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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05화 (105/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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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자는 공정해야 한다. 작은 것까지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아르말락은 훌륭한 지배자였다. 천둥군주라 불리는 그의 벼락은 지상의 모든 것들을 차별하지 않고 지워버렸으니까. 심지어는 자신의 부하들까지도.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던 세상에 차츰 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거인의 모습이 된 아르말락은 가늘게 뜬 눈으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변에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저급한 악귀들은 재가 되어 사라졌고 악마들은 그래도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숯처럼 변해버렸고 몸에서는 연기가 나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들을 자비도 없이 모두 태워 죽였지만 아르말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악마였고 천둥군주였다. 이런 일에 흘릴 눈물은 없었다.

“목숨 한 번 질기구나, 버러지들아.”

벼락은 지상의 생명을 수확하는 징벌자였다. 그러나 강력한 징벌로부터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아직 영웅들을 살아있었다. 모두 엔디미온의 덕분이었다. 그는 벼락이 떨어지자 성검 에투알을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기도의 자세를 취했다. 성검에서 신성한 빛이 넘실거리더니 하늘로 솟아올랐다. 위로 쏘아올린 물이 반구를 그리며 떨어지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간 빛은 빠르게 떨어지며 엔디미온 일행을 전부 보호했다.

아무리 벼락이 강력한 힘을 가졌어도 성검의 보호막을 부술 수는 없었다. 덕분에 엔디미온 일행은 벼락에 다친 사람 하나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라우렌시오.”

엔디미온은 천천히 라우렌시오에게 다가갔다. 쓰러져 있는 그는 힘겹게 색색 소리를 내며 숨을 내뱉고 있었다.

“수고했다.”

라우렌시오는 억지로 웃었다. 엔디미온은 허리춤에 달린 수통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쪼르륵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진 성수는 라우렌시오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상처가 천천히 낫기 시작했다. 그을음이 사라지고 발간색으로 달아올랐던 살갗이 다시 희게 변했다. 눈에도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증오에 집어삼켜졌던 녹주석은 다시 말간 빛을 되찾았다.

“더 싸울 수 있겠나?”

“여기까지 왔는데 뒤에서 구경만 하라고? 그건 안 되지.”

개구쟁이 같은 미소였다. 백 년 전에 위험한 전투를 할 때면 언제나 보여주던 그 미소였다. 엔디미온은 주먹을 내밀었다. 라우렌시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을 맞부딪쳤다.

“가자.”

영웅들은 한 자리에 모였다. 그들의 적은 거대한 거인이자 천둥군주인 아르말락이었다. 본모습을 숨기고 있을 때도 라우렌시오와 호각으로 싸울 정도로 강력한 적이었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더 강할 것이다.

백 년 전에 비해서 힘이 약해진 영웅들과 달리 아르말락은 훨씬 더 강해졌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물리쳐야 했다. 엔디미온 일행은 가로 방향으로 나란히 섰다. 라이오넬은 아무 말이 없었고 비다르도 입을 꾹 다문 채였다. 라우렌시오는 심호흡을 하고 있었고 엔디미온은 아르말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영웅들 역시 강대한 적을 상대로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겁을 먹지는 않았다. 잠깐의 고요가 어색했다.

“언제까지 눈만 멀뚱거리고 있을 거냐? 덤벼라, 이 버러지들아!”

아르말락이 하늘로 손을 뻗었다. 구름 사이에서 벼락을 잡아챈 그가 어깨의 탄력을 이용해 힘껏 휘두르자 세상에 다시 한 번 징벌이 내렸다. 하지만 성검의 힘과 라우렌시오의 마법이 더해져 벼락을 막아냈다.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을 내던 벼락은 힘없이 산지사방으로 찢겨나갔다.

“강철 주먹 나가신다!”

제일 먼저 비다르가 뛰어나갔다. 그 뒤를 이어서 엔디미온과 라이오넬도 달려갔다. 제자리에 남은 것은 라우렌시오와 베로니카뿐이었다. 라우렌시오는 베로니카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꼭 잡으세요. 떨어지면 큰일이니까.”

