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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말락이 죽은 날로부터 닷새가 지났다. 엔디미온 일행은 조용히 말을 말고 있었다. 햇살은 따스했으나 바람은 찼다. 겨울이 한 걸음 다가오고 그만큼 가을이 뒷걸음질을 친 탓이다.
모두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본래라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영웅들 중에서 변절자가 나왔다는 것은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 라우렌시오는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바이올렛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죽이겠다면 날뛰었다.
잔뜩 흥분한 그를 진정시킨 것은 엔디미온과 성검 에투알이었다. 에투알이 다정한 말씨로 라우렌시오를 달래면 엔디미온은 곁에 서서 주먹을 몇 번 흔들었다. 사실 그게 더 효과가 있었다.
성배기사와 성검 덕분에 진정은 됐지만 우울한 기분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웃음이 매력적이었던 요정기사는 웃음을 잃어버린 것처럼 언제나 죽상을 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입을 꾹 다물고 입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침묵이 무거웠다. 그녀는 근질거리는 입을 억지로 다물고서 말의 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오랜 침묵을 깬 것은 엔디미온이었다.
“오늘은 여관에서 잘 수 있겠군.”
엔디미온 일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호수의 여왕에게 성배를 돌려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바이올렛을 붙잡는 것이었다. 변절한 영웅이 어떤 간악한 짓을 벌일지 몰랐다. 그녀를 처치하는 것은 옛 영웅들의 몫이었다.
다만 근거지에서만 활동하는 악마들과 달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바이올렛을 찾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마법으로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아무 정보도 없이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닌다고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이올렛을 찾아다니는 대신에 그녀가 그들을 찾아오게 만들기로 했다. 변절한 영웅이 협력하고 있던 악마가 아르말락 하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다른 다르디낭의 적자들과도 협력하고 있었을 것이니 그들을 찾아내서 하나씩 죽이다 보면 바이올렛이 직접 나타날 것이다.
엔디미온이 도시를 찾아다니고 있던 것도 그래서였다. 도시의 신전에서 다른 악마들이 있는 곳에 대하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와, 진짜요? 오늘은 노숙 안 해도 되는 건가요?”
베로니카가 반색을 했다. 그녀는 이제 숙련된 여행자였지만 노숙에 적응했다고 해서 그게 기껍다는 뜻은 아니었다. 당연히 길바닥보다는 침대가 더 마음에 들었다.
“지도에 보면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어. 여관에 방이 있다면 노숙은 안 해도 되겠지.”
“제가 요 며칠 사이에 들은 말 중에서 가장 반가운 소리군요.”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를 다시 정리하려는데 라우렌시오가 말했다.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다고?”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없었지만 그래도 닷새 전보다는 나았다. 차츰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중이었다.
“지도가 맞는다면 말이야.”
“지도 좀 보여줘.”
엔디미온은 순순히 지도를 넘겨주었다. 지도를 보던 라우렌시오가 아하 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거 보고 말한 거지? 아일락샤.”
엔디미온이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자 라우렌시오가 작게 웃었다.
“하하, 아일락샤는 마을 이름이 아니야. 여긴 굉장히 유명한 곳인데 너희는 잘 모를 수도 있겠다. 여기는 마을이 아니라 감옥이야. 악마숭배자들을 잡아가두는 감옥.”
라우렌시오는 다른 영웅들과 다르게 정체를 숨기고 백 년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지금 시대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당연히 그였다. 엔디미온은 이해가 안 간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감옥에 가두지? 그냥 죽이면 되잖아.”
백 년 전에 악마숭배자들은 붙잡히면 바로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그들을 감옥에 가두다니? 대체 왜? 엔디미온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이봐, 엔디미온. 죽인다고 일이 다 끝나는 게 아니야. 악마숭배자들은 저들끼리 조직을 만들어서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지. 악마숭배자 하나를 잡아서 그 자리에서 죽이면 쥐새끼 하나를 죽일 뿐이지만 조직에 대해서 불게 하면 쥐구멍을 청소할 수 있는 거야.”
