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힐레는 험한 말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억지로 꾹 다물었다. 그녀는 머리 회전이 빨랐다. 기절했다가 방금 일어났지만 자신이 처한 처지를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그녀의 양쪽에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엔디미온과 비다르가 있었다.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선했다.
“힐레.”
엔디미온의 목소리에 힐레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따귀를 맞았던 기억이 그녀의 몸을 움직인 것이다. 그녀가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자 엔디미온이 말했다.
“아까 널 협박한 게 문제였군. 하긴 성실하게 대답을 하든 아니든 결국 마지막은 죽음뿐이니 대답할 마음이 안 났을 거야. 강압적으로 다그치기만 한다고 만족스런 대답이 나오는 건 아니지. 그러니 조건을 바꾸겠다.”
갑작스러운 말에 힐레가 엔디미온의 눈치를 보았다. 설마 성실하게 대답하면 목숨은 살려주는 걸까?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네가 성실히 대답하면 널 죽이지는 않겠다.”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것은 말 그대로일 뿐이다. 이곳을 탈출하게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단지 죽이지 않겠다는 것뿐이다. 힐레는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하던 감옥 생활로 다싣 돌아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탈출할 기회가 다시 생길지도 모른다. 죽으면 그대로 끝이지만 일단 살아만 있다면 아주 낮은 확률이라도 탈출의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바로 오늘처럼 말이다. 가능성이 없는 것과 가능성이 아주 낮은 것의 차이는 아주 컸다. 힐레는 몹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네가 약속을 어긴다면? 바라던 정보만 쏙 빼가고 날 죽인다면? 너와 나는 적이야. 서로 믿음이 부족하다는 소리지.”
타당한 의심이었다. 엔디미온은 입을 열었다.
“내 이름과 전능자에 대한 신앙심을 걸고 맹세하겠다······라고 말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겠지. 그따위 것들은 널 안심시킬 수 없으니까. 나는 너와의 대화가 끝난 후에 아일락샤의 집행관에게 네 신병을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너와의 약속을 여겨도 집행관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난 너를 살려두어야 한다.
만약 내가 그 약속까지 저버릴 것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면 내 말을 믿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오히려 나는 네가 거짓을 말할까 걱정이 되는군. 거짓 정보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려는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잖나.”
힐레는 입술을 깨물었다. 엔디미온이 아일락샤 집행관과 척을 지면서까지 그녀를 죽이려고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생각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널 믿도록 하지. 그리고 나 역시 거짓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마법으로 말이야.”
마법의 맹세를 어기면 그 즉시 징벌이 떨어졌다. 가벼운 맹세라면 가벼운 징벌이 떨어지지만 무거운 맹세라면 무거운 징벌이 떨어졌다. 또한 마법으로 맹세하겠다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이제 힐레는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마법으로 맹세했으니까. 보통 이럴 때는 상호가 마법의 맹세를 했지만 힐레는 감히 엔디미온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없었다. 지금 약자의 입장에 있는 것은 그녀였다.
엔디미온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성 안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잉골라트는 어디에 있지?”
“······대체 주인님은 왜 찾는 거야? 하수인으로 받아달라고 하게? 아니면 거래라도 하게? 하하, 악마와 거래하려는 멍청한 자들이 가끔 있기는 하지. 네가 그럴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전부 아니다. 난 잉골라트를 찾아서 죽일 거다.”
힐레가 침묵했다. 엔디미온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무나 당당하게 해서. 그녀는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를 죽여? 주인님을? 이봐, 정신 차려. 주인님은 아주 강력한 악마야. 무려 다르디낭의 적자라고! 성기사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어도 이길까 말까인데 네가 주인님을 죽여? 말도 안 돼!”
“난 너한테 믿어달라고 말 안 했다. 너는 그냥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왼쪽에서 비다르가 일부러 손가락을 부딪치며 쇳소리를 냈다. 힐레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너한테 궁금한 건 잉골라트의 위치 하나뿐이다. 그것만 대답하면 돼.”
“······그걸 말하는 건 주인님에 대한 배신이야.”
“너의 주인님은 저기 멀리 있지만.”
엔디미온이 힐레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의 커다란 손은 마녀의 작은 머리를 꾹 눌렀다. 손가락이 머리를 조이는 듯 했다. 가만히 두면 손가락은 살가죽을 뚫고서 두개골에 구멍을 낼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안에 든 말랑한 것을 부수겠지. 힐레는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상상력이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나는 여기 가까이 있다는 걸 잊지 마라.”
“······트라바야. 트라바의 버려진 지하무덤이 주인님의 은거지야.”
“트라바?”
엔디미온이 자연스럽게 라우렌시오를 보았다. 백 년 동안 방랑했던 요정기사는 왕국의 지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바로 말했다.
“백 년 전 싸움에서 멸망한 도시의 이름이야. 지금은 터만 남았는데 오염이 심각해서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아. 토지를 정화하면 도시를 재건할 수 있지만 워낙 오염이 심하고 위치 자체가 외진 곳이라서 왕국에서도 그냥 두었지. 돈과 인력이 많이 들어가고 굳이 재건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 거기라면 숨어있어도 아무도 모를 만도 하지.”
엔디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바······. 혹시 여기서 많이 머나?”
“말 타고 달리면 일주일이면 가지.”
“길은 알고 있나?”
“대략.”
“그거면 됐어.”
