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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왕은 우아하게 착지했다. 그녀는 음산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면에는 동굴의 입구가 있었고 좌우로는 여러 개의 천막과 많은 숫자의 수레들이 있었다. 어떤 수레는 비었고 어떤 것은 흉측한 꼴로 죽은 악귀들을 담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면서 동굴 안과 바깥을 왕복했다. 그들이 수레로 악귀들의 시체를 나르면 정복을 입은 자들이 하늘에 기도를 올리고 성유를 뿌려 불을 붙였다. 하늘을 향해서 시꺼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의 존재를 얼른 눈치 채지 못했다. 덕분에 바이올렛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동굴의 입구까지 갈 수 있었다. 마침 수레를 밀며 나오던 성기사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어? 뭐야, 길 잃은 여행객인가? 이봐, 여기는 함부로 들어오면 안 돼. 이 안은 악마와 악귀들의 시체 때문에 오염됐다고.”
성기사가 손을 흔들면서 바깥으로 나가라고 했다. 그가 조금만 생각을 해봤다면 스산하게 두 눈을 빛내는 이 요정이 길 잃은 여행객이 아님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 노동으로 지쳐있었고 얼른 휴식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할 만큼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죽은 것이다. 바이올렛의 마법이 그의 머리와 몸을 분리시키자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주인을 잃은 수레 역시 비틀거리다가 왼쪽으로 쓰러졌다. 안에 담겨 있던 악귀들의 시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제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이변이 벌어졌음을 눈치 챘다. 성기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바이올렛에게 다가왔다.
“마녀다! 마녀가 나타났다!”
바이올렛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성기사들을 보며 콧방귀를 꼈다.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검은색 빛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수십 갈래로 갈라져서 날카로운 작살의 모습을 취했다. 바이올렛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다가 그녀가 손짓하자 한꺼번에 사출했다.
수백 명의 궁수들이 한 번에 화살을 쏜 것처럼 검은색 작살들이 하늘을 가렸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성기사들은 자신의 갑옷과 신성력을 믿고서 돌진했으나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열 명의 성기사들 중 일곱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세 명도 만신창이였다.
그들은 그래도 싸우려고 했다. 바이올렛은 한심하다는 듯이 낮게 혀를 차며 손을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바닥이 흔들리더니 세 마리의 검은색 뱀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아가리를 쩍 벌려서 성기사 셋을 삼켰다. 바이올렛은 약간 반투명한 뱀들의 몸 안에서 성기사들이 발버둥치는 것을 지켜보다가 다시 동굴 안으로 걸어갔다.
얼마 걸으니 또 성기사들과 마주쳤다. 이번에도 죽였다.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만나는 성기사들을 모두 죽이며 더욱 안쪽으로 이동했다. 주변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악마와 악귀들의 시체가 많았다.
시체들의 숫자만 보아도 이곳에서 벌어진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바이올렛은 또 한 명의 성기사를 죽이고 전진했다. 마법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일부러 걸었다. 그래야 마주치는 성기사들을 죽일 수 있으니까.
“하나 같이 수준 낮은 것들뿐이군.”
지금까지 제대로 된 싸움은 없고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성기사들이 약했다기보다는 바이올렛이 너무 강한 탓이었다. 이곳의 성기사들의 대부분은 특등기사가 아니라 일등기사와 이등기사였다. 겨우 시체를 치우는 일에 특등기사들을 투입하는 것은 전력 낭비기 때문이었다.
지휘관은 특등기사였고 부관은 상등기사였지만 그 두 명이서 바이올렛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동굴의 가장 안쪽까지 들어오면서 성기사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죽인 마법사왕은 자신이 찾고 있던 것과 마주했다.
“뷔브르······.”
여섯 날개의 악마이자 다리 달린 뱀이라 불리던 뷔브르의 시체가 있었다.
“그리고 로아니스.”
사도왕 로아니스, 강력한 힘으로 백 년 전부터 성기사들을 괴롭히던 악마. 그 역시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정말로 죽었군. 그런데······.”
두 악마의 시체를 보던 바이올렛은 이상함을 느끼고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뷔브르의 시체에 손을 댔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본래 악마가 죽으면 그 시체에서 사악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이 주변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성기사들이 이곳에서 시체 처리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뷔브르의 몸에서는 그 사악한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성기사들이 성유와 성수로 정화했다면 신성한 기운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것조차 없었다. 바이올렛은 로아니스의 시체를 보았다. 그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누군가 그들의 시체에서 힘을 흡수해 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힘을 흡수해?”
바이올렛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힘을 흡수한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악마가 다른 악마의 힘을 흡수할 수 있다면 서로가 서로를 사냥하며 결국에는 대악마와 같은 강력한 조재가 다시 한 번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 누구도 다른 악마의 힘을 흡수할 수는 없으니까.
그럼 뷔브르와 로아니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설마 성배기사가 사악한 기운을 남김없이 정화한 것일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흠, 좀 석연치 않기는 하지만 난 시체만 있으면 되니까.”
