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04화 (104/199)

104

“백서른다섯.”

음성은 나직했다.

“이게 무슨 숫자인 줄 아나?”

라우렌시오는 고개를 들어 아르말락을 마주 보았다. 두 눈은 녹주석의 모습이었다. 태양 아래에서 말간 색으로 빛나던 두 눈은 친절과 선의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끓어오르는 증오는 걸쭉했다. 녹주석의 빛을 앗아갔고 스스로를 태우며 친절과 선의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요정기사는 이제 이곳에 없었다. 오직 복수자만이 있었다.

“글쎄, 네 나이인가? 오래도 살았군.”

“내가 널 찾기 위해서 죽인 악마들의 숫자다.”

정신없이 흐느적거리던 아르말락의 다리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많이도 죽였군. 그런데 전에도 말했지만 너에게 누명을 씌운 것은 내가 아니다. 넌 괜히 다른 악마들만 괴롭힌 셈이로군.”

“나는 네 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는 내 복수를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다. 내 친구를 위해서 너와 싸우는 거지.”

“칼라딘 말이냐?”

“더러운 입으로 내 친구의 이름을 말하지 마라.”

“건방진 것. 너도 곧 네 친구처럼 만들어주겠다.”

“자신 있나? 날 죽일 자신 말이야.”

아르말락은 대답하는 대신에 자신의 다리들을 휘둘렀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다리들이 일시에 라우렌시오를 노리고 날아왔다. 다리가 어찌나 많은지 라우렌시오는 쉬지 않고 달려야 했다. 그래도 수많은 다리들이 그를 노리고 움직였다.

쾅쾅 소리가 나면서 다리들이 바닥을 때렸다. 그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지만 요정 특유의 날렵한 몸놀림으로 자세를 바로 잡았다. 라우렌시오는 아르말락의 다리들로부터 도망을 치면서도 주변을 확인했다. 뒤쪽에서 쾅쾅 소리가 연달아서 났다. 열 개도 넘는 다리들이 순서대로 바닥을 치는 소리였다. 라우렌시오는 한참 도망가다가 다시 반대로 방향을 돌렸다.

머리 바로 위로 다리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빠르게 바닥을 굴렀다. 간발의 차로 다리 밑에 깔리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아르말락의 다리는 저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는 세차게 쏟아지는 빗방울처럼 바닥을 때리는 다리들로부터 정신없이 도망 다녔다. 그 모습을 보며 아르말락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 한심한 것아! 입만 살아서는! 그 잘난 검술로 내 다리를 잘라봐라! 아니면 마법으로 날 공격해보던지! 칼라딘은 적어도 도망치지 않았다! 너는 언제까지 추하게 도망만 칠 셈이냐!”

라우렌시오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날카롭게 빛나는 두 눈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오른쪽에서 다리 여섯 개, 왼쪽에서 다리 일곱 개. 일부러 잠깐 멈춰서 그 모든 다리들이 한 곳을 노리도록 만들었다. 그 다음에 다시 도망쳤다.

제대로 된 싸움도 없이 술래잡기만 하는 행태에 아르말락도 짜증이 났다. 그는 다리들로 바닥을 내리치면서 벌컥 화를 냈다.

“이 한심한 것! 대체 언제 싸울 셈이냐! 오냐,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냥 죽여주마!”

천둥군주의 분노가 하늘을 울렸다. 벼락이 떨어졌고 라우렌시오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몸이 튕겨나갔다. 아르말락은 그 틈을 노려서 다리를 휘두르려고 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다리가 엉켜 있었다. 일부 다리들이 서로 엉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르말락은 혀를 찼다. 라우렌시오는 도망만 치던 게 아니었다. 일부러 이것을 노리고 있던 것이다.

“그래봤자!”

아직 다리는 많이 남아있었다. 다리 몇 개쯤 쓸 수 없게 됐다고 해서 싸움에 지장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말락은 다른 다리들을 휘둘렀다. 아까부터 도망만 치던 라우렌시오는 이제 정면으로 뛰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다리들을 무력화시킬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다리가 날아오는 것과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다리들이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라우렌시오는 훌쩍 뛰어서 다리 위에 착지했다. 바닥이 끈적거리고 미끄러웠다. 그러나 넘어지지 않고 아르말락의 머리를 향해 달렸다. 빠르게 달리는 그의 뒤를 아르말락의 다리들이 추격했다. 그것들은 라우렌시오를 붙잡으려다가 저들끼리 부딪치고 뒤로 나자빠졌다. 하지만 곧 다시 고개를 들고 라우렌시오를 쫓았다. 마치 살아있는 뱀 같은 움직임이었다.

