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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불온한 의사가 없는 자신의 모습이 남들에게 선한 양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가 독심술사가 아니란 사실을 간과한 탓에 벌어지는 일이다. 세상 사람들의 가장 큰 오류는 낯선 이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선량한 여행자일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으면서 남들에게는 당연히 자신이 선량하게 보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객관화의 부족이며 이중적 잣대의 오류다. 사람의 두 눈은 남을 볼 수는 있어도 남의 마음은 볼 수 없는 동시에 자기 마음은 볼 수 있어도 자기 모습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다르가 바로 그랬다. 그는 이 낯선 남자의 모습을 보자마자 산적이 아닐까 의심한 주제에 자신이 산적으로 의심을 받자 벌컥 화를 내는 것이다.
“뭐? 산적? 네 얼굴에 달린 건 개눈깔이냐? 우리가 어딜 봐서 산적이야, 인마!”
하지만 남자가 보기에 엔디미온 일행은 산적과 비슷했다. 산적은 아니더라도 어딘가 위압적인 구석이 있는 왈짜들인 것이다. 덩치가 큰 엔디미온과 비다르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욱 강했다. 어두운 배경과 모닥불이 일렁이면서 얼굴에 만들어내는 음영이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잔뜩 화가 나서 짜증을 내는 비다르와 그 뒤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는 엔디미온의 모습에서는 거친 남자의 냄새가 났다.
남자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여자 요정, 남자 요정, 인간 노인 하나. 아하. 그는 납득했다.
“아, 산적들이 아니었군. 인신매매범이었어.”
“얼씨구, 환장하겠네.”
“불의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지. 전능자를 대신하여 너희들을 벌하겠······. 아, 제길. 지금은 좀 곤란한데.”
남자가 방금 자신이 날아왔던 방향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으니 거기에 가세해야 했다. 하지만 그대로 돌아가면 엔디미온 일행이 도망칠까 걱정하는 것이다.
“가서 일보시오.”
남자가 엔디미온 쪽을 보았다. 그는 어느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뭇가지를 부러트려 모닥불 안에 집어넣고서 두 손을 깍지 낀 채로 무릎 위에 올렸다. 그는 모닥불의 온기를 즐기는 것처럼 시선을 가만히 고정하고 있었다. 이제 날이 찼다.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낼 때마다 약하게 입김이 났다.
“가서 일보고 오라고.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보아하니 성기사인 것 같은데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잖소. 우리는 도망가지 않으니 가서 일보시오. 기다리겠소.”
덤덤한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무게감이 있어서 남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사실에 눈알을 한 번 굴렸다가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짓은 없으리라 믿겠다. 금방 끝내고 돌아오지.”
“알겠소.”
남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엔디미온은 수통의 물을 한 모금 마신 후에 다시 모닥불로 시선을 고정했다. 남자와 주먹다툼이라도 할 것 같았던 비다르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에이 씨, 기분만 잡쳤네. 이 얼굴이 어디를 봐서 산적이야, 산적이? 그리고 인신매매범은 또 왜 나와?”
비다르는 혀를 차며 바닥에 앉았다. 그들은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서 싸움소리를 듣고 있었다. 기이한 비명과 기합 소리, 피 튀기는 소리, 가죽을 가르고 뼈를 부수는 소리. 밤이라서 그런지 더욱 생생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베로니카가 말했다.
“그런데 도와주러 가려던 거 아니었어요? 저쪽에서 괜한 오해를 한 게 괘씸해서 다시 앉으신 건가요?”
엔디미온이 베로니카를 보며 픽 웃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보아하니 싸움이 금방 끝날 것 같아서 앉은 것뿐이야.”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한바탕 싸우는 소리가 나더니 금세 조용해졌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났다. 베로니카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아까 남자가 사라졌던 방향을 보았다. 발자국 소리는 나는데 불빛은 없었다. 저쪽은 빛이 없어도 이 어둠 속을 움직이는데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분명 병사들이나 용병들 같은 어중이들은 아니리라. 철컥철컥 하는 소리는 갑옷의 각 부분끼리 부딪치는 소리였다. 열댓 명의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그들 모두는 갑옷을 입고 있었고 등 뒤로 망토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갑옷은 모두 검은색이었고 가슴에는 흰색으로 육각성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의 작은 움직임에도 절도가 있었고 얼굴은 웃음기 하나 없이 근엄했다. 온통 검은색뿐인 행색과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 그리고 무기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 때문에 그들은 일견 무정한 사형집행인처럼 보였다. 아니면 장의사거나.
그들 중에는 아까 보았던 그 남자도 있었다. 그는 무리의 중앙에 있는 남자에게 무어라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가 검을 들어올렸다.
다짜고짜 공격하는 걸까? 베로니카가 긴장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남자는 그대로 검을 검집에 꽂았을 뿐이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정중한 말투였다. 남자는 턱 아래까지 오는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거렸다. 엔디미온은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두 눈은 모두 감은 듯 작았는데 정말 감겨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곱상한 얼굴과 다르게 길게 그어진 흉터는 상당히 야성적이었다.
“하지만 당신들이 내 부하가 말한 것처럼 인신매매범인 것 같지는 않군요.”
엔디미온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근거로 단정하시오?”
“성기사를 보고 도망치지 않는 간 큰 악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있을 수도 있지. 우리처럼 말이오.”
“아니요, 없습니다.”
