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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14화 (11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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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다르.”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비다르는 주변의 소음 속에서도 용케 엔디미온의 부름을 들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힐레에게 다가가 그녀의 뒷덜미를 잡으며 말했다.

“오, 엔디미온. 여기 있을 줄 알았는데 없더라. 이 사달이 났는데 어디 갔다 온 거냐?”

“마녀를 쫓고 있었지. 네가 방금 때려눕힌 그 마녀 말이야.”

“아, 이 녀석을 쫓고 있었냐? 어쩐지 다급하게 도망친다 했더니 너한테 쫓기고 있었군.”

힐레는 비다르의 손에 뒷덜미를 붙잡혀 공중에 대롱대롱 떠있었다. 의식을 잃은 것인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고. 엔디미온에게 뺨을 두 대나 맞고 비다르의 강철 주먹을 정통으로 맞았으니 죽었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엔디미온은 비다르에게 말했다.

“그 녀석 혹시 죽었나? 죽었으면 곤란한데.”

“왜? 죽이면 안 되는 거야?”

“물어볼 게 있거든.”

“그래? 한 번 살아있나 확인해볼까. 야, 죽었냐? 어? 마녀야, 죽었어?”

비다르가 힐레의 뒷덜미를 잡고 흔들면서 그녀의 뺨을 가볍게 툭툭 쳤다. 물론 그는 가볍게 친다고 쳤지만 힐레에게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뺨을 몇 번 쳤을 뿐인데 입에서 부러진 이가 툭 떨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서 비다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몸이 무슨 설탕 과자마냥 약하네.”

“그딴 식으로 확인하다가 살아있던 것도 죽이겠다. 그냥 호흡만 확인하면 되잖아.”

비다르는 시키는 대로 마녀의 코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미약하지만 호흡이 있었다.

“오, 살아있나 본데?”

“그럼 바닥에 눕혀.”

“치유의 은총이라도 내려주게?”

이죽거리는 비다르를 향해 엔디미온은 싸늘하게 말했다.

“마녀 따위에게 내려줄 은총 따위는 없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농담이었는데.”

비다르는 구시렁대면서 기절한 힐레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일으키는데 좌우에서 악귀 두 마리가 달려들었다. 그는 달려드는 악귀들을 쳐다보지도 않고서 양손을 뻗어서 악귀들의 머리를 붙잡았고 그대로 서로를 향해 휘둘렀다. 단단한 것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악귀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비다르는 머리가 깨진 악귀들의 시체를 바닥에 내던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이제 어쩌려고?”

“일단 주변부터 정리해야겠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엔디미온을 제외하고 모두 헛간으로 돌아갔는데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비다르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설마 이 상황을 모른 체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아까 보니까 여기 감옥에 갇혀 있던 놈들이 다 탈출한 것 같더라고? 그래서 그 자식들 잡으러 갔는데.”

“그래? 그럼 비다르, 너는 나랑 같이 여기부터 정리하고 악마숭배자들을 쫓으러 가자.”

“이 마녀는?”

“그건 에투알이 지킬 거다.”

엔디미온이 성검을 뽑아서 바닥에 꽂았다. 단단한 돌바닥이었는데도 부드럽게 쑥 박혔다. 에투알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킨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여기서 마녀 좀 지키고 있어. 잠깐이면 돼.”

“난 보모가 아니라 성검이오! 어둠을 가르고 빛을 수호하는 성검! 그런데 지금 나보고 마녀나 지키고 있으란 거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내 기사님?”

“에투알.”

엔디미온이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부탁이야.”

“크흠······.”

에투알은 부탁이라는 말에 약했다. 옛날부터 그랬다. 그래서 엔디미온은 부탁이란 말로 그녀에게 귀찮은 일을 떠맡길 때가 종종 있었다.

“그으럼 어쩔 수 없지······. 부탁이니까······. 그래! 걱정하지 마시오! 이 성검 에투알이 책임지고 지키고 있겠소!”

에투알은 사방에 빛을 뿌리며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늘씬한 미녀가 나타나자 악귀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휘두른 발차기에 허리가 부러지거나 손날치기에 목이 잘렸다. 겉으로 보기에 아리따운 아가씨라고 해도 에투알의 진짜 모습은 성검이었다. 주인이 없다고 해도 인간의 몸으로 악귀들을 상대할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었다.

“그럼 우리도 가볼까.”

엔디미온과 비다르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엔디미온은 오른쪽, 비다르는 왼쪽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몰려드는 악귀들을 박살냈다. 거구의 두 남자가 활약하기 시작하니 숫자에서 밀리던 성기사들 역시 힘을 냈다.

성기사들을 격려하며 싸움을 지휘하고 있던 라이먼이 하늘을 향해 검을 들며 외쳤다.

“문을 닫아라! 문부터 닫아야 해!”

악귀들은 제이스가 나왔던 문으로부터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성기사들이 아무리 악귀들을 해치워도 숫자가 줄기는커녕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라이먼의 외침을 들은 성기사들이 대형을 이루어 문을 향해 진격했다. 쐐기 모양을 이루고 단단한 갑옷으로 몸을 보호하고 충만한 신성력을 무기 삼아 돌격하는 그들을 악귀들이 감히 막을 수는 없었다.

성기사들은 점차 문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시 뒤면 신성력을 이용해 문을 닫을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였다.

“저기다! 저 문이야! 저길 통하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어!”

어디선가 화염구가 날아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섯 개나 되는 화염구가 성기사들을 향해 날아왔다. 뒤에서 악귀들과 싸우며 성기사들의 진격을 지켜보던 라이먼이 크게 소리쳤다.

“머리 위! 모두 머리 위를 봐라! 마법이다! 충격 대비!”

