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12화 (112/199)

112

“감동적인 재회 중에 미안하지만 둘 다 좀 죽어줘야겠다.”

제이스와 힐레는 갑작스런 엔디미온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멍청하게 누가 말을 걸었는지 확인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제이스는 반사적으로 마법을 날렸다. 사악한 힘이 담긴 빛줄기가 엔디미온을 향해 날아왔다.

마법의 발동이 아주 빨랐다. 엔디미온은 작게 감탄했다.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보라색 빛이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지만 별로 겁내지 않았다. 그는 맨몸으로 그냥 마법을 받아냈다. 빛줄기가 스치고 지나간 지하의 벽이 바스라지고 모래가 되었다.

통로를 가득 채운 먼지구름을 가만히 지켜보던 제이스가 힐레를 향해 말했다.

“깜짝이야. 별 것도 아닌 놈이 사람 놀래고 있어. 힐레, 어서 나가자. 주인님께서 널 기다리신다.”

제이스는 오른쪽 손을 천장을 향해 뻗었다. 그러자 살가죽을 뚫고 무언가 튀어나오려는 것처럼 오른손이 꾸물거렸다. 잠시 뒤에 그것은 거대한 거인의 손으로 변해있었다. 악마숭배자가 아니라 악마에게 달려있어야 할 주먹이었다. 제이스는 그 주먹으로 천장을 부쉈다. 후두둑 떨어지는 돌조각들을 거인의 손으로 막아낸 후에 힐레를 향해 말했다.

“올라타라. 위로 보내주마.”

오랫동안 지하에서 빛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냈던 힐레는 아주 가벼웠다. 물론 그녀가 무거웠다고 해도 거인의 손은 사람 한 명 정도는 거뜬히 들었을 것이다. 지상으로 올라간 힐레가 제이스를 향해 말했다.

“넌 어쩌려고?”

“나도 바로 올라갈······.”

갑자기 입을 다무는 그를 보며 힐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이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먼저 가라. 성문 근처에 내가 사용했던 문이 있다. 곧장 그리로 가라. 그 문을 넘으면 주인님께 돌아갈 수 있다. 악귀들이 널 지켜줄 거다.”

힐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타닥타닥 하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제이스는 차츰 걷히기 시작하는 먼지구름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안에 있는 엔디미온을.

“내 마법을 맞고도 멀쩡하군.”

“이딴 거 맞고 죽는 놈도 있나.”

엔디미온이 손을 휘두르자 먼지구름이 완전히 걷혔다. 그는 왼쪽 다리만 약간 굽히고 오른쪽 다리는 쭉 뻗고 있었다. 상처를 입은 곳도 없었고 옷이 약간 찢어진 것이 다였다. 제이스의 마법은 정말로 아무 효과도 없었던 것이다.

제이스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말투가 참 건방지군. 나는 너 같은 놈들을 잘 알아. 성기사들 중에는 날 때부터 마법에 대한 저항력을 타고나는 놈들이 있지. 그래서 자기한테 마법이 안 통한다는 것을 알고 마법사만 보면 아주 기고만장하단 말이야.”

엔디미온은 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했다.

“나는 그걸 볼 때마다 참 웃겨. 그 멍청한 놈들이 타고난 마법 저항력은 어디까지나 마법의 위력을 줄여주는 것뿐이야. 그런데 너 같은 놈들은 자신이 마법에 대한 완전한 면역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지. 정말 웃음이 나올 정도로 멍청한 착각이야.”

제이스가 눈을 빛냈다. 그의 오른쪽 손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거기서 아까의 몇 배나 되는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알겠나? 너 같은 놈들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정말 강력한 마법을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어서란 말이다, 이 멍청한 자식아!”

엔디미온은 인정했다. 기세는 대단하다고. 저만한 마법이라면 지금 있는 지하의 공간은 일소에 없애버릴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성배기사만 빼고.

“내가 말했지.”

빛이 엔디미온의 몸에 부딪쳤다. 강이 범람해 홍수가 사람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엄청난 기세였다. 하지만 아무리 거대한 홍수라도 뿌리가 단단히 박힌 바위를 밀어낼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바위에 부딪쳐 물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질 뿐이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엔디미온에게 부딪친 빛은 두 갈래로 갈라져 애꿎은 벽만 부수고 있을 뿐이었다. 제이스는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있다고 해도 저게 말이 되는 일일까. 하지만 그는 깜짝 놀라서 공세를 늦추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왼쪽 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붙잡고 있는 대로 마력을 짜냈다.

그래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손날로 빛을 두 갈래로 가르며 성큼성큼 걸었다.

“이딴 거 맞고 죽는 놈도 있냐고.”

거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은 점차 기세를 잃었다. 엔디미온이 손날로 빛을 갈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이스가 마력의 공급을 멈췄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악마숭배자로 활동했지만 단 한 번도 기사수도회에게 붙잡히지 않았다. 그것은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마법이 먹히지 않는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이 먹히지 않는 적을 상대로 마법만 고집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제이스는 마법을 부리는 대신에 거인의 손으로 엔디미온을 공격했다. 그것은 사람 하나 정도는 가뿐히 뭉개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까 악마숭배자가 외치던 거인의 손을 가진 자가 바로 너냐?”