“제기랄, 다리가 몇 개야.”

라우렌시오는 흐르는 강처럼 꿈틀거리는 다리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사방에서 다리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날아왔다. 이런 식으로는 아르말락의 머리까지 가는데 한참 걸릴 것 같았다. 한숨과 함께 두 눈을 부릅떴다.

“번쩍여라!”

그의 장기이자 이제 이 세상에서 쓸 수 없는 사람이 몇 남지 않은 마법. 비장의 수를 꺼낸 라우렌시오가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갑자기 사라진 그 때문에 아르말락의 다리들이 서로를 때렸다.

“불꽃이여!”

라우렌시오의 검이 불꽃에 휩싸였다. 그가 그것을 휘두르자 거대한 불꽃의 칼날이 아르말락을 향해 날아갔다. 아르말락의 다리들은 빠르게 움직여서 스스로를 희생했다. 고기 타는 냄새가 나며 잘려나간 다리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들은 금세 재생했다. 아무리 다리를 잘라도 아르말락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재주는 그것뿐이냐? 더 날뛰어봐라!”

“안 그래도 그럴 셈이다!”

아르말락의 머리까지는 이제 열 걸음.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걸 아르말락이 그냥 두고 볼 리는 없었다. 점멸 마법으로 한 번 거리를 좁힌다고 해도 다섯 걸음. 바로 그 다섯 걸음, 거기서 승부가 갈린다.

라우렌시오는 바로 점멸 마법으로 다섯 걸음을 좁혔다. 남은 다섯 걸음을 위해서 힘껏 달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수많은 다리들이 공중에서 아래로 쏟아졌다. 빛이 사라지고 그림자만이 남았다. 빽빽하게 들어찬 다리들이 종의 형태를 이루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다시 점멸 마법을 쓰려면 시간이 더 지나야 했다.

결국 라우렌시오는 다리들에게 집어삼켜졌다. 그것들은 먹이를 삼킨 뱀이 으레 그러듯 몸을 꿈틀거리며 흉측스럽게 움직였다. 아르말락은 조용히 자신의 다리들을 보고 있었다. 그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수는 없었다. 싸움에는 언제나 다음이 있어야 했다. 지금이 바로 그 다음이 있어야 할 순간이다.

“이까짓 걸로 날 붙잡아둘 수 있을 것 같으냐!”

강둑이 무너질 때가 그랬다. 처음에는 작은 구멍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물이 졸졸 새어나온다. 그러나 물줄기는 점차 거세질 것이다. 작은 구멍 하나가 두 개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두 개만큼 커질 수도 있다. 어쨌거나 구멍에서 물이 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구멍이 결국 강둑을 무너트린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강둑이 무너지고 막을 수도 없이 많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다리와 다리 사이에서 빛이 터져 나오는 지금처럼. 강렬한 빛은 다리들을 불살랐고 재로 만들었다. 빛과 함께 돌아온 라우렌시오는 다시 한 발자국 내딛었다. 이제 남은 건 네 발자국.

재가 되어 쏟아져 내리던 다리들이 순식간에 재생했다. 다시 라우렌시오를 습격했으나 섬광 같은 검술에 의해 토막이 났다. 그리고 남은 건 세 발자국.

아래에서 갑자기 뛰어오른 다리가 라우렌시오의 발목을 붙잡았다. 순간적으로 몸이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 했다. 날아온 다른 다리들이 그의 몸을 붙잡았다. 사지를 찢으려고 사방에서 잡아당겼다. 하지만 입술을 세게 깨물며 저항했다. 두 눈에서 녹주석을 태우며 타오르는 증오는 이미 그 자체로 마법이었다. 사지말단에서 불꽃이 터져 나오며 아르말락의 다리들을 불살랐다. 이제 두 발자국.

“아르······.”

