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밀밭의 성배기사-117화 (117/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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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떠난다니 아쉽군.”

하늘이 우중충했다. 흘러가는 구름은 회색이었고 저 안에는 빗방울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을 것이다. 유유히 흘러가던 구름끼리 서로 부딪쳐 비를 쏟아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중요한 일을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날이었다. 그리고 긴 여행을 떠나기에도.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술 한 잔이라도 같이 해야 하는데 사후 처리 때문에 영 짬이 나지 않았소. 오늘 당장 떠날 줄 알았으면 어제 시간을 냈어야 했는데.”

성문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여전히 뻥 뚫려있었다. 거대한 성문을 하루아침 사이에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때문에 성기사들이 직접 문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들 중에는 집행관 라이먼도 있었다. 그는 떠나는 엔디미온을 보고서 영 아쉬워했다.

“한 번 만난 사람은 두 번도 만날 수 있는 법이오. 우리가 다시 만나길 빌겠소. 그때까지 몸 건강히 잘 있으시오.”

엔디미온은 뒤를 돌아서 감옥 쪽을 보며 웃었다.

“이제는 속 썩일 만한 자들이 없으니 기다림이 힘들지는 않으시겠소.”

라이먼도 웃었다.

“하하하, 그 말이 맞소. 그 벌레 같던 놈들이 대부분 죽었으니 속이 아주 시원하군. 하지만 이대로 아일락샤가 오랫동안 비어있지는 않을 거요. 세상에는 더 많은 악마숭배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니까 말이지. 이곳도 곧 다시 찰 것이오.”

엔디미온은 라이먼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겠소. 내 부덕의 소치요.”

영문 모를 사과만큼 당황스러운 것은 없다. 라이먼은 한 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삐딱하게 사선을 그린 눈썹들만 보아도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과의 이유를 묻기도 전에 엔디미온이 먼저 말했다.

“이야기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어야 하는 법이오. 이 이야기는 너무 길었소. 이제는 점을 찍어야 하지. 마지막 문장 끝에 딱 하나의 점만 찍으면 끝나는 일이오. 그런데 너무 길게 끌었소. 내 잘못이지. 사과해야 할 일이고.”

목소리는 엄숙했고 얼굴은 엄정했다.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바다와 같은 두 눈은 일견 염세적으로 보였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아래에 침몰하지 않는 의지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고결한 의지였다. 악을 물리치고 질서를 바로 세우며 전능자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동시에 호수의 여왕이 내린 의무를 기꺼이 수행하는 강철과 같은 의지였다.

그는 인간이었고 완벽하지 않았다. 때로는 실수를 했고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옳다고 생각한 일이 언제나 선한 결과를 내지는 않았다. 결과가 옳아도 과정이 옳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백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마음이 무너지려고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쓰러지지 않았다. 성배기사 엔디미온은 책임과 의무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일부 불신자들은 전능자의 존재를 의심했다. 신이 과연 선한 의지의 총체라면 어째서 대악마를 직접 처리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세상에 고통과 다툼이 있는가, 어째서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는가, 그들은 신학자들도 감히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했다.

엔디미온은 전능자가 실존한다는 증거를 대라는 불신자들의 요구에 언제나 같은 대답을 했다.

내 의지와 의무, 그리고 내 존재가 바로 그 증거다!

감히 반박하는 자는 없었다. 성배기사는 천상의 전능자를 대신해 가시밭길을 걷는 고행자였다. 그의 뜻을 대신하는 대행자였으며 악을 물리치는 칼날의 첨단이자 질서를 바로 세우는 집정관이었다.

“······어째서 사과하는 거요? 이 세상에 악마숭배자들이 창궐한 것이 당신 탓은 아닐 것인데.”

엔디미온은 말 위에 올라탔다. 다른 사람들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얼른 말 위에 탑승했다. 다섯 명의 사람들은 마치 숭고한 의무를 다하러 가는 기사들처럼 보였다. 성기사가 아니라 옛 이야기에 나오는 바로 그 진짜 기사들.

다물린 입이 열리는 순간 마침 태양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혔다. 햇빛은 처음에는 작게, 그 다음에는 은은하게, 그리고 결국에는 쏟아지듯 환하게. 라이먼은 엔디미온과 그 일행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햇빛이 눈을 가려서. 아니다. 그들의 선한 의지가 너무 눈이 부셔서.

“내 의무니까.”

후광이 비추는 듯 했다. 사실은 그게 아님을 알면서도 라이먼은 경외심을 느꼈다. 이 금발의 청년이 비범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감히 길을 막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얼른 길을 비켜서자 엔디미온의 말이 바닥을 때리며 움직였다.

“세상의 악을 몰아내는 것이 내 의무니까.”

마지막 말은 메아리처럼 남았다. 말들이 요란하게 말발굽 소리를 내며 떠났어도 라이먼의 귀에는 그 한 마디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는 점차 멀어져 가는 엔디미온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성배기사가 돌아왔다는 말······. 진짜일지도 모르겠군······.”

성기사들은 입을 다물고 엔디미온 일행의 뒷모습을 보았다. 말을 타고 달리는 그들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행해야 할 의무는 무거웠고 가야 할 길은 멀었다.

“라우렌시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북동쪽이야.”