잉굴라트의 위치를 알아냈으니 이제 힐레에게 용건은 없었다. 엔디미온이 힐레를 쳐다보자 그녀가 몸을 움찔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엔디미온은 집행관과의 약속 때문에 힐레를 죽일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게 거짓말이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면 정말로 약속을 했어도 그것을 무시하고 그녀를 죽일 수도 있었다.
힐레의 몸이 달달 떨렸다. 엔디미온은 그런 그녀를 향해 무심히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마녀를 만날 때마다 전부 죽였다. 난 너희 같이 구역질나는 족속들을 혐오하니까. 하지만 이번에 널 살려주는 것은 내가 너와 약속을 했기 때문이고 또한 내가 널 죽이지 않아도 결국 너는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엔디미온은 힐레를 죽이지 않았다. 그는 베로니카를 시켜서 바깥의 성기사를 한 명 데려오라고 했다. 베로니카가 얼른 달려가서 성기사 한 명을 데려오자 엔디미온은 그에게 힐레를 넘겨주었다. 성기사는 힐레의 손목과 발목에 형구를 채우고 라이먼에게 데려갔다. 마녀의 처우는 그가 결정할 것이다.
“또 긴 여행이 되겠군.”
라우렌시오가 헛간 안의 감자 자루에 등을 기댔다. 다른 사람들도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휴식을 취했다. 싸움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벌레들을 때려잡는 것은 제법 지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 잉굴라트란 놈을 죽이러 가는 거냐? 아, 그 이름 어디서 들어봤는데?”
비다르가 자루 안에서 순무 하나를 꺼내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잘 익은 순무는 단맛이 났다. 헛간 안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약간 퀴퀴한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잉굴라트? 나도 들어본 적 있네. 옛날에 칼라딘과 싸웠던 악마였지. 전장에서 두 번 맞붙었는데 그때마다 무승부가 났어. 물론 칼라딘과 잉굴라트의 실력이 비등해서라기보다는 전장의 상황 때문이었지. 그때 칼라딘이 이끄는 성기사 부대가 열세였거든.”
라이오넬이 말하자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장남이었지만 누가 자신을 쳐다본다는 것은 알았다. 오히려 장님이기에 시선 같은 것에 더 민감했다. 비다르가 순무를 한 입 베어먹으며 말했다.
“지금은 또 왜 정신 멀쩡하냐? 낯설다, 너.”
“······헛소리하지 말게, 비다르. 난 늘 정신이 멀쩡했네!”
“어제 저녁에 뭐 먹었는데?”
“샌드위치?”
“빵이랑 스튜였어, 이 노망난 영감아.”
“······거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너무 괄시하지 말게.”
“말 똑바로 해. 너만 늙은 거야.”
그 말이 맞았다. 엔디미온은 성배 덕분에 당연히 늙지 않았고 비다르는 다른 영웅들보다 더 많은 성배의 힘을 받았기에 나이를 먹지 않았다. 라우렌시오 역시 마법의 힘으로 청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변절자인 바이올렛까지도 젊은 모습이었다. 결국 늙은 것은 비다르의 말대로 라이오넬 하나뿐이었다.
나이 이야기에 빈정이 상한 라이오넬이 입을 꾹 다물자 라우렌시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잉굴라트와 직접 싸운 적은 없지만 칼라딘에게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어. 다른 악마들과 다르게 사술을 주로 쓴다고 하던데 특기는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하더군. 물론 악마들이 시체를 되살려서 병사로 쓰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야. 하지만 잉굴라트는 그 규모가 달라. 보통의 악마들은 기껏해야 몇 십 명 정도 되살리는 수준이지만 잉굴라트는 한 번에 몇 백, 몇 천 명을 되살린다더군. 그래서 별명이 사령술사였어.”
엔디미온도 들은 적이 있었다. 사령술사 잉굴라트.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병력을 쏟아부으면 부을수록 전황이 불리해진다는 성가신 악마. 동부 지역에서 엄청난 대군을 부리며 수많은 도시들을 함락시켰지만 결국 칼라딘이 이끄는 결사대에 막혀서 부하들의 대부분을 잃고 도망쳤다는 바로 그 악마였다.
잉굴라트라는 이름과 영혼군주라는 별명을 들었을 때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더니 설마 백 년 전의 그 성가신 놈이었을 줄이야. 엔디미온은 이번 싸움은 아르말락 때보다 더 성가실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잉굴라트가 지하무덤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곳에 있는 악마와 악귀들의 시체를 되살려서 병사들로 써먹기 위해서일 거야. 아마 엄청나게 숫자가 많을 거고 아주 강력하겠지. 잉굴라트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이야. 여명교단에서 병력을 보내봤자 그 빌어먹을 놈의 병력을 증강시켜주는 꼴이 될 테니까. 이 싸움은 숫자가 적을수록 유리해.”
라우렌시오의 말이 맞았다. 토벌대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시체가 더 많이 늘어나니 잉굴라트에게 유리했다. 엔디미온 일행은 겨우 다섯 명이지만 그들만큼 이번 싸움에 적합한 자들은 없었다. 숫자는 적지만 가지고 있는 힘은 강력하니까.
“악마를 죽이는 것은 내 의무다. 그리고 너희의 의무이기도 하지. 진즉 했어야 하는 일이야.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의무를 다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고.”
“······감사는 개뿔이.”
비다르가 툴툴댔다. 목적지가 정해진 엔디미온 일행은 내일 아침에 트라바로 떠나기로 했다. 이번에도 긴 여행이 될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