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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03화 (103/199)

103

“칼라딘······.”

난쟁이 대전사는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엔디미온과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완전히 적을 상대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어째서 엔디미온을 적대하는지는 명백했다.

칼라딘은 죽었고 아르말락이 그를 되살려낸 것이다. 모습부터가 그랬다. 반쯤 썩은 몸, 하얗게 물든 두 눈, 핏기 없이 시퍼런 피부까지.

죽은 자를 되살려내는 것은 망자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죽은 자는 쉬어야 했다. 이딴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짓거리에 쓰일 것이 아니라.

엔디미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꽉 맞물린 이가 뿌득 소리를 냈다. 그는 화가 났다. 지금까지 악마들과 싸우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 상황에서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건 저 간악한 악마들과 다를 게 없었다.

“엔디미온······. 난 저 빌어먹을 놈을 갈가리 찢어버리겠다고 맹세했소.”

화가 난 것은 엔디미온만이 아니었다. 성검 에투알 역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칼라딘은 엔디미온뿐만 아니라 그녀의 친구이기도 했다.

“넌 실수한 거다, 아르말락.”

엔디미온의 목소리는 전과 다를 것 없이 아무 굴곡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조용한 분노가 숨겨져 있었다. 에투알은 아르말락을 갈가리 찢어버리겠다고 했지만 엔디미온은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죽일 거니까.

“라우렌시오.”

나직이 라우렌시오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칼라딘의 모습을 보고서 비명처럼 탄식했다. 그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잠식당하기 전에 엔디미온이 말했다.

“잠깐만 아르말락을 상대하고 있어라. 나는 성배기사이자 칼라딘의 친우로서 그에게 안식을 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내가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겠나.”

칼라딘을 다시 죽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엔디미온이었다. 그는 성배기사로서 그래야 했고 칼라딘의 친구로서 그래야 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하지만 그는 후자의 이유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게 더 인간적이니까.

“······내가 흘려야 할 눈물이 한 방울이 아니었군. 죽음이 두 번이라면 울음도 두 번이어야겠지. 부탁한다, 엔디미온.”

라우렌시오가 검을 뽑으며 아르말락을 향해 다가갔다.

“우리의 친구, 칼라딘을 위하여.”

“칼라딘을 위하여.”

두 사람은 서로 교차했다. 한 명은 칼라딘을 향해, 다른 한 명은 아르말락을 향해. 엔디미온의 두 눈은 고요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성난 너울이 있었다. 고요한 분노였다.

칼라딘은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곧장 달려들었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손에 들고 있던 단검 두 자루를 휘둘렀다.

두 번의 금속음. 번개처럼 휘두른 두 개의 단검이 성검에 부딪쳤다. 칼라딘은 뒤로 약간 물러났다가 다시 거리를 좁혔다. 작은 키가 무색하게 바닥을 박차고 엔디미온의 머리 위까지 뛰었고 그 상태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단검 두 자루를 휘둘렀다. 뛰어올랐다가 다시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의 시간 동안 성검은 일곱 번의 공격을 받아냈다.

빨랐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섬광이었다. 엔디미온은 잠깐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착지한 칼라딘이 바닥에 스칠 듯 낮게 달렸다. 다리를 노리는 공격. 엔디미온이 낮게 뛰어오르자 칼라딘은 기다렸다는 듯이 단검을 얼굴을 향해 던졌다. 엔디미온은 반사적으로 성검을 들어 얼굴을 보호했으나 왼쪽 정강이가 불에 타는 듯 뜨거웠다. 그 사이에 벤 것이다.

칼라딘은 떨어지는 단검 하나를 잡아채며 회전하듯 오른쪽 손의 단검을 휘둘렀다. 체중이 실린 공격은 위협적이었다. 엔디미온은 뒤로 물러나면서 성검을 휘둘렀다. 단검이 금속음을 내며 튕겨나갔다. 그 순간 단검의 아랫부분에서 무언가 길게 늘어지며 빛을 받아 반짝였다.

