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누구인지는 몰라도 겁쟁이로군.”
저쪽에서 문을 닫은 것이 잉굴라트는 아닐 것이다. 그는 다르디낭의 적자이자 수많은 부하들을 이끄는 영혼군주였다. 엔디미온이 생각하기에 잉굴라트에게 있어서 힐레는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전력은 아니었다. 그녀의 전적은 대단하지만 그 정도는 부하 악마들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잉굴라트가 힐레의 구출을 명했다고 해서 진행 상황을 직접 지켜보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그에게 있어서 힐레는 있으면 도움이 되지만 없어도 딱히 상관없는 존재일 것이다.
힐레의 구출 작전은 잉굴라트의 부하 악마가 담당했을 것이고 저쪽에서 문을 닫은 것도 그 자일 것이다. 엔디미온은 문이 닫히고 스르륵 무너지는 요르스의 몸을 보았다.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쫙 늘어났던 몸은 이제 바람 빠진 가죽 주머니마냥 쪼그라들고 있었다.
“에투알!”
성검 에투알은 도도한 자태를 뽐내며 다가오는 악귀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그녀는 엔디미온이 부르자 헤헤 웃으며 말했다.
“오, 엔디미온! 문을 닫았군! 잘했소! 나도 시킨 대로 열심히 마녀를 지키고 있었소!”
에투알은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대충 무시한 뒤에 그녀를 지나서 비다르에게 달려갔다.
“그래, 잠깐만 더 지키고 있어.”
“어? 어? 엔디미온? 더 지키라고? 얼마나? 응?”
“비다르!”
악마숭배자들을 진즉 다 죽인 비다르는 양손에 하나씩 악귀를 들고서 주변을 향해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손에 든 악귀를 휘두를 때마다 네댓 마리의 악귀들이 멀리 날아갔다. 크게 웃으면서 악귀들을 학살하고 있던 그는 엔디미온이 다가오자 들고 있던 악귀들을 바닥에 내던졌다.
“오, 빠른데. 벌써 끝낸 거냐?”
“그래, 이제 여기는 성기사들에게 맡겨 두고 우리는 도망간 악마숭배자들을 잡으러 가자.”
“벌써 라이오넬이랑 라우렌시오가 갔는데 굳이? 그리고 꼬맹이도 있고.”
“일은 빠르고 확실하게 끝내야지.”
비다르는 대답하는 대신에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은 도망간 악마숭배자들을 잡기 위해 움직였다. 아일락샤의 입구는 성기사들이 지키고 있으니 대부분의 악마숭배자들은 입구 반대쪽에 있는 성벽으로 도망쳤다. 마법으로 성벽을 부수거나 성벽을 타고 올라서 탈출할 생각이었다.
괴물로 변한 자들은 성벽을 엉금엉금 타고 오르고 있었고 사술을 부리는 자들은 한데 모여서 두꺼운 성벽을 마법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아직 단 한 명도 탈출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라이오넬과 라우렌시오 때문이었다.
라이오넬은 성벽 아래에서, 라우렌시오와 베로니카는 성벽 위에서 각각 악마숭배자들을 상대했다. 성벽을 부수려고 했던 악마숭배자들은 라이오넬이 움직일 때마다 몸의 일부분이 잘렸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보지 못했다. 고통은 언제나 느리게 찾아왔다. 그들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자신의 손이나 다리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베였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니까.
성벽을 오르던 악마숭배자들 역시 방법은 달랐으나 맞이한 결말은 똑같았다. 라우렌시오와 베로니카는 온갖 신비한 마법으로 그들을 땅으로 떨어트리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 아흔 명이 넘었던 악마숭배자들의 숫자는 이제 마흔도 남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아직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누군가의 등 뒤에 숨어서, 누군가의 시체 뒤에 숨어, 누군가의 그림자 뒤에 숨어서, 어떤 식으로든 틈을 노려서 탈출하려고 하는 간악한 자들이 몇 있었다.
은신 마법으로 숨어서 기회를 노리던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구석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다 탈출할 생각이었다. 또 어떤 자들은 시체로 위장해 아일락샤를 나가려고 했다. 그들의 자신이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라이오넬과 라우렌시오, 둘 중 누구도 그들의 간악한 술수를 눈치 채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이거 우리 마음대로 죽여도 되는 거야? 이 자식들한테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안 죽이고 여기 가두어 두는 거라면서? 그럼 죽이지 말고 산 채로 붙잡아야 하는 거 아냐?”