라우렌시오는 설명을 덧붙였다.
“시대가 변했어. 백 년 전에는 악마들의 세력이 강성했기에 악마숭배자들도 당당하게 돌아다녔지만 지금은 대악마가 죽고 악마들의 세력이 약해졌으니 그들도 그림자 뒤에 숨게 된 거야. 힘은 약해진 주제에 하는 짓거리는 백 년 전보다 더 악랄해졌어.”
정면에서 부딪쳐오는 적은 상대하기 쉽다. 맞서 싸우면 되니까. 하지만 그림자 뒤에서 암약하는 적은 그 뿌리를 뽑기가 어렵다. 엔디미온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라우렌시오의 설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일락샤는 단순히 감옥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악마와 악귀들에 대한 연구도 하고 있어. 우리가 백 년 전에 했던 것처럼 말이야. 연구 결과를 기록했던 책들이 모두 유실됐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지.”
“음, 마을이 아니었을 줄이야. 하지만 오히려 잘 됐어. 악마숭배자들을 가두는 감옥이라면 악마들에 대한 정보도 많겠지.”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베로니카가 말했다.
“엑, 그러면 오늘도 노숙인가요?”
“글쎄. 감옥에 빈방이 있으면 거기서 자던지.”
“그건 싫어요······.”
악마숭배자들이 있는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니. 상상도 하기 싫었다. 베로니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엔디미온이 픽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목적지가 정해졌으니 부지런히 가자고. 혹시 모르잖아. 헛간이라도 내줄지.”
베로니카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헛간, 헛간, 헛간······. 길바닥보다는 낫지.
“가자!”
엔디미온이 말의 배를 찼다. 말이 콧김을 뿜으며 빠르게 달렸다. 해가 머리 바로 위에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지상을 향해 움직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이 점차 발간색으로 물들었다. 저녁도 먹지 않고 열심히 달린 보람이 있었다. 회색의 벽이 보였다. 아일락샤의 것이었다.
“이럇!”
다시 한 번 배의 말을 세게 찼다. 말 역시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서 더욱 힘차게 달렸다. 회색의 벽이 점차 가까워졌다. 마치 성벽 같았다. 감옥 중에는 성을 개조한 것이 많으니 본래는 성이었을지도 몰랐다.
검은색 커다란 문 바로 위에는 청색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깃발에는 올가미와 해골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교형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저런 건 해적선 위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하, 저게 아일락샤의 상징이야. 저기에 들어간 악마숭배자들은 결국 모두 죽게 되거든. 협조를 거부하고 끔직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거나 정보를 제공하고 단칼에 목이 잘려 죽거나 둘 중 하나지. 남의 고통에는 무감각하지만 자기 고통에는 민감한 놈들이라 대부분은 후자를 택하지. 구역질나는 놈들.”
라우렌시오가 혀를 찼다. 그러는 사이에 이제 아일락샤의 성문에 도착했다. 베로니카는 성문에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악마숭배자들을 가두는 곳이라 그런지 경비가 대단히 삼엄했다. 성문 위에는 성기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감시하고 있는 것은 성벽 바깥이 아니라 성벽 안쪽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일락샤 안에는 위험천만한 악마숭배자들이 아주 많이 있으니까.
하지만 말발굽 때리는 소리 때문에 성기사 하나가 엔디미온 일행을 발견했다. 일부 성기사들도 뒤로 돌았다. 그들 중에서 책임자로 보이는 자가 말했다.
“정지! 정지하시오! 당신들은 누구요? 이곳은 아일락샤, 악마숭배자들의 감옥이오! 쉴 곳을 찾아온 것이라면 돌아가시오!”
엔디미온이 대답했다.
“우리는 선량한 여행자들이오! 하룻밤 머물 곳을 찾고 있소!”
“선량한 여행객?”
자기 입으로 선량하다고 말하는 자는 대개 선량하지 않은 법이다. 성기사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자 엔디미온이 다시 말했다.
“정정하겠소. 악마사냥꾼 비슷한 일을 하는 자들이오.”