제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엔디미온을 해치우고 얼른 힐레를 뒤쫓아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거인의 손이 엔디미온을 머리부터 짓뭉개려고 했다. 이 거대한 손으로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벌레 죽이듯 힘으로 뭉개버릴 때의 즐거움은 언제나 그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엔디미온은 제이스의 얼굴을 보았다. 두 눈에는 광기와 희열이 서려있었다.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악마숭배자들의 눈은 대개 저러니까. 저런 눈을 가진 악마숭배자는 질리도록 보았다. 그리고 질리도록 죽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엔디미온이 힘껏 날린 주먹은 거인의 손을 관통했고 구멍이 난 부분을 세게 쥐고서 휘두르자 제이스의 몸이 엔디미온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벽을 향해 날아갔다. 쿵 소리가 나면서 벽에 부딪힌 제이스가 컥컥 소리를 냈다.

그가 일어나려고 했으나 엔디미온이 다시 거인의 손을 붙잡고 벽을 향해 휘둘렀다.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좌우에 있는 벽을 향해 번갈아가며 후려치니 제이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크게 내상을 입은 그는 꺽꺽 소리를 내며 핏물을 뱉어냈다. 엔디미온은 그제야 거인의 손을 바닥에 내던졌다.

제이스는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마법이 안 통하는 것도 이상한데 그 괴력은 대체 뭐냐고. 내 오른손은 진짜 거인의 손과 같은 건데 대체 왜 내가 힘에서 지는 거지?”

“날 죽이려면 거인의 손이 아니라 진짜 거인을 데리고 왔어야지. 그것도 한 무더기로.”

“씨발, 너 대체 뭐야! 대체 뭐냐고!”

엔디미온은 주먹을 날려 제이스의 머리를 가격했다. 단단한 것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질척거리는 것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지나가던 선량한 여행자.”

대답은 없었다. 엔디미온은 천장에 난 구멍을 보았다. 아까 전에 힐레가 저 구멍을 통해서 도망갔다. 그녀는 위험한 마녀였고 강력한 악마숭배자였으니 반드시 붙잡아야 했다. 도망치게 두면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어쩔 셈이오?”

에투알이 묻자 엔디미온은 주변에 떨어진 돌조각들을 몇 개 주웠다. 디딤돌로 쓸 생각이었다.

“어쩌기는. 쫓아가야지.”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난 엔디미온은 힘껏 달렸다. 그리고 돌조각들을 디딤돌 삼아서 힘껏 뛰어올랐다. 힐레는 거인의 손 덕분에 겨우 올라간 지상을 그는 도약 한 번만으로 올라갔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일락샤 내부였다. 힐레는 오랜 수감 생활로 몸이 약해져 있었다.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엔디미온은 복도를 달렸다. 그런데 한참 달리다보니 복도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갑옷을 입지 않은 것을 보니 성기사는 아니었는데 얼굴을 보니 요리사도 아니었다. 그들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고 발목에는 오랫동안 족쇄를 차고 있었던 흔적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악마숭배자들이었다. 뜬금없이 복도에서 죽어있는 것을 보고 엔디미온을 미간을 좁혔다. 그들에게 상처는 없었다. 성기사들이 죽인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럼 누구일까. 엔디미온은 시체들을 이리저리 확인하다가 복도 끝 모퉁이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모퉁이 너머에서 힐레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빠르게 복도를 달렸다. 다시 한 번 비명소리가 났다.

“크억! 너, 너, 어째서 나를······.”

목소리는 점차 작아지고 불분명해졌다. 모퉁이를 돈 엔디미온은 죽어가고 있는 남자와 그의 머리를 손으로 잡고 있는 힐레를 보았다. 그녀는 지하에서 봤을 때와 달리 생기가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는 누구라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같은 악마숭배자의 생명력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하아······. 황홀한 기분······. 참 맛있었어, 너의 생명력. 이건 내가 널 대신해서 잘 써주도록 할게.”

힐레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구잡이로 자라서 바닥까지 오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장난꾸러기 소녀처럼 보였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그게 진짜 모습이 아니란 것을 안다. 마녀들은 대부분 악마의 힘 덕분에 나이보다 더 어린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마녀일수록 겉모습이 어리게 보였다. 그래서 성년의 모습을 한 마녀보다 소녀의 모습을 한 악마를 더 조심해야 했다.

“하는 짓이 꼭 모기 같군. 남을 성가시게 하고 해를 끼친다는 점에서 말이야. 그리고 남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것도.”

“누구야!”

힐레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는 엔디미온의 모습을 보고서 악마숭배자의 머리를 바닥으로 밀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손을 엔디미온을 향해 내밀고 있었으나 마법을 날리지는 않았다.

“······제이스는?”

“죽었다.”

“제이스가 죽어? 그럴 리가······.”

“믿기 힘들면 확인하러 가던지.”

“흥, 지하로 말이야?”

엔디미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옥으로 가야지. 네 친구는 거기 있으니까.”

“하! 내가 지옥으로 가? 웃기는 소리하지 마! 나는 살아서 주인님께 돌아갈 거다!”

떼를 쓰는 꼴이 꼭 꼬마 같군. 엔디미온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얼른 저 머리를 박살내고 악귀들이 쏟아져 나오는 문을 닫을 생각이었다. 힐레가 외쳤다.

“내 주인님은 죽음의 지배자이자 불멸의 왕이며 또한 영혼군주인 동시에 다르디낭의 적자이시다! 그리고 나는 주인님의 충실한 종이며 그 거룩한 뜻을 행하는 대행자다! 다섯 마을을 불태우고 두 도시를 함락시킨 이 학살자 힐레를 상대로 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씹, 말 많네.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혔다가 문득 말했다.

“잠깐만, 네 주인이 누구라고?”

“죽음의 지배자이자 불멸의 왕이며······.”

“아니, 그거 말고.”

“영혼군주······.”

“그 다음 거.”

“다르디낭의 적자······.”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르디낭의 적자.

“마음이 바뀌었다. 살려는주마. 물어볼 게 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