휘리릭 소리를 내며 무언가 손목에 감기는 동시에 단검이 몇 바퀴를 빙글 돌았다. 손목에 착 달라붙은 단검은 얇고 질긴 끈으로 연결돼 있었다. 그리고 그 끈은 칼라딘의 것이었다.

칼라딘이 손으로 끈을 잡아당기자 엔디미온의 몸이 휘청거렸다. 난쟁이다운 괴력이었다. 성검으로 끈을 끊으려는데 다시 한 번 칼라딘이 끈을 잡아당겼다. 끌려가지 않으려 힘으로 버티자 갑자기 끈을 당기는 것을 멈추고 이쪽을 향해 달렸다. 맥없이 끝난 힘의 대결 때문에 엔디미온의 몸이 뒤로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그 틈을 노려 칼라딘이 뛰어올랐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새로운 단검이 들려있었다. 누가 보아도 목을 노리는 공격이었다. 날카로운 단검으로 목덜미를 관통해 단숨에 숨통을 끊어버리려는 동작.

엔디미온은 성검을 들어 상단을 보호했다. 그러자 칼라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하며 공격 경로를 바꾸었다. 노리는 것은 어깨.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성검을 약간 들어 올렸다. 손잡이가 하늘을 향하게, 검의 끝부분이 바닥을 향하게. 비스듬히 들고서 어깨와 목을 동시에 보호했다. 단검이 의미 없이 성검을 때리는 순간 손목을 비틀어 성검을 반달 모양으로 회전시켰다. 빠르고 강력한 베기 공격이었다.

칼라딘은 아직 공중에 있었고 그 상태에서는 완전하게 충격을 흘릴 수 없었다. 그의 작지만 단단한 몸이 뒤로 날아갔다. 바닥을 한 바퀴 구른 후에 날렵하게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엔디미온은 달렸다.

칼라딘 역시 달렸다. 두 사람은 금세 서로 충돌했다. 성검이 바닥을 갈랐고 기다란 칼자국이 생겼다. 칼라딘은 공중에 있었다. 그는 작은 키를 보완하기 위해 각력을 길렀다. 공중에 있을 때만큼은 그 역시 거인이었다.

아래로 떨어지면서 휘두르는 두 자루의 단검은 위협적이었다. 빠르고 현란한데 공격 몇 개는 상대를 속이는 가짜였다. 모든 공격을 막으면 당한다. 하지만 어떤 것이 가짜인지는 알 수 없다. 단순히 무기만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심리전까지 거는 것이다.

그러나 엔디미온은 단 한 번도 속지 않았다. 그는 성배기사였고 칼라딘의 친구였다. 수십 번이나 등을 맞대고 함께 싸웠고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러니 속지 않았다. 칼라딘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챙! 날카로운 쇳소리가 날 때 단검이 공중으로 튕겨나갔다. 칼라딘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죽은 자는 놀라지도 않고 겁을 먹지도 않으니까. 그는 침착하게 나머지 단검을 휘둘렀다. 다시 한 번 쇳소리와 함께 단검이 튕겨나갔다.

그럼 여기서 끝인가? 싸움이 끝난 것인가? 맨손으로는 성검을 든 성배기사를 이길 수 없다. 그러니 끝인가?

아니다.

스르릉. 등 뒤에 달려있던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칼라딘은 두 손으로 검을 잡고 있었다. 이게 진짜였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그가 위대한 난쟁이 전사라 불렸던 이유, 난쟁이들의 대전사라고 불렸던 이유, 영웅이라 불렸던 이유.

칼라딘은 지금 여기서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

“덤벼라!”

엔디미온은 죽은 자가 되어 돌아온 친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죽은 자는 언제나 죽어 있어야 했다.

칼라딘과 엔디미온이 서로를 향해 달렸다. 검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수없이 많이 부딪치고 위협적으로 불티를 뱉어냈다. 칼라딘의 검술은 사나운 맹수와 같았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적을 죽이는 데만 집중했다.

