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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악을 하는구나!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느냐!”
아르말락은 성배기사를 겁내지 않았다. 그의 등 뒤에서 빛나는 후광에 눈을 감지 않았다. 똑바로 마주 보고 당당히 맞섰다. 그는 천둥군주였으며 대악마의 적자였다. 겁내야 할 것은 오직 대악마뿐이었다.
“널 죽이겠다, 아르말락.”
엔디미온의 음성은 나직했다. 언제나의 목소리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의 소리, 바닥이 박살나는 소리, 영웅들의 고함, 온갖 소리들 안에 그의 목소리가 묻혔다. 하지만 아르말락은 그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 공간 안에 오직 성배기사와 천둥군주 둘 만이 있는 것처럼.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찡그리며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아르말락의 손은 이미 하늘을 향해 있었다. 벼락을 잡는 감각은 익숙했다. 그는 천둥과 벼락의 지배자였으니까. 엔디미온은 그를 향해 달려오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주변의 소음 때문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들렸다. 귀가 아니라 머리로 들었다.
“내 친구 칼라딘을 위하여.”
후광이 넘실거렸다. 햇무리가 그러하듯 온후한 빛으로 반짝이며 성배기사의 모습에 신성함을 더했다. 그는 전능자의 참된 화신이었으며 호수의 여왕을 위하는 기사였다. 또한 그의 손에 들린 성검은 전능자의 칼날이었으며 사악한 것들을 태우는 정화의 불꽃이었다.
그들은 사악한 것들을 징벌하고 세상의 안녕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었다. 아르말락을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다. 엔디미온은 언제나 의무를 우선하여 움직였다. 그가 백 년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그게 의무였기 때문이었다.
의무는 중요했다. 백 년의 시간이란 무게에 넘어지지 않게 하는 하나의 강렬한 의식이었고 무너지지 않는 정신의 척추였다. 그의 행동에는 언제나 의무가 뒤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르말락을 죽이는 것이 그의 의무라고 해도 그것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의무는 뒤로 밀렸다. 엔디미온은 지금 칼라딘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의무가 아니라.
“죽은 놈의 이름을 부르짖는다고 돌아오기라도 하느냐? 하!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네가 죽으면 칼라딘과 함께 다시 되살려주마! 그리고 내 장난감으로 사용해주지!”
도발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심장이 세차게 뛰어도 머리는 침착했다. 엔디미온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아르말락을 쳐다보았다. 다리는 움직이는 탑과 같았고 두꺼운 손에는 창백한 빛의 벼락이 들려있었다. 키는 성벽의 곱절이었으며 두꺼운 근육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 보였다.
이만큼 거대한 몸집을 가진 악마는 흔치 않았다. 혼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불태우며 세상에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겁나지 않았다. 그의 뒤에는 함께 싸우던 전우들이 있었으며 손에는 날카로운 성검이 있었다.
바닥이 박살났다. 아르말락이 한 짓이 아니었다. 엔디미온의 엄청난 각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금이 가고 결국에는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바닥을 부술 정도의 힘으로 뛰어오른 엔디미온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벼락을 보았다.
“걱정하지 마시오! 가시오, 쭉!”
쏜살같이 날아왔던 벼락은 성검이 내뿜은 신성한 힘에 의해 지리멸렬하게 흩어졌다. 에투알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성검은 사악한 적을 찢어발기는 무기였으니 공격을 막아주는 방어구는 아니었다. 신성력으로 악마의 목을 베는 것은 몇 번이고 할 수 있으나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자주 할 수 없었다.
방금 날아온 벼락은 아무리 성검이라도 몇 번이고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번의 공격을 막아낸 에투알은 잠깐 동안 방어 능력을 상실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날은 아직 날카로웠고 무엇이든 잘라낼 수 있는 서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공격을 막을 수 없다면 공격하기 전에 죽이면 된다.
아직 공중에서 체공 중인 엔디미온을 향해서 아르말락이 손을 휘둘렀다. 잡아채서 벌레를 죽이듯 악력을 짜부라트릴 생각이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오히려 손등에 성검을 꽂고 그 위에 잽싸게 올라탔다. 콱 박힌 성검은 두꺼운 악마의 가죽을 종이 자르듯 잘랐다. 엔디미온이 손등 위에서 달리기 시작하자 아르말락의 살가죽이 좌우로 확 갈라졌다.
