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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19화 (119/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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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힘들군.”

목소리를 낸 것은 라우렌시오였다. 그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도전적인 자세였다. 웃음 많은 청년의 얼굴은 각도가 약간 변하는 것만으로 불만이 많은 불량아처럼 바뀌었다.

“무엇이 믿기 힘듭니까?”

비아네는 도전적인 시선에 발끈하지 않았다. 그저 침착하게 목소리를 내고 쏟아지는 시선을 덤덤히 받아냈을 뿐이다.

“무엇이 믿기 힘드냐고? 겨우 열댓 명의 성기사들로 다르디낭의 적자를 상대한다는 것이 믿기 힘들다고. 이봐, 그들은 아주 강력한 악마야. 네 말대로 이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바로 그들이지. 그런데 너희들만으로 그 악마들을 죽여?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다르디낭의 적자들은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뷔브르를 죽이기 위해서 삼백 명 규모의 토벌대가 꾸려졌으나 그것도 엔디미온이 없었다면 그대로 전멸할 뻔 했다. 또한 악마 아르말락은 난쟁이 대전사 칼라딘을 죽였다. 물론 혼자서 칼라딘을 죽인 것이 아니라 부하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래에 거느리고 있는 세력까지가 악마의 힘이었다.

백 년 전에 비해 실력이 퇴보한 지금의 성기사들이 다르디낭의 적자들을 토벌하려면 거대한 토벌대가 꾸려져야 했다. 결코 열댓 명을 가지고는 할 수 없다.

라우렌시오는 비아네를 보았다. 갑옷으로 가려져 있지만 그 아래의 몸은 강철처럼 잘 단련됐을 것이다. 또한 눈을 하나 앗아간 상처와 여유로운 태도를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사선을 넘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검을 쥐는 자세나 검집에 검을 꽂는 모습만 보아도 검술의 경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남자는 강하다. 라우렌시오는 인정할 것은 인정했다. 비록 비아네가 영웅들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영웅 다음 가는 성기사였던 자들과 실력이 비슷했다. 그는 그레고리 아델리온이나 멜리아나에 비견할 만한 강자였다. 지금 시대에 그들과 같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감히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혼자서 수백 마리의 악귀들을 상대하고 서너 마리의 악마들을 죽이는 것을 능히 해내리라. 비아네는 지금 시대의 영웅이었다. 어둠을 몰아내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찬란한 영웅. 바로 라우렌시오가 백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딱 그 정도다. 딱 그 정도의 실력이기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레고리와 멜리아나가 다르디낭의 적자들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비아네도 불가능했다. 만약 그에게 수백 명의 부하가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겨우 열댓 명의 부하들이 있을 뿐이었다.

“오해가 있었군요.”

비아네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희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의 임무는 다르디낭의 적자들을 찾아내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희만의 임무는 아닙니다. 이것은 성하의 여섯 별들이 공유하는 임무입니다. 함께 싸우고 함께 영광을 나누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 말고도 다섯 개의 기사수도회가 함께 싸운다는 뜻입니다. 일단 다르디낭의 적자가 있는 곳을 찾아내면 말이지요.”

그럼 또 이야기가 달랐다.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들 수준의 기사수도회가 다섯이나 더 모인다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라우렌시오가 삐딱하게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하자 비아네가 웃으며 말했다.

“자기 입으로 말하면 자화자찬이 되겠습니다만 우리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의 성기사들은 모두 특등기사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하의 명을 받드는 다른 다섯 기사수도회도 마찬가지고요. 이만하면 걱정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소가 되었을까요?”

라우렌시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엔디미온이 말했다.

“다르디낭의 적자들을 처리하는 것이 당신들의 일이라면서 뷔브르 토벌 때는 왜 참가하지 않은 거요?”

“아, 그때의 우리는 다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공했소?”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요. 성공했으니까 지금 여러분들과 이야기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새끼, 당당해서 마음에 드네. 엔디미온은 웃었다.

“한 가지 물어봅시다.”

“또요? 궁금증이 많으신 분들이군요.”

엔디미온은 가까이 와서 불 좀 쬐라는 듯 손짓을 했다. 비아네는 가로로 고개를 저었다.

“말씀하시지요.”

“언제까지 질질 끌 거요?”

엔디미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생겨났다. 그것은 모닥불이 일렁일 때마다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었다. 단지 일어났을 뿐인데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성기사들이 움찔했다. 지금까지 인형처럼 가만히 있던 그들이 엔디미온의 묵직한 존재감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우리가 선량한 여행자들이란 것은 척 보고 알았잖소. 그런데 구구절절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이유가 뭐요. 만약 우리가 의심스러워서 잡아가려고 했다면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공격했으면 됐을 거요.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지. 내가 할 말은 하나뿐이오. 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하고 없으면 돌아가시오.”

비아네는 입을 다물었다가 한 박자 느리게 목소리를 냈다.

“그래요, 맞습니다. 당신들이 인신매매범이나 산적, 아니면 할 일 없는 왈짜들이 아니란 것은 척 보고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기소개를 길게 했던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당신들이 알아야 했고 허튼 짓을 하지 못하게 경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허튼 짓이라면 어떤 것 말이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트라바가 나옵니다. 아주 오래된 도시지요. 아무것도 살지 않고 짐승들조차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그 주변은 온통 황무지고 다른 도시는 없지요. 그럼 당신들은 왜 여기에 있을까요. 길을 잘못 들어서? 아닙니다. 그럼 옛 도시에서 유물이라도 캐내려고? 그럴 리가요. 당신들은 그런 이유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목소리는 단호했다.

