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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20화 (12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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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내일 어디서 보자고 말하는 듯한 여상한 태도에 비아네는 말문이 막혔다. 따라올 거라고? 내가? 무슨 근거로? 엔디미온은 그의 얼굴에서 드러난 의문을 알아차렸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은 채로 배 위에 깍지 낀 두 손을 올린 모습은 너무나 여유로웠다.

“당신은 굳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우리에게 경고했소. 그것은 일종의 상냥함이지. 우리가 허무하게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을 걱정해주는 상냥함. 당신은 우리가 지하무덤으로 가는 것을 그냥 지켜볼 리가 없소. 따라오겠지.”

비아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허 하고 소리를 냈다. 엔디미온의 저 당당한 태도가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를 호위로 써먹겠다는 겁니까? 당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내 호의를 이용하겠다는 건가요?”

“착각하는 모양인데.”

엔디미온은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의 호의를 이용하는 게 아니오. 당신에게 내 호의를 이용할 기회를 주는 거지.”

“그건 또 무슨 헛소리입니까?”

“당신의 목적이 뭐요? 잉굴라트를 죽이는 거잖소. 내가 내일 대신 죽여주겠다는 뜻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 하십시오!”

비아네가 고함을 치자 주변의 나무들이 흔들렸다. 나무 위에 숨어있던 새들이 깜짝 놀라서 일시에 날아올랐다. 날갯짓 소리와 새 울음소리가 연달아 나다가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 소리에 말들이 놀라서 허둥거렸지만 엔디미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봅시다.”

비아네는 더 듣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려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른 성기사들도 그 뒤를 따라서 움직였다.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가 사라지자 적막이 내렸다. 엔디미온은 좀 더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며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다리를 꼬고 발끝을 까딱거리는 것이 더 없이 여유로웠다.

베로니카는 슬금슬금 엔디미온 쪽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혹시나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가 들을까 겁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들이 진짜 내일 올까요?”

“글쎄, 나야 모르지.”

엔디미온은 그 말만 하고서 눈을 감았다. 베로니카는 말을 더 붙이려다가 그만 두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라이오넬은 소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 전부터 이미 자고 있었고 비다르와 라우렌시오는 시시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모닥불의 온기를 잘 느낄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몸을 뉘였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했다. 그녀는 모닥불 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꿈도 없는 잠을 잤다. 꿈을 꾸기에는 현실이 너무 고단했다. 베로니카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졸린 눈을 비볐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비다르와 라우렌시오는 그녀보다 더 늦게 잠에 들었음에도 벌써 기상해 있었다. 어쩌면 잠을 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엔디미온은 어디서 잡은 것인지 토끼 한 마리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일어나서 사냥이라도 다녀온 모양이었다.

베로니카는 느릿하게 고개를 움직여 라이오넬을 보았다. 그는 아직 자고 있었다. 이제 아침을 먹고 출발해야 할 때라서 몸을 흔들어 깨웠다.

“영감님,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아침!”

“으으음?”

라이오넬이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깜깜한 거 보니까 아침이 아니고 밤인데?”

“······영감님은 장님이잖아요.”

“내가?”

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아서 베로니카는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는 괜히 말을 걸어봤자 자기만 답답해질 뿐이었다. 그동안 라이오넬과 함께 다니면서 터득한 지혜였다.

“잡을 거면 다섯 마리는 잡아와야지 한 마리가 뭐냐?”

토끼 고기가 불 위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기름이 모닥불 위로 뚝뚝 떨어져서 매캐한 연기가 났다. 그을음이 약간 생긴 토끼 고기를 보며 비다르가 입맛을 다셨다. 엔디미온이 부지깽이로 모닥불을 쑤시며 말했다.

“고기 한 점이라도 얻어먹으려면 투덜거리지 말고 좀 닥쳐.”

“크흠.”

토끼 구이는 양이 많지 않았다. 다섯 사람이 조금씩 살점을 덜어갔을 뿐인데 금세 뼈만 앙상하게 남고 말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먹는 고기의 맛은 괜찮았다. 빵에 치즈와 토끼 고기를 곁들여 먹으니 그런대로 맛났다.

식사를 끝낸 엔디미온 일행은 자리를 정리하고 바로 말 위에 올라탔다. 곧장 트라바로 갈 생각이었다. 선두에 선 라우렌시오가 기합과 함께 말의 배를 차자 모두가 그 뒤를 따랐다. 바람이 싸늘했다.

주변 풍경은 점진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녹색이었다가 그 다음은 황색이 조금 보였다. 점차 황색의 비율이 늘어났다. 나무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대신에 바위와 모래가 늘어나는 것이다.

트라바 주변은 황무지였다. 온통 무채색의 바위와 밟으면 힘없이 바스라지는 모래뿐인 장소에 생기라고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스산함을 느끼기에 충분한데 더욱 을씨년스러운 것은 황무지 위에 우뚝 서 있는 성벽이었다. 황량한 모래밭 위에 홀로 존재하는 성벽은 한때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인 동시에 몰락과 멸망의 위험에 대한 경고였다.