그는 그대로 어깨까지 달릴 생각이었다. 아르말락의 덩치가 어찌나 큰지 손등 위에서 어깨까지가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다섯 걸음을 한 걸음처럼 달리면서 살가죽을 찢어버리고 있던 엔디미온이 성검을 다시 뽑았다. 아르말락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공격이지만 달리는데 방해가 됐다.
“이 빌어먹을 놈이!”
아르말락이 손을 흔들어서 엔디미온을 떨어트리려고 했다. 하지만 두 발이 살가죽 위에 착 달라붙은 듯 아무리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몸이 가볍고 날쌔기로 유명한 요정도 감히 하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아르말락은 다른 쪽 손을 이용해서 엔디미온을 공격했다.
벌레를 때려죽이듯 찰싹 소리가 나며 아르말락이 자기 살가죽을 때렸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잽싸게 뛰어올라 오히려 그 손 위에 올라탔다.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그를 보면서 아르말락이 격노했다.
“이 날벌레 같은 놈! 성가시게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르말락이 손을 들어서 하늘로 향했다. 그러자 우중충한 구름 사이로 창백한 빛이 번쩍였다. 자기 자신에게 벼락을 떨어트릴 셈이다. 그 어떠한 벼락도 천둥군주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다. 벼락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주인의 적뿐이니까.
하늘에서 천둥군주의 격노가 떨어졌다. 천둥이 떨어지고 그것이 아르말락의 손에 부딪치고 다시 몸 전체로 흘러나가 엔디미온을 감전시킬 때까지 아주 잠깐의 시간이 있었다. 성검 에투알은 빛을 번쩍이며 자신의 힘을 짜냈다.
“엔디미온!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막겠소!”
“아니.”
자신의 기사를 보호하려는 성검의 힘을 엔디미온이 밀어냈다. 에투알은 당황했다. 아르말락의 벼락을 그냥 맞으면 위험했다. 백 년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이라면 분명 치명상이었다. 그런데도 엔디미온은 성검의 보호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럴 것 없어.”
엔디미온은 그냥 벼락의 충격을 그대로 받아냈다. 아르말락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벼락의 힘이 그의 몸을 집어삼켰다. 신성력으로 대항했으나 성검이 보호했을 때처럼 완벽하지는 않았다. 옷이 찢어지고 몸 곳곳에 그을음이 생겼다. 머리에서는 연기가 올라왔다. 누가 보아도 위험한 상태였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짤막한 한숨과 함께 다시 달렸다. 아르말락의 손등을 지나쳐 어깨를 향해서. 달리기는 처음에 비해서 느려졌으나 곧 다시 빨라졌다. 에투알은 부들부들 떨면서 외쳤다.
“이게 뭐하는 짓이오! 미쳤소, 미쳤소? 진짜 미쳐버린 거요? 벼락을 맨몸으로 받아내다니!”
“힘을 아껴야지. 그래야 저 빌어먹을 놈을 죽일 거 아냐.”
“그러다 죽으면! 칼라딘의 복수를 하다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요! 복수를 위해 무덤을 두 개 만들 생각이오? 대체 날 몇 번을 울릴 셈이오? 이런 망나니 같으니! 밉소, 당신이 밉소! 당신을 잃을까 겁나게 만드는 당신이 밉단 말이오!”
엔디미온은 달리면서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역시 맨몸으로 그냥 맞는 건 너무 무식한 짓이었나. 그는 고개를 흔들어 어지럼증을 털어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나직했다.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에투알이 걱정하지 않게.
“안 죽어.”
시야가 흐려졌다가 다시 명확해졌다. 엔디미온은 고요한 두 눈으로 아르말락의 머리를 보며 말했다.
“이제 와서 죽기에는 난 너무 오래 살았어.”
에투알이 침묵했다. 그리고 힘을 회복하는데 전념했다. 백 년의 시간은 성배기사와 성검에게 동일하게 작용했다. 그녀 역시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알고 있었다. 엔디미온이 호수의 여왕을 찾아왔을 때 비로소 이 세상에 탄생하게 된 성검은 성배기사의 말에 공감했다.
그래, 이제 와서 죽기에는 우린 너무 오래 살았다.
“목숨 한 번 질기구나! 어디 이번 것도 버틸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아르말락이 다시 벼락을 부르려고 했다. 엔디미온이 달려야 할 거리는 아직 제법 남아있었다. 한 번 더 맨몸으로 벼락을 받아내는 것은 위험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함께 싸우는 자들이 있었다.
“으아아아압! 강철 주먹을 우습게보지 마라!”
아르말락의 몸이 휘청거렸다. 아래에서 비다르가 다리를 잡고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벼락만 부르면 이 성가신 벌레까지 한 번에 처치할 수 있었다.