바이올렛이 이곳에 온 것은 뷔브르와 로아니스의 시체를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그들에게 사술을 부려 자신의 부하로 써먹기 위해서였다. 사술로 되살려내도 생전의 강함을 완벽히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저 지성도 없이 바이올렛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인형이 될 뿐이었다. 하지만 뷔브르와 로아니스 정도의 덩치라면 그것 자체가 강력한 무기였다. 대충 써먹다가 버리기에 딱 알맞았다.
“시체를 가져가려고?”
낯선 목소리였다. 바이올렛은 빠르게 몸을 돌렸고 동시에 마법을 날렸다. 화염구가 사방에 화염을 뿌렸다.
“소용없다. 인사가 참 거칠구나.”
화염이 회오리치다가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졌다. 바이올렛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불청객을 쳐다보았다. 자신과 똑같이 망토와 모자로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탁한 금색의 머리카락이 모자 밑으로 약간 흘러내렸다. 체격을 보면 여자였다.
바이올렛은 손가락을 까닥했다. 그것이 마법의 발사 신호였다. 바닥이 갈라지며 검은색 손이 불청객의 다리를 붙잡는 것과 동시에 화염의 화살들이 수십 발 발사됐다. 하지만 검은색 손은 물에 맞은 모래성처럼 힘없이 형태가 무너졌고 화염의 화살들은 중간까지 날아가다가 갑자기 저들끼리 부딪쳤다.
불청객이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바이올렛은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다시 마법이 발사됐다. 그리고 분쇄됐다. 어느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수십 개의 마법이 현현했으나 어느 것도 불청객에게 상처를 내지 못했다.
그래도 마법은 쉬지 않고 발사됐다. 여전히 공중에서 분쇄될 뿐이었지만. 바이올렛과 불청객은 서로를 노려본 채로 가만히 있었다. 단지 서로 노려보고만 있어도 공방이 되는 것이다. 한참 동안 불티가 사방으로 튀고, 세찬 돌풍이 불었다가 사라지고, 얼음 조각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동굴 안을 몇 번이고 무너트릴 만한 공격이 이어졌으나 불청객의 힘에 의해 모두 무의미해졌다.
“소용없다니까.”
“그래, 소용없는 짓이었군.”
바이올렛은 인정했다. 그녀의 마법은 단 하나도 불청객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하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전력으로 싸운 것도 아니고 단지 상대의 실력을 알아볼 요량일 뿐이었다.
“너는 누구냐.”
이만한 실력자는 드물었다. 지금 시대에서는 확실히. 바이올렛이 고개를 약간 쳐들고 거만하게 묻자 불청객이 빠르게 웃었다.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날 잊었겠지. 그래, 잊힐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난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내 이름은 없다. 네가 이름을 버린 것처럼 말이야.”
“누구인지 말하지 않겠다면 강제로 말하게 해야겠군.”
바이올렛이 손아귀에 힘을 집중시켰다. 아까와 다르게 진심으로 공격할 셈이었다. 이 시대에 전력을 다하는 그녀를 당해낼 자는 없었다. 영웅들도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악마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이지만 않으면 말을 하겠지. 손아귀에 모인 힘이 강력한 마법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명령할 수 없다.”
압박감. 바이올렛은 흠칫 놀랐다. 불청객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한 마디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압박감을 느꼈다. 보통 때는 별로 느껴볼 일이 없는 감각이었다. 감히 누가 마법사왕을 존재감으로 압도할 수 있을까.
바이올렛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와서 느낀 것이지만 목소리가 낯이 익었다. 아주 오래 전에 들어 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설마? 아니, 그럴 리가. 하지만 설마?
그녀는 불청객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불청객은 서늘하게 웃으며 망토의 모자를 벗었다. 탁한 금색의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희다 못해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바이올렛의 눈이 더 커졌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너는 죽었다. 내가 똑똑히 봤어.”
“그래, 난 한 번 죽었던 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날 봐라.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바이올렛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 불청객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나는 새로운 힘과 육신을 얻었다. 나는 이 세상의 새로운 지배자가 될 것이다. 내 힘이 완전해지면 말이다.”
“너 설마······. 설마 네가 뷔브르와 로아니스의 힘을 흡수한 거냐?”
“그래! 내가 그랬다! 그깟 놈들이 가지고 있기에는 아까운 힘이었지. 덕분에 나는 더 강력해졌고 조금 더 완전함에 가까워졌다.”
“말도 안 돼! 악마의 힘을 흡수한다고? 그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건 말이 안 돼!”
불청객이 두 눈을 부릅떴다. 금색의 두 눈은 타는 것처럼 이글거렸다.
“나는 지배자다! 그 힘은 마땅히 돌아가야 할 자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어둠을 지배하고 빛을 사냥하는 여왕이니 너는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악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바이올렛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오래 전부터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이곳으로 올 것도 알고 있었지. 내가 널 기다리고 있었다. 룽고르의 마법사왕, 너는 나를 섬길 자격이 충분하다. 너의 소원은 내가 이루어주겠다. 그러니 복종하라! 여왕에게 복종하며 충실한 종복이 되어라!”
바이올렛은 도망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도망갈 수 없었다. 오만한 여왕의 말대로 마땅히 그녀를 섬겨야 했으니까. 그것은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도망갈 수 없는 숙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