“······장난치지 말고 돌아가시오. 우리는 전능자의 말씀을 받드는 자이고 인내를 미덕으로 알고 있으나 커다란 호수에도 바닥은 있는 법이오.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고 돌아가시오.”
“오늘 하루만 안에서 보내게 해주면 안 되겠소? 물어볼 것도 있소.”
“돌아가시오!”
성기사는 단호했다. 엔디미온은 억지로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야 할까 고민했다. 뒤를 돌아보니 비다르가 손을 꼼지락대고 있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소.”
엔디미온이 말의 머리를 돌리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성벽 위의 성기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물론 엔디미온을 보고 소리를 지른 것은 아니었다. 아일락샤 내부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요란한 소리가 나고 불꽃이 성벽 위까지 솟아올랐다. 성벽 위에 있던 성기사들이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긴급한 상황인지 다른 성기사들을 향해 크게 소리를 치는데 그 목소리가 성벽 아래에 있는 엔디미온 일행까지 들릴 정도였다.
“긴급! 긴급 상황이다! 감방으로 마녀 호송 중 탈출 발생! 마녀 탈출 발생!”
라우렌시오가 말했다.
“마녀가 탈출한 모양이군. 아주 드물지만 가끔 있는 일이야. 마녀란 족속들은 언제나 비장의 수를 남겨두거든. 하지만 금방 제압당할 거다. 여기 성기사들은 모두 실력 있는 자들이니까.”
하지만 그의 말과 다르게 성벽 안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불꽃이 치솟고 비명이 들렸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증거였다. 엔디미온은 멀뚱히 성문만을 보고 있었다. 들어가야 할까. 혹시라도 성문을 부수고 들어갔다고 악마숭배자 취급을 하지는 않을까. 그냥 있어야 할까. 전부 실력 있는 성기사라면 알아서 잘 해결하지 않을까.
잡다한 생각들을 하는 중에 갑자기 성문에서 쿵 소리가 났다.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혔다. 다시 한 번 성문이 흔들렸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성문에 걸려있던 마법이 깨진 것이다. 엔디미온은 이제 말에서 내렸다. 말을 뒤쪽으로 보내고 성문을 향해서 걸어가자 쾅 소리가 나면서 성문이 박살나며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불꽃이 엔디미온을 정면에서 집어삼켰다. 엄청난 기세였다. 불꽃과 함께 나타난 것은 산발로 자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옷은 추레해서 넝마나 다름없었고 입가에는 하얀 버짐이 있었다. 감옥 생활이 녹록치 않다는 증거였다.
“하하하! 드디어 난 자유의 몸이다! 멍청한 전능자의 개들! 나는 주인님께 돌아간다! 이제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녀가 깔깔 웃다가 정면에 있는 엔디미온 일행을 보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가 그들을 향해서 마법을 날리려고 할 때였다.
“야.”
불꽃이 사그라지자 엔디미온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몸에 붙은 불씨들을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뭐야, 죽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하지만 상관없어. 이번에 죽이면 되니까!”
마녀가 손을 휘두르자 화염구가 날아갔다. 그것에 맞는다면 살은 타버리고 뼈는 부서질 것이다. 그래야 했다. 보통은 말이다.
엔디미온은 날아오는 화염구를 손으로 쳤다. 벌레를 쳐내듯이 툭.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화염구는 힘을 잃고 산시사방으로 흩어졌다.
“······마법이 안 통해?”
마녀는 아연한 얼굴로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마법이 안 통할 수는 있다. 성기사들 중에서도 마법에 대한 저항력을 가진 자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저런 식으로 손으로 쳐내는 자는 없었다.
마녀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 엔디미온이 그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깜짝 놀란 마녀는 다시 마법을 사용하려 했지만 엔디미온이 더 빨랐다. 손이 철썩 소리를 내며 마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뚜두둑 소리가 나면서 고개가 홱 돌아가는 것을 보니 목이 부러졌을지도 몰랐다.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쓰러진 마녀를 향해서 엔디미온은 무심히 말했다.
“그럼 그딴 게 통할 줄 알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