“잉굴라트에게 덤빌 생각이라면 그만 두세요. 충고하는 게 아닙니다. 경고지요. 당신들 목숨에 대한 경고. 우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더 나아간다면 당신들은 죽을 겁니다. 우리 손에 죽거나 아니면 잉굴라트 손에 죽거나.”

“성기사가 할 만한 협박은 아닌데.”

엔디미온은 비아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주먹 하나 떨어진 거리에서 보는 엔디미온은 훨씬 더 크게 보였다. 그의 큰 키와 커다란 덩치 자체가 하나의 위협이었다.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의 성기사들이 긴장하며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비아네가 손을 들어서 그들을 다시 인형처럼 얌전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엔디미온은 불미스러운 무력 충돌 없이 신사적으로 말을 할 수 있었다. 만약 성기사들이 겁도 없이 덤볐다면 그들은 엔디미온의 입이 아니라 주먹과 대화하게 됐을 것이다.

“보아하니 당신들도 트라바의 지하무덤에 잉굴라트가 숨어있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오. 아마 당신들이 제일 먼저 도착했을 것이고 며칠 내로 다른 기사수도회가 모여들겠지.”

“그 말이 맞습니다. 늦어도 닷새 안에 잉굴라트의 토벌이 시작될 겁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임무는 당신 같은 자살희망자들이 겁도 없이 지하무덤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지요.”

“자살희망자?”

“네, 자살희망자요. 자기 생명을 버리려고 하는 자가 자살희망자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잘 들으세요. 당신들이 무엇 때문에 잉굴라트를 만나려는지 몰라도 그는 그냥 악마가 아닙니다. 영혼군주라 불리며 수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는 동시에 사술을 부려 영혼을 농락하는······.”

“사령술사잖소. 백 년 전에 대전사 칼라딘과 두 번 싸워서 살아남은 사령술사 잉굴라트. 나도 그가 어떤 악마인지 잘 알고 있소. 당신보다 더. 내게 더는 왈가불가하지 마시오. 이제 돌아가시오. 당신들은 당신들의 일을 하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합시다. 가시오. 밤이 늦었소.”

비아네가 허 하고 소리를 냈다. 지금까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그가 정말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다.

“제정신입니까? 그래서 잉굴라트를 만나러 가겠다고요? 대체 목적이 뭡니까? 가서 하수인으로 받아달라고 빌기라도 하게요?”

“죽일 거요.”

“뭐라고요?”

“죽일 거라고. 가서 목을 자르고 사지를 뽑고 배를 갈라서 그 창자로 나무 위에 머리를 매달아 둘 거요. 살점은 잘라서 들개들의 먹이로 줄 것이고 뼈는 부러트려 사방에 뿌릴 것이오. 이만하면 됐소? 내 대답에 만족하셨소?”

그 말이 농담 같지 않아서 비아네는 입을 다물었다. 엔디미온의 고요한 두 눈에는 소리 없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오늘 처음 보는 사이지만 이상하게 그 눈이 익숙해서 기이함을 느꼈다. 비아네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는 엔디미온을 향해 말했다.

“겨우 다섯 명이서요?”

엔디미온은 제자리에 멈추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말했다.

“잉굴라트에 대해서 잘 모르시오? 그를 상대할 때 숫자가 많은 것은 오히려 해가 되는 법이오.”

비아네도 잉굴라트의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가 어째서 영혼군주 혹은 사령술사라고 불리는지도. 어중이떠중이들이 많이 몰려가봤자 잉굴라트의 세력을 강화시켜주는 꼴이 될 뿐이었다. 그래도 다섯 명은 너무 적었다.

비아네가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의 성기사들 중에서 열댓 명만 추려서 온 것은 잉굴라트의 세력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싸움을 하기 위해서는 이만큼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다른 다섯 기사들 역시 열댓 명씩 데리고 올 테니 다 합치면 백 명 가까이 되었다. 잉굴라트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 정도 숫자가 딱 알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섯 명은 역시나 너무 적었다.

“다섯 명은 너무 적습니다. 아니, 애초에 싸움이 성립되지가 않아요. 그 누구도 벼랑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용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만용이지요.”

“다섯 명이면 충분하오. 아니, 오히려 너무 많지.”

그 말에 가만히 있던 비다르가 킬킬 웃었다. 그는 손가락을 순서대로 까딱거리면서 철컥철컥 소리를 냈다. 성기사들은 강철로 만들어진 비다르의 손을 보고서 몸을 흠칫했다. 그만큼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래, 다섯 명은 너무 많지. 셋? 아니, 셋도 많다. 둘이면 충분하지.”

그러자 이번에는 라우렌시오가 말했다.

“비다르, 허세 부리지 마라. 그래도 셋은 있어야 해. 잉굴라트 담당 한 명, 악마들 담당 한 명, 악귀들 담당 한 명. 셋이 딱이야.”

“아, 그런가? 듣고 보니 셋이 딱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좀 빡세게 하면 둘이서도 되지 않을까?”

“백 년 전이면 됐을 것 같은데 지금은 안 될 걸.”

“하긴 우리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

비아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이제 이들을 설득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겨우 다섯이라서 다행이었다. 더 많았다면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가 상대해야 할 적들이 그만큼 더 늘어났을 것이다.

“비아네.”

엔디미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가려고 하는 비아네를 불러세웠다. 그가 왜 부르냐는 얼굴로 쳐다보자 웃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엔디미온이오.”

“······성배기사의 이름이군요.”

“내일 지하무덤에서 봅시다. 늦지 않게 오시오. 아침 꼭 챙겨 먹고.”

“뭐요?”

엔디미온은 무심하게 말했다.

“따라올 거잖소. 그럼 내일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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