

노년의 라우렌시오는 자비가 없었다. 수많은 적들을 한꺼번에 죽였고 단 한 번의 반격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고 육체가 약해진 탓에 검술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마법 실력은 한층 더 대단해졌다. 여전히 바이올렛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강력했다.

비다르는 악귀들이랑 싸우겠답시고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게 멍청한 짓이란 것을 알았다. 괜히 나서다가 라우렌시오의 마법에 휘말릴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뒤에서 베로니카를 지키는 것을 택했다. 밉상의 꼬맹이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함께한 정이 있었다. 백 년 전에도 그랬지만 아는 사람이 죽는 것은 언제나 입맛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맛있는 식사를 위해서도 베로니카가 죽는 것은 사양이었다.

“다들 잘 하고 있군.”

엔디미온은 성검을 들고 악마들과 싸웠다. 청지기들의 우선적인 목적은 성배기사의 목이었다. 라이오넬과 라우렌시오는 악귀들에게 상대하게 두었다. 다섯 마리의 청지기들이 한꺼번에 엔디미온에게 덤볐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그들은 몸의 일부가 잘려나가고 비명과 함께 초록색 피를 쏟았으며 마지막에는 성검에 심장을 찔렸다.

방금 전에 싸웠던 아말리오와 라굴라가 그래도 청지기들 중에서 강한 축에 속하는 것 같았다. 다섯 마리의 청지기들은 그들 두 명만큼의 실력이 아니었다. 덕분에 엔디미온은 별 상처도 입지 않고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일곱 마리의 청지기들을 죽였어도 아직 상대해야 할 적들은 많이 남아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싸움은 아주 괴로운 일이었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너무 지겨워서.

마치 재미도 없는 놀이를 억지로 반복해야 하는 아이와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몇 마리나 더 죽여야 하지? 엔디미온은 속으로 셈을 하면서 악마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그의 몸은 곧 악마들의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더러움은 없었다. 오히려 고행을 이어나가는 수행자처럼 거룩했다.

피 때문에 축축해진 머리카락이 이마에 착 달라붙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탓에 음영이 진 얼굴에서 고요한 두 눈이 빛났다. 그것은 죽음이 무가치해진 처형인의 눈이었다.

“키아아아악!”

악마와 악귀들이 그에게 덤볐다. 검을 내려치자 악귀 하나가 세로로 길게 갈라졌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진 시체가 툭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악귀들은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와 같았다. 부딪칠 때마다 포말처럼 잘게 부서졌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다시 몰려왔다.

의미 없는 짓거리였다. 엔디미온도 알고 악귀들도 알았다. 청지기들 역시 알았다. 그럼 아르말락은? 그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이건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시간 보내기였다. 엔디미온은 열한 번째 청지기의 목을 베었다. 열두 번째의 의미 없는 짓을 하려고 할 때였다.

“후퇴해라! 후퇴해!”

청지기들이 악귀들과 후퇴했다. 그들 스스로가 이 의미 없는 짓을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열 마리도 넘는 청지기들이 죽었을 때 겨우 결정내린 후퇴였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르말락의 종복이자 하수인이니 싸우고 도망치는 것 모두가 오직 그들 주인의 뜻이었다.

엔디미온은 언덕 위를 보았다. 아까와 달라진 점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만 걸으면 저 위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청지기들이 후퇴한 것은 곧 아르말락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엔디미온 일행을 초대한 것과 같았다. 저곳에서의 싸움이 진짜였다. 이곳에서의 무의미한 짓이 아니라.

“이 사악한 것들아 어딜 도망치느냐!”

라이오넬과 라우렌시오가 도망가는 청지기들의 뒤를 쫓으려고 했지만 엔디미온이 제지했다. 라이오넬은 혀를 차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라우렌시오는 주름이 진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것은 힘 있는 말이었고 그것 자체로 마법이었다.