라우렌시오는 점멸 마법으로 이동했다. 베로니카는 눈을 크게 떴다. 너무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로 점멸 마법을 쓰는 것과 다른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하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르말락과 싸워야 할 때지.

“저와 함께 있으니 벼락에 맞을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말고 아르말락을 공격하는 데만 집중하세요.”

맞잡은 두 손이 따스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싸움이 끝나고 나면 저도 영웅들 사이에 낄 수 있을까요?”

“글쎄요. 이 정도 싸움으로 영웅까지는 아니고 그 아래 정도는 되겠군요. 바이올렛 정도는 아니어도 아캄 정도는 된다는 소리입니다.”

“아캄? 백 년 전 은빛새벽회의 수장이라던 그 마법사 말인가요?”

“오, 아는군요. 말년이 좀 추했다고 하던데 그래도 실력은 상당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바이올렛의 실력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당신과 그녀를 동일한 위치에 둘 수가 없군요. 그래도 용기만큼은 바이올렛과 똑같아요.”

베로니카는 씩 웃었다.

“괜찮아요. 아캄? 그 정도면 충분하지요. 차고 넘쳐요.”

두 사람은 웃으면서 동시에 주문을 외웠다. 화염구 두 개가 아르말락의 몸에 부딪쳤다.

“어디서 벌레가 무는구나! 제대로 쳐봐라! 더 힘껏! 있는 힘껏 덤벼보란 말이다!”

아르말락이 쿵 하고 발을 구르자 바닥이 갈라졌다. 뛰어가던 비다르는 혀를 차며 다른 방향으로 틀었고 라이오넬은 잠깐 제자리에 멈췄다가 다시 달렸다. 두 사람이 제일 먼저 아르말락에게 도달할 것 같았다.

라이오넬은 달리면서 자세를 낮추고 검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그 상태에서 상단을 향해서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아직 한참 거리가 남아있었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경지에 오른 자는 베지 않고서도 벨 수 있었다.

거리를 무시하고 날아간 공격은 그대로 아르말락의 정강이를 베었다. 무른 나무를 잘라내듯 상처가 확 벌어졌지만 아르말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를 휘둘러 가까이 다가온 비다르를 날려버리려고 했다.

빠르게 다가오는 아르말락의 거대한 다리를 보면서 비다르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기합을 내뱉으며 두 손을 뻗었다. 그가 자랑하는 강철 주먹도 지금 상황에서는 크게 쓸모가 없었다. 검에 베여도 멈추지 않는 다리에 주먹을 날려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서 다른 방법을 택했다. 날아오는 다리를 두 손으로 막는다. 저만큼 거대한 다리를 혼자서 막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흐아아압!”

비다르와 아르말락의 다리가 충돌했다. 비다르는 두 팔로 아르말락의 다리를 꽉 껴안았다. 그의 우람한 팔로도 전부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두께가 상당했다. 다리를 껴안는 순간 엄청난 충격이 몸을 두들겼다. 비다르는 큭 소리를 내면서 억지로 버티었다. 다리를 바닥에 박은 채로 버티려고 했지만 몇 발자국이나 더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그는 튕겨나가지 않았다. 아르말락의 다리를 꽉 붙잡은 채로 바닥에 단단히 다리를 고정한 채로 버티고 있었다. 아르말락의 다리 하나가 비다르 덕분에 봉쇄된 것이다.

그 사이에 라이오넬이 검을 휘둘렀다. 찰나의 순간에 수십 번이나 아르말락의 다리를 베었다. 아무리 아르말락이 두꺼운 가죽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고통에 무감한 것은 아니었다. 살가죽이 너덜너덜해지고 흰색의 뼈가 드러났다. 그곳을 향해 검을 내지르자 아르말락이 커다란 비명을 질렀다.

성가시게 구는 라이오넬을 공격하려 하자 어디선가 날아온 마법들이 아르말락의 몸을 두들겼다. 그 탓에 자세가 흐트러졌고 쿵쿵 소리를 내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아직 다리 하나를 비다르가 잡고 있었기에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니라 뒤로 넘어지는 꼴이 되고 말았다.

