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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07화 (107/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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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은 침묵했다. 처음에는 그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여기에서 그를 향해 마법을 날린 것은 바이올렛이었다. 백 년 전 그와 함께 악마들과 싸우고 대악마를 물리쳤던 바로 그녀였다.

보라색 머리카락, 길쭉한 귀, 날카로운 눈매, 늘씬한 몸. 그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른 사람과 착각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자신의 이름을 부정했다. 스스로를 룽고르의 마법사왕이라고 소개했다. 그녀의 마법 실력을 생각하면 그 이름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그 누가 마법으로 그녀에게 대적할까. 백 년 전에도 적수가 없었고 지금은 더욱 없었다. 마법사왕이라고 자처한다면 모두가 받아들여야 했다.

“룽고르, 아름다운 곳이지. 네 고향의 주인이라도 된 거냐.”

“그곳에 주인은 없다. 내가 없애버린 곳이니까.”

“없애버려? 네 고향을?”

마법사왕은 거만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내가 없애버렸다. 내 마법에 집들은 가루가 되었고 요정들은 한 줌의 재가 되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죽였지. 그게 룽고르의 마법사왕으로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엔디미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바이올렛이 갑자기 변해버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영웅들을 쳐다보았지만 그들 역시 그녀가 고향을 공격했다는 것을 몰랐던 듯 했다. 그것은 영웅이 할 만한 짓이 아니었다. 비록 다른 영웅들 역시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쳤다고 해도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악마들과 협력하며 자신의 고향을 불태우는 짓을 벌였다. 사악한 것을 벌하는 일이 성배기사의 의무라면 마법사왕을 해치우는 것도 의무였다. 엔디미온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자 에투알이 말했다.

“진정하시오, 엔디미온. 일단 사정을 들어봅시다. 혹시라도 그녀가 악마들의 사술에 홀린 것일지도 모르잖소.”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바이올렛이었다. 그녀는 마치 마녀라도 된 것처럼 깔깔 웃다가 말했다.

“사술? 사술이라고? 하하하, 뤼미에르! 백 년의 시간이 총명함을 앗아간 것이냐? 악마 따위가 사술로 날 홀려? 그 어떤 악마가 감히 내 정신을 사술로 어지럽히겠나? 그럴 수는 없어!”

성검이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맞았다. 강대한 힘을 가진 마법사인 바이올렛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악마 따위는 없었다. 대악마조차 불가능했다. 그럼 그녀가 악마들과 협력하고 고향을 불태운 것은 오롯이 그녀 자신의 의지라는 뜻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네가 왜 갑자기 변절했는지 그 이유는 모른다. 아마 너에게도 사정이 있겠지.”

엔디미온은 성검을 아르말락의 가슴 위에 꽂고 크로스가드에 손을 올렸다.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한 쪽 다리를 구부린 채로 바이올렛을 쳐다보았다. 싸우려는 자세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관심 없다.”

바이올렛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엔디미온은 이어서 말했다. 여전히 무방비한 자세로.

“네가 어떤 사정 때문에 변절했는지 몰라도 관심 없다. 궁금하지도 않아. 나는 너의 구구절절한 사정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 중요한 것은 오직 결과다. 네가 우리를 배신했다는 결과. 네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내게 용서를 구하고 죽거나.”

엔디미온이 눈을 빛냈다. 그것은 지엄한 징벌자의 눈이었다.

“아니면 지금 바로 내 주먹에 머리가 터져 죽거나.”

“······그래도 옛 친구인데 말이 심하구나.”

바이올렛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성배기사의 강력함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영웅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은 몹시 지쳤고 엔디미온 역시 백 년 전만큼 강력하지 않았으니 상대하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럴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저들을 다 죽여도 자신 역시 죽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까도 말했지. 결과만이 중요하다고. 성배기사인 내가 변절자를 살려두어야 할 이유가 있나?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의미가 없다. 난 들어줄 생각이 없으니까. 덤벼라, 마법사왕.”

한때 힘을 합쳐 함께 싸우던 전우라고 해도 악행을 저지르고 변절했다면 그냥 둘 이유가 없었다. 엔디미온은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성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당장이라도 성검을 뽑을 듯한 기세였다.

반면 바이올렛은 아직 망토 안에서 두 손을 꺼내지도 않았다. 무방비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법에 있어서 달인의 경지에 오른 자였고 수인을 맺거나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마법을 쓸 수 있다.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단지 의지의 발현만으로 불꽃을 일으키고 공기를 얼어붙게 할 수 있었다. 묵직한 긴장감이 공간을 짓눌렀다. 성배기사와 마법사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서로 부딪쳐 보이지 않는 불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먼저 물러난 것은 바이올렛이었다.

“너희들을 죽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여기서 할 일이 아니다. 오늘은 그 알량한 목숨을 살려주도록 하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 손에 잃게 되겠지만 그때까지 남은 인생을 만끽하도록 해라. 난 할 일이 많으니 너희들을 이곳에서 추방해야겠다. 이 멍청한 놈은 아직 쓸모가 있어서 그냥 죽게 둘 수는 없거든.”

바이올렛이 망토 안에서 손을 꺼냈다. 무언가 마법을 사용하는지 바람이 불고 망토자락이 나부꼈다. 엔디미온은 얼른 성검을 뽑았다. 얼른 뛰쳐나가려는데 갑자기 바닥이 흔들렸다. 아르말락이 움직인 것이다.

“아니, 그럴 것 없다.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아르말락?”