콱. 알이 깨지듯 머리가 부서졌다. 시체로 위장해 탈출의 기회를 노리던 악마숭배자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비다르는 또 한 발자국 움직여서 악마숭배자의 머리를 짓뭉갰다. 이번에도 시체로 위장하고 있던 악마숭배자였다. 그는 정말 우연찮게도 움직일 때마다 시체로 위장 중이던 악마숭배자들의 머리만 발로 뭉갰다.
그가 점차 다가올 때마다 시체인 척 하고 있던 악마숭배자들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죽은 척 하고 있다는 걸 들켰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면서 머리를 부수고 다니는 건가? 처음에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시체 흉내를 내던 주변의 악마숭배자들이 진짜 시체로 변하는 것을 보니 두려움이 점차 커졌다. 이성으로 억누를 수 있는 두려움의 양은 정해져 있었다. 두려움을 담는 그릇이 있다면 지금은 아슬아슬하게 넘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한 방울이었다. 그릇 안에 떨어지는 단 한 방울만으로도 두려움은 넘쳐흐르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한 방울은 비다르가 또 한 명의 머리를 깨부수는 것을 봄으로써 그릇 안으로 떨어졌다.
이제는 참을 수도 없고 억누를 수도 없다. 시체인 척 하고 있던 악마숭배자들은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왐마 씨! 뭐야? 이 새끼들 시체 아니었어?”
비다르는 진심으로 깜짝 놀라서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악마숭배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 그가 시체인 척 하던 악마숭배자들의 머리를 부수던 것이 완전히 우연이었음을 알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일단 자리에서 일어난 이상 비다르를 죽이고 도망쳐야 했다. 한 명은 괴물로 변하고 나머지 두 명은 뒤에서 사술을 부렸다.
거대한 덩치의 괴물과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날카로운 창, 그리고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가시들.
“이해가 안 되네. 시체인 척 하고 있을 거면 끝까지 하고 있을 것이지······.”
비다르가 주먹을 쥐었다. 오른쪽 주먹은 직선으로 날아가서 괴물의 머리에 직격했다. 왼손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창을 붙잡아서 우그러트렸다. 쾅 소리가 나게 구른 발은 바닥에서 솟아오르던 가시들을 모두 가루로 만들었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먹 한 번을 날릴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왜 갑자기 일어나서 자기 명을 재촉하는 거야? 그것도 남 놀래면서 말이야.”
오른쪽 손이 악마숭배자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찌그러트렸다. 왼쪽 손은 다른 악마숭배자의 목을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세 명의 악마숭배자는 순식간에 숨이 끊어졌다.
엔디미온이 비다르를 보며 말했다.
“죽이면 안 되냐고 물어본 게 너 아니었냐.”
“그랬나? 아니, 그런데 너도 벌써 죽였잖아.”
엔디미온의 손아귀에 무언가 잡혀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에 힘을 주자 갑자기 반투명한 것이 버둥거리더니 결국 은신 마법이 효력을 잃고 축 늘어진 악마숭배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죽인 것은 한 명만이 아니었다. 비다르가 싸우는 동안 엔디미온은 이 주변에 악마숭배자들이 은신해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아무리 성배기사라도 은신 마법을 쓴 상대를 맨눈으로 찾아낼 수는 없었으나 그의 발달된 감각은 악마숭배자들의 숨소리와 맥박 뛰는 소리를 통해서 위치를 찾아냈다. 그리고 죽였다. 성벽에 던져서 죽이고 바닥에 내던져서 죽이고 허리를 반으로 접어서 죽였다. 마지막 한 명은 목을 졸라 죽였고.
“얼추 다 끝난 것 같은데.”
악마숭배자들이 아무리 발악해도 이곳에서 탈출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이곳에 엔디미온 혼자만이 있었다고 해도 아흔아홉 명의 악마숭배자들 중 단 한 명도 도망갈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엔디미온이 그들을 전부 죽이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 뿐일 것이다.
엔디미온이 비다르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혹시라도 라이먼이 왜 다 죽였냐고 물으면 어떡하냐?”
“그때는 당당하게 행동하자고. 나쁜 놈들 죽였는데 오히려 착한 일 한 거 아냐?”