따스한 빛이 춤추듯 내렸다. 얼굴에 자글자글했던 주름들이 사라지고 다시 생기가 찾아왔다. 색을 잃었던 머리카락 역시 호밀이 자라듯 빠르게 금색으로 돌아왔다. 약간 굽었던 허리가 곧게 서고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당당해졌다.

잠깐 사이에 다시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라우렌시오가 숨을 크게 삼켰다가 다시 내뱉었다. 그가 빙긋 웃었다.

“이런, 추태를 보였군. 내가 가끔 이래. 화가 나면 주체가 안 될 때가 있어. 다들 그런 적 있지 않아?”

“너만 그래.”

비다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라우렌시오가 웃었다. 베로니카는 그가 두 개의 인격을 가진 게 아닐까 의심했다. 나이를 먹었다고 갑자기 성격이 바뀔 수가 있나?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백 년 전의 라우렌시오는 누구나 우러러보는 영웅이었으나 지금의 그는 도망자일 뿐이었다. 청년 시절의 모습이 그가 누렸던 영광을 상징한다면 노년 시절의 모습은 그의 비참함을 나타냈다. 나이를 먹고 성격이 정반대로 홱 돌아버렸어도 납득할 만한 것이다.

“다들 다친 곳 없나? 없으면 얼른 가자고. 오래 끌 일은 아니니까.”

엔디미온의 말에 모두가 언덕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아르말락이 있었다. 그리고 그를 죽이면 이번 일은 끝이었다. 엔디미온 일행은 언덕을 향해 걸었다. 너무 느리지도 않고 너무 빠르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흥분도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다. 산책을 하러 가는 걸음과 악마를 죽이러 가는 걸음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단련된 육체와 정신은 악마와의 싸움을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다.

“아르말락!”

언덕 위에서 엔디미온의 악마의 이름을 불렀다. 언덕 위는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렸고 하늘은 비가 내릴 것처럼 우중충했다. 아르말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누가 감히······.”

흐린 하늘에서 빛이 점멸했다. 빛은 창백했고 위협적이었다. 귀를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벼락이 쳤다. 쾅 소리가 나며 바닥이 박살나고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천둥군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누구기는. 나다, 성배기사.”

엔디미온이 성검을 휘두르자 시야를 가리던 안개가 좌우로 찢어졌다. 그것은 사악한 악령이 정화되는 것처럼 힘을 잃고서 빠르게 사라졌다. 드디어 아르말락의 모습이 나타났다. 거대한 몸, 그리고 수많은 다리들, 몸 주변에서 탁탁 소리를 내며 튀는 창백한 빛.

천둥군주 아르말락. 백 년 전 수많은 성기사들을 죽였던 무자비한 학살자. 그리고 이제는 위대한 난쟁이 전사 칼라딘을 죽인 영웅살해자.

라우렌시오가 이를 갈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르말락! 이 찢어죽일 놈! 너는 감히 내게 누명을 씌우고 내 친구를 죽였다! 네가 아무리 빌어도 자비는 없을 것이다!”

“오, 라우렌시오. 떠버리 요정기사. 내가 무서워 도망친 주제에 이제 와서 큰 소리냐?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겁을 상실한 모양이지? 참으로 추하구나. 너 따위가 어찌 영웅이라 하겠느냐?”

“입 닥쳐! 이 개 같은 자식! 너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주겠다!”

“할 수 있으면 해봐라, 이 얼치기 요정 놈아! 감히 천둥군주를 협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콰르릉 쾅! 다시 한 번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졌다. 라우렌시오의 바로 곁에 떨어졌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눈을 뜨고서 아르말락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반면 엔디미온은 침착했다. 그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도망친 줄 알았던 청지기들이 다시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퇴로를 막는 것처럼 엔디미온 일행의 뒤에서 진을 치기 시작했다. 엔디미온은 다시 아르말락을 보았다.

“의미 없는 거 알잖아.”