말씨가 단호했다. 엔디미온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어떤 간악한 자도 우리를 보고 도망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입은 웃고 있었으나 하는 말은 우습지 않았다. 서늘한 시선도 그랬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림자처럼 일하고 태양을 보며 살지요. 우리가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흉터가 그어지지 않은 오른쪽 눈을 살짝 들어 올리자 감색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것은 뱀의 독니처럼 빛났고 여차하며 목을 물어버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엔디미온은 깍지 낀 두 손으로 턱을 받쳤다. 그리고 마주 빙긋 웃었다.
“애석하게도 모르겠는걸.”
“그럴 것 같았습니다.”
서늘한 감색의 눈동자가 다시 눈꺼풀 아래로 숨었다. 곱게 휘어지는 눈웃음을 지으며 남자는 다시 그 정중한 말씨로 말했다.
“세상에는 남들이 하기 꺼려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힘들고 더럽고 또 위험한 일들 말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지요. 아무도 하지 않으면 세상의 질서가 어그러지니까요. 우리는 바로 그런 일을 합니다. 악마를 죽이는 것 말입니다. 아주 힘들고 더러우며 위험하지요.”
엔디미온은 슬쩍 남자 뒤에 있는 성기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인형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모닥불에 이끌려 여기까지 날아온 날벌레들이 성가실 법도 한데 손으로 쳐내는 일 없이 그저 정면만 보고 있었다. 그들이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냉기가 길러낸 설산의 전사들처럼 가만히 자세를 지키고 있는 모습은 감탄할 만 했다.
그럼 그런 성기사들을 이끄는 이 남자는 과연 어떤 자일까.
“하지만 악마를 죽이는 것은 모든 성기사들이 다 하는 일이잖소. 분명 힘들고 더러우며 또한 위험한 일이란 사실에는 나도 동의하는 바요. 하지만 무게를 잡으면서 그게 특별한 일이라는 것처럼 말할 만한 일은 아니지 않소.”
“물론 모든 성기사들은 악마를 죽입니다. 그게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모든 성기사들은 성배기사의 의지를 잇는 자들입니다. 마땅한 의무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우리는 오직 다르디낭의 적자들만을 추적해 죽입니다. 그게 우리의 존재의의이자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엔디미온이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내렸다. 허리를 세우고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가 한 말은 가볍게 흘려 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안녕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 무엇일까요. 당연한 저 사악한 존재들일 겁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은 바로 아직까지 살아있는 다르디낭의 적자들입니다. 그들은 강력한 힘을 가졌고 아주 교활하지요. 그들의 아버지가 영웅들의 손에 죽은 이후로 어둠 속에 숨어서 세상을 다시 한 번 혼란에 빠트릴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남자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세상에 악마와 악귀들이 얼마나 있든 그것은 아무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그깟 놈들이 수백이든, 수천이든, 아니면 수만이든 아무 상관없어요. 여명교단의 추기경들은, 현실을 보지 못하고 의자 위에서 잔소리나 해대는 그 고루한 작자들 말입니다, 절 보고 허튼 소리를 한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게 맞는 말인데 어쩌겠습니까? 사람은 무한한 끈기와 인내를 가졌으니 아주 긴 시간을 들여서라도 세상 모든 악마와 악귀들을 처단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고 이어지는 말은 단호했다.
“다르디낭의 적자는 아닙니다. 그들을 상대할 때 우리가 들어야 할 무기는 끈기와 인내가 아니라 칼처럼 날카로운 과감한 결단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끈기하고 인내할 때 그들이 먼저 어둠을 떨치고 일어나 우리를 집어삼킬 것이니까요. 잡아먹히기 전에 죽여야지요. 그래서 우리가 있는 겁니다. 그게 우리 의무니까.”
설명은 충분히 들었고 이들이 무슨 일을 하는 자들인지 역시 명확히 알게 되었다. 일개 기사수도회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범상치 않은 자들이었다. 엔디미온은 점차 열기를 잃어가는 모닥불 안에 나뭇가지를 부러트려 던졌다. 짐승이 먹잇감을 삼키는 것처럼 확 솟아오른 불꽃이 나뭇가지를 휘감았다. 연신 탁탁 불티 튀는 소리가 났다.
엔디미온은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면서 남자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누구요, 당신들?”
남자는 뜸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우리는 교황 성하의 여섯 별 중 하나인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입니다. 우리는 성하의 뜻을 겸허히 받들며 더 나아가 전능자의 뜻을 널리 알리고 세상의 안녕을 위해 일합니다. 그리고 저는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를 이끌고 있는 비아네라고 합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성하의 여섯 기사 중 하나이지요.”
밤중에 갑작스럽게 만난 것치고는 대단한 거물이었다. 오직 여섯 명뿐이라는 교황의 기사 중 하나가 이곳에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베로니카는 헉 하고 숨을 삼켰고 라우렌시오도 비아네를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그가 백 년 전의 영웅들만큼 대단하지는 않기에 비다르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엔디미온은 이제 고개를 들어 비아네를 보며 물었다.
“기사수도회의 이름이 특이하군. 다섯 뼘 궤라. 무슨 뜻이오?”
“우리는 전능자의 종이고 성실한 일꾼이니 죽어서 묻힐 자리는 다섯 뼘 궤가 들어갈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 세상은 산 자의 것이니 어찌 죽은 자가 쓸데없이 땅을 많이 차지하겠습니까?”
다섯 뼘짜리 궤라면 허리가 많이 쑤시겠는걸. 엔디미온은 무심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