엄청난 소음과 함께 아르말락의 몸이 바닥을 부쉈다. 그가 다시 일어나려고 하자 라우렌시오와 베로니카가 날린 마법이 얼굴에 직격했다. 검은색 연기를 손으로 털어내며 바닥에서 일어나려고 해도 비다르 때문에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았다. 거기에 라이오넬이 종횡무진으로 날뛰면서 하반신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 성가신 놈들! 전부 다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들어주마!”

비다르는 아르말락의 엄청난 힘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다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씹, 이 새끼 힘 한 번 엄청나네. 엔디미온, 뛰어! 가서 죽여버려!”

비다르가 외치기도 전부터 엔디미온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박살난 바닥을 날렵하게 달리며 솟아오른 돌조각들을 날쌔게 뛰어넘었다.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멍청한 놈! 네까짓 게 날 붙잡아둘 수 있을 줄 아느냐!”

아르말락의 다리 근육이 불끈거리더니 엄청난 힘으로 비다르를 날려버렸다. 그는 악 소리를 내며 바닥을 한 번 굴렀다가 다시 일어났다. 이를 갈면서 다시 달려가는데 벌써 몸을 일으킨 아르말락이 외쳤다.

“나를 상대할 적수는 없다! 성배기사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두꺼운 손가락에서 창백한 빛이 발사됐다. 노리는 것은 당연히 엔디미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엔디미온이 아니라 그 곁에 있는 바위를 박살내며 빗나갔다. 조준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라우렌시오와 베로니카가 날린 마법이 아르말락의 손을 밀어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점멸 마법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날벌레 같은 것들! 그깟 마법이 내 몸에 흠집이라도 하나 낼 수 있을 줄 아느냐?”

아르말락이 분노하자 하늘에서 벼락이 쳤다. 우레가 지나고 나서 떨어진 벼락은 빠르게 지상을 내달리면서 땅을 박살냈다. 벼락은 하나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벼락이 떨어져 지상을 질주하고 있었다. 천둥군주의 격노는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갈라진 바닥에서는 꾸물거리는 촉수들이 솟아올랐고 그것들이 영웅들을 붙잡으려고 했다.

또한 아르말락은 손으로 벼락을 움켜쥐었다. 그것을 날리는 대신에 검을 휘두르듯 바닥을 쓸었다. 바위는 돌이 되었고 돌은 모래가 되었다. 벼락에 부딪힌 모든 것들이 가루로 변하고 있었다.

천둥의 지배자가 휘두른 벼락은 이제 창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끝이 날카롭게 변하고 터질 듯한 힘을 한 가닥으로 압축한 것처럼 사방으로 창백한 빛이 튀었다. 그것은 공기를 달구며 성배기사를 향해 질주했다.

아르말락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나는 천궁군주 아르말락이다! 아니, 천둥의 신이다! 나는 벼락을 휘두르고 우레를 타고 달린다! 누가 감히 내게 저항하겠느냐! 누가 감히 내 뜻을 거스르겠느냐! 그런 것은 없다!”

벼락의 창은 가까이 있는 것들을 모두 재로 만들었다. 스치지도 않았는데 일직선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소멸했다. 그리고 이제 성배기사의 목숨을 수확하려 들었다.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혔다. 막으려면 막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성검 에투알이라도 저만한 공격을 막아내려면 많은 힘을 써야 했고 그러면 당분간 힘을 쓸 수 없었다. 잠깐 동안 아르말락을 상대로 보통의 철검과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방어할까. 아니면 억지로 버틸까.

“기세는 천둥! 검술은 벼락! 사람들이 부르길 천둥검!”

누군가 엔디미온을 등지고 섰다. 가려진 시야, 우렁찬 천둥소리, 좌우로 갈라지는 창백한 빛. 모든 것은 찰나였다. 감히 눈으로 쫓을 수 없었다. 과정은 없었다. 오직 결과만이 있었다. 검에 휘감긴 창백한 빛을 털어낸 라이오넬이 크게 소리쳤다.

“누가 감히 천둥군주를 자처하느냐! 똑똑히 기억해라!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벼락을 베는데 힘을 집중한 라이오넬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억지로 버티고 서며 말했다.

“달리게, 엔디미온! 달려!”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등 뒤에서 후광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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