첫 번째 상처는 엔디미온의 몸에서 생겼다. 칼라딘의 검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몸에 생기는 상처들이 늘어났다. 검과 검이 교차할 때마다 빛이 번쩍였다. 엔디미온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반격했다. 칼라딘의 검을 크게 쳐내고 텅 빈 가슴을 향해서 검을 내질렀다.

그 순간 칼라딘이 검을 한 손으로 고쳐 잡았다. 그리고 왼쪽 손으로 허리춤의 짤막한 검을 뽑았다. 왼손의 검으로 공격을 막아내고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서로 길이가 다른 두 자루의 검을 든 그의 기세가 또 달라졌다. 단검을 들었을 때는 날렵한 맹금이었고 검을 들었을 때는 성난 맹수였으며 지금은 무자비한 살육자였다.

두 자루의 검은 시시각각으로 위치를 바꾸며 엔디미온의 목숨을 노렸다. 성검을 쳐내고 불쑥 튀어나온 검이 목을 향해 직진했다. 때로는 심장을, 때로는 배를, 때로는 머리를. 언제나 급소만을 노리는 공격은 독이 오른 뱀과 같았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엔디미온은 생각했다. 칼라딘을 상대로 이긴다. 그게 될까. 답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엔디미온!”

성검 에투알이 날카롭게 이름을 불렀다. 엔디미온은 그제야 느지막이 성검을 들었다. 하지만 칼라딘의 검이 벌써 가슴을 베고 난 후였다. 상처는 얕았다. 다음 공격이 올 것을 알았다. 공중에서 빙글 회전한 칼라딘의 짤막한 검이 성검을 때렸다.

“그래, 결국에는 끝을 내야지.”

엔디미온은 결심을 굳혔다. 칼라딘의 오른쪽 검이 머리를 노렸다. 고개를 약간 숙이자 머리카락을 몇 가닥 자르며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그 다음은 왼쪽 검이 올 것이다. 길이는 짧지만 대신에 더 빠르다. 오른쪽 검을 휘두르는 박자에 맞추면 늦는다.

그러나 막아서도 안 된다.

“내 친구 칼라딘.”

왜냐하면 저건 속임수니까. 공격을 막기 위해 검을 내미는 순간 공중에서 자세를 바꿔 순식간에 목숨을 빼앗을 테니까. 하지만 막지 않으면 속임수가 아니라 진짜 공격이 될 것이다. 어떤 것을 택해도 손해만 보게 된다.

그럼 상대에게도 똑같이 손해를 안겨주면 된다.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서 유감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작별하게 되서 더 유감이고.”

엔디미온은 막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았다. 공격했다. 칼라딘이 하는 것처럼 상대를 노리고 성검을 휘둘렀다. 이 한 번의 공격이 끝나고 나면 누군가는 죽는다. 하지만 그게 엔디미온은 아닐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노리는 필살의 일격. 공교롭게도 둘 다 목을 노리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일 시간, 숨 한 번 삼킬 시간, 맥박이 세차게 한 번 뛸 시간.

그리고 결판은 났다.

피가 쏟아졌다. 아니었다. 피고름이었다. 썩고 부패한 것들이 걸쭉한 액체가 되어 바닥으로 쏟아졌다. 엔디미온은 바닥에 쓰러진 칼라딘의 얼굴을 보았다. 몸이 굳어 눈조차 감지 못하는 친구의 눈을 대신 감겨주었다.

아르말락에게 죽고 성배의 힘을 잃은 칼라딘은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죽이려고 한다면 순식간에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싸움을 길게 끈 이유는 엔디미온도 잘 몰랐다. 친구를 죽인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런 꼴이 된 친구에 대한 측은함인가? 어느 쪽이든 납덩이처럼 무겁게 마음을 짓누른다는 것만을 알았다. 아니면 둘 다가 맞던지.

엔디미온은 칼라딘과 싸울 때 몇 번이고 생각했던 말을 혼자서 되뇌었다.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다. 친구를 죽이는 게 어려울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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