아일락샤의 성기사들은 모두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강철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머리 바로 위에서 떨어지는 여섯 개의 화염구들을 보고서 당황하지 않았다. 얼른 머리 위로 무기를 들며 신성력을 방출했다. 신성력이 방어막을 형성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에 화염구의 충격을 완전히 막아낼 만큼 단단한 방어막을 만들 수는 없었다.

여섯 개의 화염구들과 충돌한 얇은 보호막은 산산조각이 났고 성기사들은 그 충격으로 우르르 뒤로 넘어졌다. 그때를 노리고 악귀들이 성기사들의 몸 위에 올라탔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일단 부상자들부터 구한다! 모두 움직여!”

라이먼의 지휘에 따라서 성기사들이 위험에 빠진 다른 성기사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악귀 한 마리의 모가지를 비틀고 있던 엔디미온이 마법이 날아온 쪽을 보았다. 거기에는 여섯 명의 악마숭배자들이 있었다. 성기사들의 저항이 격렬해서 성문으로는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요르스가 희생해서 만들어진 문으로 탈출할 생각인 듯 했다.

엔디미온은 축 늘어진 악귀를 휘둘러 다른 악귀들 서너 마리를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그는 비다르를 향해 외쳤다.

“비다르! 저기 있는 악마숭배자들부터 처리해! 문은 내가 닫는다!”

“맡겨만 두라고!”

비다르는 길을 가로막는 악귀들을 무참히 박살내면서 달려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 잠깐만. 한 가지 확인할 게 있는데 혹시 저기 있는 놈들한테도 용건 있냐?”

엔디미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가서 다 죽여.”

비다르가 씩 웃었다.

“그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네.”

강철 주먹의 전사가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그는 성난 황소처럼 달렸다. 길을 가로막는 악귀들을 향해서 주먹을 날릴 것도 없었다. 그냥 그 거대하고 단단한 몸으로 부딪치기만 해도 악귀들은 멀리 나가떨어졌다. 악마숭배자들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비다르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 그들이 얼른 마법을 날렸지만 비다르는 그것을 그냥 맨몸으로 맞으면서 거침없이 질주했다. 잠시 뒤에 들린 것은 주먹 휘두르는 소리와 뼈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비명과 커다란 웃음이었다.

비다르가 악마숭배자들을 학살하는 것을 잠깐 보던 엔디미온은 이제 자신의 일을 하기로 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었다. 악귀들의 협공에 당해 큰 상처를 입고 후방으로 이송된 성기사가 두고 간 검이었다.

엔디미온은 검을 허공에서 몇 번 휘두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손에 딱 맞았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인간의 몸으로 만들어진 문을 보고 있었다. 문을 열기 위한 제물로 스스로를 받친 요르스의 머리는 형형하게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저걸 잘라야 했다.

“그럼 가볼까.”

처음에는 가볍게 제자리에서 통통 뛰었다. 그 다음에는 한 발자국, 다음에는 두 발자국, 세 발자국. 이제 그는 달리고 있었다. 빨랐다. 그것도 아주 빨랐다. 그가 달릴 때마다 악귀들의 머리가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를 잘린 악귀들은 모두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엔디미온이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보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모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엔디미온의 돌격을 막을 수 있는 적은 없었다. 악귀들이 수백 마리가 있든 아니면 수천 마리가 있든 성배기사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그가 엄청난 무용으로 악귀들을 학살하는 것을 본 라이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게 악마사냥꾼이라고? 칼날이 번뜩이면 악귀들의 머리는 바람 불면 떨어지는 낙엽처럼 우수수 낙하했다. 빠르고 정확한 공격이었다.

라이먼은 엔디미온의 정체가 궁금해졌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악귀들로부터 부하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악귀들에게 깔려 발버둥치는 부하 한 명을 구한 뒤에 소리쳤다.

“조금만 더 힘내라! 곧 문이 닫힌다!”

성기사들 역시 엔디미온의 활약을 보고 있었다. 라이먼이 말한 대로 조금만 있으면 문이 닫힐 것이다. 엔디미온은 이제 문과 고작 다섯 걸음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힘껏 달려서 문 위에 달린 요르스의 머리를 치기만 하면 다 끝났다.

악귀들은 문이 닫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열심히 엔디미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닥불 안으로 뛰어드는 날벌레와 같은 짓일 뿐이었다. 검이 번뜩일 때마다 악귀들이 갈려나갔다. 이제 마지막 한 걸음. 엔디미온은 악귀의 허리를 베고서 문 위에 달린 요르스의 머리를 보았다. 그리고 잠깐의 호기심 때문에 문 너머를 보았다.

문 너머의 모습을 보면 잉굴라트를 찾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하지만 문 너머는 아주 어두웠고 위치를 특정할 만한 것이 없었다. 엔디미온은 그냥 한 번 넘어가볼까 생각했다. 양쪽이 이어져 있으니 잠깐 넘어갔다가 돌아오면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 순간 어둠 속에 있던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시선이었다. 저 어둠 안에 무언가 있었다. 하지만 시선이 마주치는 것은 찰나였고 그것이 갑자기 숨어버렸기에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엔디미온이 궁금증을 느끼며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딛었을 때였다.

“어?”

문이 닫혔다. 아직 요르스의 머리를 베지도 않았는데도 문이 닫혔다. 엔디미온은 이상함에 미간을 찡그렸다가 문득 아까 전에 봤던 무언가 갑자기 숨어버렸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순간 그는 이게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문이 닫혔다! 엔디미온이 문을 닫았다! 잔당들을 처치하고 악마숭배자들을 붙잡아라!”

엔디미온은 라이먼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문을 닫은 게 아니었다. 저쪽에서 문을 닫은 것이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답은 간단했다. 성배기사가 그쪽으로 넘어갈까 겁이 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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