라우렌시오와 나란히 말을 타고 달리던 엔디미온이 고삐를 당겨 말의 머리를 돌렸다. 뒤를 따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방향을 돌렸다. 라이오넬의 말은 영특하게도 다른 말들이 방향을 트는 것을 보고 주인의 명령 없이도 바로 머리를 돌렸다. 덕분에 장님인 라이오넬도 뒤쳐지지 않고 일행을 따라갈 수 있었다.

“점차 호수의 여왕이 있는 곳과는 멀어지는군.”

처음의 목적은 호수의 여왕에게 성배를 돌려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러 일들이 생기는 바람에 점차 본래의 방향과 멀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때 영웅이었으나 지금은 변절자가 된 바이올렛을 벌할 수 있는 것은 그들뿐이었다. 반드시 그들이 해야 했다.

“흠, 어머님을 뵙지 못한 것이 벌써 백 년이 넘었군. 물론 성검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지만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에투알의 목소리를 들으며 엔디미온이 말했다.

“올해 안에 돌아갈 수 있을 거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다 끝날 거야.”

“그건 좀 씁쓸하군.”

“씁쓸해?”

엔디미온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성검이 작게 흔들렸다. 말에 타고 있어서 흔들린 게 아니었다. 에투알이 성검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곧잘 그랬다. 웃음이 날 때면 몸을 한 번 흔드는 것. 화를 낼 때도 하기도 했지만 이건 웃음이었다.

지금은 성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녀가 웃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백 년 전에 자주 봤으니까.

“모두 끝난다는 것은 우리의 인연도 끝이 난다는 뜻이 아니오. 나는 내 어머님께 돌아갈 것이고 당신은 자유롭게 되어 남들처럼 살아가게 되겠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미래였다. 엔디미온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재였고 미래가 아니었다. 남들처럼 살아간다니. 식사 후에 남들과 수다를 떨고, 볕이 잘 드는 곳에서 낮잠을 자고, 늦은 밤에 다 같이 어울려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 말인가? 입 안이 까끌했다. 몹시도 낯선 일이라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침이 말랐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아무 말이나 했다.

“이제 곧 겨울이군.”

“맞소. 몹시 춥고 괴롭겠지. 하지만 싸늘한 추위를 인내한 자에게는 봄이 올 거요. 반드시 말이오. 겨울이 너무 길었어도 봄은 찾아오는 법이오.”

이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엔디미온은 입을 다물었고 에투알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모두가 조용히 말을 타고 달렸다. 라우렌시오가 가끔씩 방향을 지시했다. 그들은 그 지시에 따라서 말의 고삐를 당기고 박차를 가했다.

여행은 새로운 곳을 향한 미지의 여정이지만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베로니카는 그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이제 노련한 여행자의 태가 나기 시작한 그녀는 오늘도 허리가 배기지 않고 자는 방법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저번에는 낙엽을 모아서 그 위에서 잤는데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움직일 때마다 자꾸 바스락거리고 바람이라도 불면 입 안으로 낙엽 부스러기가 들어와서 수면을 방해할 뿐이었다.

아일락샤에서 출발한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베로니카는 오늘도 새로운 수면 방법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모닥불 근처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났다. 그녀가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모두가 발자국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숫자가 제법 많았고 발자국 소리가 규칙적인 것이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것이었다. 거리는 좀 떨어져 있었지만 밤이라 주변이 조용한 탓에 집중을 하면 그런대로 잘 들렸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긴장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베로니카조차 마찬가지였다.

발자국 소리로 보건데 지금 돌아다니는 것은 사람들이었고 악마나 악귀가 아니었다. 베로니카는 영웅들과 함께 다니면서 사람 따위는 겁내지 않게 되었다. 그 거대한 덩치의 아르말락과도 싸웠는데 사람들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여행자들일까요?”

엔디미온은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여행자라고 하기에는 발자국 소리가 무겁군. 그리고 발자국 소리가 규칙적인 것으로 봐서 여행자들은 아니야. 병사들이거나 용병들이겠지. 이 밤중에 이동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군. 이 근처에 도시가 하나도 없는데.”

베로니카가도 고개를 떨구고 모닥불을 쳐다보았다. 저들이 불빛을 보고 이쪽으로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사들이든 용병들이든 남들이 보지 않을 때는 산적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발자국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리다. 베로니카는 약간 걱정이 되었다. 자신들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이쪽으로 오는 자들에 대한 걱정 말이다.

겁도 없이 헛짓거리를 하다가 영웅들에게 얻어터질 게 분명하니까.

“어?”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베로니카가 소리를 낸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검을 뽑는 소리, 그리고 무어라 외치는 소리, 쿵쿵 하는 커다란 발자국 소리, 함성, 비명, 싸우는 소리.

“싸우고 있는데요?”

“나도 알아. 근처에 악마나 악귀들이 숨어있었던 모양이야.”

싸우는 소리가 커졌다. 엔디미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마와 악귀들을 죽이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엔디미온이 일어나자 비다르도 따라서 일어났다.

“몸도 찌뿌듯한데 잠깐 운동 좀 할까.”

그들이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쪽으로 가려는 순간 무언가 날아와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그것은 갑옷을 입고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날렵하게 다시 일어났다가 엔디미온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달빛 아래에서 형형하게 눈을 빛내고 있는 엔디미온과 비다르를 보고서 입을 열었다.

“뭐야, 이 덩치들은? 산적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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