바이올렛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아르말락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악마는 손으로 목에 난 구멍을 막으며 목소리를 짜냈다.

“난 이미 틀렸다. 그러니 괜한 힘을 쓰지 마라. 하지만 성배기사야!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란 것을 알아라!”

아르말락이 마지막 힘을 짜냈다. 공기의 흐름이 갑자기 변하고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벼락이 떨어진다. 라우렌시오가 소리쳤다.

“모두 모여! 내가 막는다!”

그가 마법을 시전하자 다른 사람들이 허겁지겁 모여들었다. 간발의 차이로 벼락이 그들의 몸을 산산조각내기 전에 마법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신성력과 성검의 힘을 이용해 스스로를 보호했다. 아르말락이 마지막으로 짜낸 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그의 육신 역시 크게 손상됐다. 그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숨이 끊어졌다.

“······아르말락, 이 멍청한 것.”

마법으로 몸을 보호했던 바이올렛이 시야를 가리는 먼지구름을 손으로 흩었다. 본래 엔디미온 일행을 이 공간에서 추방하고 아르말락을 치유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다 틀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입술을 비틀었다. 아르말락과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공동의 목적을 위해 협력하는 사이였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죽음은 입맛이 썼다.

“일이 틀어졌으니 너희들을 굳이 추방할 것도 없겠군. 잠시 뒤면 이 공간이 무너질 거다. 아르말락이 죽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바이올렛의 말대로 하늘이 우그러들고 있었고 땅의 끝과 끝이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뒤면 천둥군주가 다스렸던 이 공간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바이올렛은 엔디미온 일행을 보며 말했다.

“엔디미온, 라이오넬, 비다르, 그리고 라우렌시오.”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다가 베로니카의 얼굴을 발견한 바이올렛이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이건 또 뭐야?”

“아, 안녕하세요. 저는 베로니카라고 하는데요······.”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대마법사를 만난 베로니카의 목소리는 자연히 작아졌다. 바이올렛은 그녀의 얼굴을 잠깐 보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름은 궁금하지 않다, 요정 꼬마야. 보아하니 마법으로 잔재주나 좀 부리는 모양인데 네가 내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너는 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화가 나는 말이지만 맞는 말이라서 베로니카는 가만히 있었다. 대신에 라우렌시오가 발끈하며 말했다.

“너 같은 배신자보다는 낫지. 베로니카는 아직 성장 가능성이 있는 장래가 유망한 마법사다.”

“아, 라우렌시오. 반쪽짜리 마법사. 네가 그 알량한 마법 실력을 자랑할 때마다 웃음이 나는 걸 참기 힘들었다. 그 꼬마가 장래가 유망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도 알잖느냐? 이 시대의 마법사들이 얼마나 처참한 마법 실력을 가졌는지. 실력이 대단하다고 해서 얼마나 대단하겠느냐?”

“그것은 악마들과의 싸움으로 마법의 정수가 담긴 비전들이 많이 유실됐기 때문이다. 배우려고 해도 배울 게 없기 때문이지. 우리는 이미 완성된 마법을 배웠지만 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대지에서 지식의 상아탑을 세우는 중이다. 우리의 시대와 그들의 시대를 어찌 같다고 보는 거냐?”

“내가 쓰는 마법 중에서 내가 만들지 않은 것은 없다. 날 반쪽짜리의 너 따위와 같다고 말하지 마라.”

“오만하구나. 변절자가 되더니 성격까지 변했어.”

“오만이 아니라 마땅한 자신감이다. 내가 누구인지 기억해라. 난 룽고르의 마법사왕이다. 마법의 주인이자 신비의 지배자다.”

라우렌시오가 얼굴을 찡그렸다. 변해버린 옛 친구를 보며 화를 참고 있었다.

“그게 오만이다. 마법과 신비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 네가 마법사의 왕일 수는 있어도 마법의 왕일 수는 없단 말이다. 바이올렛, 대체 왜 변절자가 된 거냐? 나는 네가 악마들과의 싸움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알고 있다. 성기사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그들을 대신할 마법 갑옷에 대한 연구도 진행했었지. 대체 백 년 동안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바이올렛은 입가를 씰룩였다. 잠깐 동안 할 말을 고르고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나와 같은 요정이지만 우리의 태생은 다르다. 그것도 아주 많이. 너는 태어날 때부터 일곱 요정 가문을 이끄는 자였으나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도 없었으며 잠을 잘 집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마법의 재능뿐이었지. 그러니 너는 날 이해할 수 없다. 태생이 다르니까.”

라우렌시오는 바이올렛의 과거에 대해서 몰랐다. 그녀가 말해주지 않았고 그것 외에도 해야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때문에 그는 지금 침묵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바이올렛이 서늘하게 웃었다.

“한 가지 가르쳐줄까. 네게 누명을 씌운 것은 아르말락이 아니라 바로 나다. 내가 네 모습으로 변장한 인형을 만들어 악귀들을 이끌고 사람들을 습격하게 했다. 그래서 누명을 쓰게 만들었지.”

“뭐······라고?”

라우렌시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바이올렛이 한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는 돌이 된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몸을 부르르 떨며 불같이 화를 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검을 들고 바이올렛에게 뛰쳐나갈 때였다.

“다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다음에 또 보게 되면 오늘처럼 이야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별로 남지 않은 목숨을 즐겁게 보내면서 나와 다시 마주치지 않기를 빌어라. 결국에는 닥쳐올 일이겠지만.”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바이올렛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라우렌시오가 뒤를 쫓으려고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가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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