“네 마음대로 하게 둘 줄 아느냐!”
화염구 두 개가 날아와서 아르말락의 손에 부딪쳤다. 그리고 갑자기 바닥에서 반투명한 액체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꾸물거리며 상승하다가 하나의 형체를 갖추어 아르말락의 손목을 붙잡았다. 때문에 벼락을 부를 수가 없었다. 베로니카와 라우렌시오가 한 짓이었다.
“누가 천둥검이냐! 나다! 내가 천둥검이다!”
벼락을 베었던 라이오넬도 다시 일어나서 아르말락을 공격했다. 가죽이 잘려나갔다.
아르말락은 짜증이 치솟았다. 비다르 때문에 다리 하나를 움직일 수 없고 라우렌시오 때문에 벼락을 부를 수가 없다. 거기에 라이오넬이 아래에서 귀찮게 하고 베로니카가 성가시게 마법을 날렸다. 아르말락은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네깟 놈들이 이런다고 해서!”
엄청난 힘이 비다르를 날려버렸다. 발을 굴러서 라이오넬을 넘어트렸다. 힘으로 손목의 속박을 끊어냈다. 그리고 날아오는 마법을 모두 쳐냈다.
“내 다리를 붙잡고, 칼질을 하고, 마법을 날리고, 움직임을 방해한다고 해서!”
아르말락은 벼락을 불렀다. 지금까지 부른 벼락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결과가 달라질 것 같으냐! 너희들이 맞이할 결말은 하나다! 모두 죽는 것!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벼락이 떨어졌다. 창백한 빛, 세상의 색깔을 앗아가는 무자비한 약탈자의 빛. 모두가 떨어지는 벼락만을 보고 있을 때였다.
“결말을 왜 네가 정하냐, 씹새야.”
빛을 몰아내는 빛이 있었다. 오직 남을 해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창백한 빛이 아니었다. 때로는 상처를 보듬는 따스한 빛이었고 때로는 사악한 존재를 벌하는 뜨거운 빛이었다. 정화의 불꽃이고 신성한 빛이었다.
시야 한 구석에서 뛰어드는 엔디미온의 모습에 아르말락이 눈을 크게 떴다. 힘껏 내리쳤던 벼락은 온데간데 없었다. 있는 것은 성검의 빛뿐이었다.
“너! 어느새······.”
빛이 목을 갈랐다. 떨어질 듯 너덜거리는 목에서 바람소리가 났다. 아르말락의 거대한 몸이 빠르게 쓰러졌다. 이 공간 자체가 박살날 것처럼 엄청난 충격이 몰아쳤다.
“크어어억······. 커윽! 컥!”
아르말락은 자신의 목을 손으로 붙잡고 컥컥 소리를 냈다. 말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목구멍에서 바람이 새어나갔다. 엔디미온은 쓰러진 아르말락의 가슴 위에 있었다. 그는 성검으로 악마를 겨누며 말했다.
“널 그냥 죽이지 않겠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악마들을 죽였다. 그들이 어떤 것에 고통을 느끼는지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넌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서늘한 목소리에 아르말락은 컥컥 소리만 냈다. 엔디미온이 그에게 마땅한 고통을 주기 위해 성검을 들었을 때였다.
“이런, 빨리 온다고 왔는데 너무 늦었나?”
무언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갑작스런 공격에 엔디미온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불꽃의 화살이었는데 성검으로 쳐내는 순간 수십 갈래로 갈라졌다. 뜨거운 바늘이 수십 개나 몸에 꽂힌 듯한 고통이었다. 엔디미온은 입술을 깨물며 발을 한 번 굴렀다. 신성한 힘에 의해 불꽃의 조각들이 사라졌다.
“너는 누구냐.”
“나? 하하, 날 모르는 거냐. 하긴 너무 오랜만이니까. 애석하게도 너에게 소개할 이름은 없다. 나는 이제 네 친구가 아니니까.”
엔디미온을 공격한 자는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키는 보통보다 더 컸고 체격으로 보건데 여자인 듯 했다. 얼굴은 망토에 달린 모자로 가리고 있었는데 보라색 머리카락 한 가닥이 살짝 보였다.
마법사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망토의 모자를 넘겼다. 기다란 보라색 머리카락이 스르륵 쏟아졌다.
엔디미온은 얼굴을 움찔했다. 놀랐다. 그리고 당황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바이올렛?”
“아니, 난 룽고르의 마법사왕이다. 그 이름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