“그래, 나도 알고 있지.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너희 전부를 한 번에 상대할 수는 없어서 말이다. 나는 강하지만 몸은 하나야. 일단 너부터 쓰러트리고 나면 나머지 잡것들은 쉽게 이길 수 있다.”

“글쎄. 과연 그럴까. 애초에 날 이길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아르말락이 다리를 흐느적거리자 몸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가 웃고 있었다.

“물론 나 혼자서는 힘들겠지. 어쨌거나 너는 내 아버지를 죽인 성배기사니까. 그래서 나도 친구 한 명을 불렀다. 이걸 비겁하다고 비난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친구 한 명? 부를 거면 열 명은 불렀어야지.”

“짜증나는 놈.”

쯧 하고 아르말락이 혀를 찼다.

“미리 말해주지. 지금부터 하는 것은 시간벌기다. 내 친구가 올 때까지 말이야. 그 다음에는 너를 죽이고 저 잡것들까지 죽일 거다. 그리고 저 천지 모르고 겁도 없이 입을 놀리는 요정 놈은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여주마.”

“자신감은 나쁘지 않군. 하지만 결과는 정해져있다. 네가 어떤 친구를 불렀든 날 이길 수는 없어.”

“너희들은 마치 아이 같아. 의심할 줄 모르는 아이. 순수하지만 멍청하지. 아이들이 으레 그러는 것처럼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단 말이야. 보이지 않으면 애초에 그것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지. 정말 멍청하고 안타깝구나.”

“지금 많이 지껄여라. 유언을 남길 시간은 주지 않을 생각이니까.”

엔디미온이 성검을 아르말락을 겨누었다. 청지기들이 점차 엔디미온 일행 가까이로 다가왔다. 모두가 싸울 준비를 했다. 엔디미온과 아르말락, 둘 중 하나가 움직이면 그대로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잠깐의 침묵 후에 먼저 움직인 것은 엔디미온이었다. 처음에는 한 발자국이었다. 그 다음에는 두 발자국, 세 발자국이 되었고 마지막에는 도약이 되었다. 껑충껑충 뛰면서 아르말락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이제 잠시 뒤면 충돌한다. 하지만 아르말락은 싸울 의지가 없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천둥군주라는 이름대로 천둥을 치고 벼락을 부려야 했는데 가만히 있었다. 엔디미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 그래. 내가 깜빡했군. 날 도와줄 친구가 하나 더 있었어. 너에게 소개시켜주도록 하지. 만나면 너도 반가울 거야.”

엔디미온은 아르말락의 말을 무시했다. 죽기 전에 실컷 떠들라고 했더니 쓸데없는 소리나 하는군. 그는 성검을 더욱 세게 잡았다. 빠르게 끝낼 생각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움직임은 은밀했고 동시에 신속했다.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신경 쓰이는 움직이었다. 하지만 이제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헛것을 본 것일까? 아니었다. 그것은 시야의 사각으로 숨은 것이다. 무엇 때문에?

생각할 것도 없다. 뒤를 잡기 위해서다!

“윽!”

달리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자세가 흐트러졌다. 습격자는 그 틈을 노리고 단검을 휘둘렀다. 한 자루가 아니었다.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었다. 단검과 성검이 부딪쳤다. 삼 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성검은 일곱 번의 공격을 받아냈다.

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습격자는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지금 반격해야 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제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익숙한 싸움 방식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저기 있는 것은 그도 아는 사람이니까.

“난 낭비를 싫어하는 악마거든. 괜찮은 시체가 있는데 그냥 놀리기가 아까워서 말이야. 네 친구, 실력이 상당하더라고. 그동안 잘 썼다.”

위대한 난쟁이 전사, 백 년 전의 영웅, 온갖 무기술에 통달한 대전사, 그리고 엔디미온의 친구. 그 이름은 칼라딘이었다. 아르말락에게 죽었던 그가 여기에 있었다. 엔디미온에게 무기를 겨누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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