“그건 당당한 게 아니라 뻔뻔한 거고.”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성벽 위에 있던 라우렌시오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베로니카를 한 손으로 안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다리가 부러져서 바닥을 굴렀겠지만 요정이자 성배의 힘을 받은 영웅인 그는 날렵하게 착지했다.
“간만에 땀 좀 뺐군. 문은 닫은 거야?”
“그래. 수고했다, 라우렌시오.”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것뿐인데 수고라고 할 것까지야. 네 말대로라면 이건 내 의무니까.”
엔디미온이 웃다가 비다르를 보며 말했다.
“너도 저런 태도는 좀 보고 배워.”
“배우기는 뭘 배워? 아니, 똑같이 너 버리고 도망쳤는데 왜 라우렌시오만 오냐오냐 하냐?”
“넌 말하는 게 약간 밉상이야.”
비다르는 정말로 기가 차다는 듯이 허 소리를 냈다. 엔디미온은 아직도 허공에다 검을 휘두르며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라이오넬을 보며 말했다.
“저 친구 좀 진정시켜 봐.”
“영감님! 이제 다 끝났어요! 돌아오세요!”
“나는 천둥검의 라이오넬이다!”
베로니카가 라이오넬을 데리고 왔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자 엔디미온이 말했다.
“이제 돌아가자. 에투알이 기다리고 있어.”
“어라? 뤼미에르님이 없네요?”
“마녀를 지키고 있어.”
성검이 마녀를 지킨다니?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라서 베로니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엔디미온이 가면 안다는 듯이 고갯짓을 하자 모두가 그의 뒤를 따라서 움직였다. 성문 쪽으로 돌아가니 성기사들이 악귀들을 모두 제압해서 시체들을 한 곳에 모으고 있었다.
엔디미온이 돌아온 것을 본 라이먼이 그에게 다가왔다.
“고맙소. 실력이 대단하더군. 성기사들 중에서 당신 같은 실력을 가진 자는 드물 것이오.”
“별말씀을.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소. 그런데 도망친 악마숭배자들 말인데······.”
“아, 혹시 몇 명이 도망쳤소? 그거라면 괜찮소. 우리가 반드시 다시 찾아낼 것이오. 당신 말대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대부분 우리 손에 죽었소. 저항이 거세서 어쩔 수 없었소. 몇 명은 살아있을 거요.”
라이먼은 두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다. 호탕한 웃음이었다.
“오히려 좋소. 난 그 망할 놈들을 볼 때마다 살의가 들끓었으니까.”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무리한 것만 아니라면. 아니, 무리한 것이라도 들어주겠소. 덕분에 아일락샤를 지키고 악마숭배자들이 탈출하는 일을 막을 수 있었으니 말이오.”
“힐레랑 잠깐 이야기를 할 시간을 주시겠소? 이야기가 끝나면 그 다음에 신병을 넘겨주겠소.”
“힐레? 그 마녀는 살아있는 거요?”
“내가 물어볼 게 좀 있어서 살려두었소. 이야기는 금방 끝날 거요.”
“알겠소. 우리는 주변을 정리하고 있겠소.”
“고맙소.”
엔디미온은 에투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라이먼에게 정체를 들키기 전에 다시 성검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엔디미온이 가까이 다가오자 성검이 부르르 떨렸다.
“엔디미온, 내가 열심히 마녀를 지키고 있었소!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했소! 엣헴!”
“그래, 수고했다.”
엔디미온은 대충 말한 뒤에 성검을 챙겼다. 그리고 아직 기절해 있는 힐레를 안아들었다. 덩치가 작고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 아주 가벼웠다. 그는 일행과 함께 힐레를 헛간으로 데려갔다.
“이거 안 일어나네.”
힐레를 헛간 바닥에 눕혀두고서 엔디미온이 손으로 턱을 괴었다. 비다르가 주먹을 들며 말했다.
“보통 때리면 일어나더라고. 한 대 때릴까?”
그러면 죽지, 이 무식한 사람아······. 베로니카가 비다르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라우렌시오가 말했다.
“물을 뿌리면 일어나지 않을까?”
“오,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라우렌시오가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나와 힐레의 얼굴을 적셨다. 갑작스럽게 얼굴에 쏟아지는 물 때문에 힐레가 컥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입과 코 안으로 들어간 물 때문에 켁켁 기침을 하던 그녀가 눈을 치켜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뭘 눈 째려?”
힐레는 비다르에게 뒤통수를 찰싹 얻어맞고 공손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