다시 재생하여 라우렌시오를 노리는 다리들. 그러나 헛수고였다. 요정의 발걸음은 가볍고 빨랐다. 이제 한 발자국.

“······말락!”

라우렌시오가 검을 든 손을 쭉 내밀었다. 그가 노리는 것은 아르말락의 머리였다. 검으로 세게 찌른 후에 마법으로 불태워 죽일 생각이었다. 다리들이 그를 노리고 움직였지만 이미 늦었다.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검은 거침없이 질주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보였다.

“죽어라, 이 사악한 것아!”

전조가 있었다. 건조한 공기, 미적지근한 바람, 언뜻 보이는 창백한 빛. 시야 끄트머리에 슬쩍 보인 것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알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아르말락이 공격을 막기에 너무 늦은 게 아니었다. 라우렌시오가 도망치기에 너무 늦은 것이었다.

하늘이 번쩍였다.

“끄아아악!”

시야를 빼앗는 창백한 빛이 공기를 달구었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우레가 쳤다. 굉음은 귀를 찢을 듯 사나웠고 또한 비명처럼 처절했다. 라우렌시오의 몸은 새까만 그을음으로 가득했고 몸에서는 연기가 나고 있었다.

“나랑 가까이 붙어있으면 벼락을 떨어트리지 못할 줄 알았느냐? 참으로 멍청하구나. 너는 자기가 부리는 벼락에 당하는 자를 보았느냐? 나는 천둥군주다!”

라우렌시오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자꾸만 이명이 들렸고 시야도 불분명했다. 치명상이었다. 더 싸우는 것은 위험했다. 일단 물러나서 다음을 노려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았다. 물러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스스로도 더는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아니면 친구의 복수를 위해서? 죽어서도 쉬지 못하고 악마의 하수인으로 부려지는 불쌍한 친구를 위해서?

라우렌시오는 고개를 저었다. 도망치지 않고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우는데 구구절절한 이유 따위는 없어도 된다.

왜냐하면 영웅은 결코 숨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으니까.

“죽······어라, 아르말······락!”

라우렌시오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을 내질렀다. 마지막 힘을 짜낸 공격은 그대로 아르말락의 머리에 꽂혔다. 그리고 검을 비틀었다. 열쇠를 돌리는 것처럼 힘껏. 처음에는 촛불처럼 작은 주황빛이었고 그 다음은 불꽃의 회오리가 되었다. 모든 것을 없애버릴 기세로 아르말락의 다리를 모두 태워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그 커다란 머리를 한 입에 삼켰다.

라우렌시오는 마법의 강력한 위력 때문에 뒤로 날아갔다. 비틀거리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아르말락의 모습을 보았다. 과연 죽었을까? 간절한 기대였다. 그러나 기대란 것은 간절하면 할수록 쉽게 배신하는 법이었다.

땅이 진동했다. 불꽃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재가 되었던 다리들도 빠르게 다시 재생했다. 그것뿐이었따면 라우렌시오도 납득했을 것이다. 아르말락은 강력한 악마이니 마법 한 번에 죽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일은 납득할 수 없었다.

“너희는 내 진정한 힘을 모른다!”

아르말락의 머리가 위로 움직였다. 땅에 단단히 박힌 식물을 뽑았을 때처럼 그 아래로 무언가 달려 나왔다. 두꺼운 목, 널따란 어깨, 단단한 가슴, 길게 뻗은 다리. 그 순간 라우렌시오는 깨달았다.

아르말락의 머리에 달려있던 수많은 다리들은 실은 다리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수염이었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수염. 지금까지 아르말락을 보며 문어를 떠올렸지만 그것은 그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었다. 진짜 몸은 땅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

그 어떠한 거인도 이만큼 크지 않았다. 지금까지 상대한 어떤 악마들도 이만큼 거대하지 않았다. 이것은 감히 혼자서 상대할 수 없는 적이었다. 아르말락의 머리는 하늘에 부딪힐 듯 했다. 그가 손을 뻗자 구름들이 흩어졌다. 구름들을 헤집었다가 다시 나타난 손은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악스런 손아귀 안에는 벼락이 붙들려 있었다.

“경배하라! 나는 천둥군주 아르말락! 천둥과 벼락의 진정한 지배자다!”

벼락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세상은 빛에 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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