엔디미온은 모래바람이 부는 황무지 위에서 트라바의 성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백 년 전의 모습은 켜켜이 축적된 기억의 홍수 속에서 흐릿한 감상으로 남아있었다. 기억을 더듬을 이유는 없었다. 그는 본래 성문이 있어야 할 곳을 지나갔다.

성내로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모래바람이 휘감고 지나가는 수많은 건물들의 잔해였다. 어떤 것은 그런대로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떤 것은 잔해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생동감이 없었다.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기이한 감상이었다. 만지면 바싹 마른 종이가 그러하듯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며 잘게 조각날 것 같았다.

베로니카는 모래바람이 휘감고 지나가는 수많은 건물들을 보고서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멸망한 도시의 모습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박력이 있었다. 만약 저 건물들이 모래성처럼 일시에 무너진다면 어떨까. 신기루처럼 사라진다면? 생각만으로도 오싹했다.

“지하무덤은 어디에 있지?”

엔디미온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자 라우렌시오가 곧장 대답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쪽이야.”

라우렌시오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백 년 전의 기억까지 완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몇 번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가 다시 나오기를 반복하며 겨우 지하무덤의 입구를 찾았다.

이제 태양이 머리 바로 위에 있었다. 말들을 데리고 갈 수는 없으니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적당한 곳에 줄을 매어두었다. 만약 악귀 따위가 나타나더라도 라우렌시오의 말이 있으니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군. 이 주변에 악귀 한둘쯤은 있을 법도 한데.”

라우렌시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트라바를 돌아다니면서 단 한 번의 습격도 받지 않았다. 악귀들은 어디서나 튀어나오는 법인데 코빼기도 내밀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 힐레가 잉굴라트가 있는 곳을 거짓으로 말한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비아네도 이곳에 악마가 있다고 말했으니 거짓 정보일 가능성은 낮았다.

“모두 지하에 숨어있는 거 아니냐?”

비다르의 말에 라우렌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지도 모르지. 일단 들어가 보자고.”

라우렌시오는 지하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 위해서 바닥을 더듬었다. 손으로 모래를 쓸어내자 돌바닥과 다른 재질로 만들어진 부분이 나타났다. 얼른 다른 곳의 모래도 치우자 그게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윤곽이 드러났다. 거대한 검은색 철문이었다. 아무나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동시에 바깥쪽으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문이었다.

문 위에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는데 누군가 일부러 지운 것처럼 흐렸다. 라우렌시오는 철문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봉인이 한 번 깨졌어. 누가 안으로 들어간 거야. 아마 잉굴라트겠지. 그런데 이거 열려면 고생 좀 하겠는데.”

라우렌시오가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닫혀 있었고 철문 자체의 무게가 상당했기에 여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비켜.”

엔디미온이 라우렌시오의 어깨를 밀었다. 어어 하면서 밀려난 라우렌시오는 엔디미온이 성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성검으로 철문을 힘껏 내리치는 것도.

굉음이 일었다. 철문과 검이 부딪쳤다고 생각할 수 없는 소리였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먼지구름이 일었고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야를 차단했다. 라우렌시오는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켜 먼지구름을 날려버렸다. 그는 한숨을 내뱉었다. 철문의 절반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들어가자고.”

엔디미온은 성검을 다시 검집에 꽂고 지하무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지하무덤 안은 몹시 당연하게도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베로니카와 라우렌시오가 마법으로 빛을 만들었다. 그러나 어둠은 아주 짙어서 몇 발자국 근처만 밝혀줄 뿐이었다.

엔디미온 일행은 천천히 전진했다. 아무리 라우렌시오라도 지하무덤 안의 지리까지는 몰랐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잉굴라트를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이봐요! 결국은 내 경고를 어기고 여기까지 왔군요!”

등 뒤에서 들린 고함소리.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엔디미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말했다.

“좀 늦었소, 비아네.”

“헛소리 그만하고 돌아갑시다! 만약 말을 듣지 않겠다면 힘으로라도 데려가겠습니다.”

화가 난 비아네가 부하들을 이끌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진심으로 무력행사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정면만을 보고 있었다. 화를 참으며 미간을 좁히던 비아네는 저 멀리 있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눈치 챘다.

“엔디미온! 위험······.”

소리치는 것보다 어둠 속의 습격자가 더 빨랐다. 갑자기 튀어나온 거대한 생물은 분명히 악마였다. 몸은 근육으로 가득했고 머리는 성난 늑대의 것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가까이 있는 엔디미온에게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

하지만 맞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빠르게 달려서 공격을 피한 뒤에 악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발차기 한 번에 다리뼈가 부러진 악마가 몸을 휘청거리자 반대쪽 다리도 뼈를 부러트렸다.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진 악마는 당연히 뒤로 넘어졌다. 엔디미온은 그 위에 올라타서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으로 악마의 얼굴을 한 번 때릴 때마다 묵직한 타격음이 났다. 주먹이 한 번 꽂힐 때마다 악마의 몸이 크게 들썩거렸고 두 손을 휘두르며 엔디미온을 떼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우직하게 얼굴을 때렸다. 다른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주먹을 날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악마의 발악은 점차 심해지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점차 잦아들었다. 어둠 속에서 엔디미온이 주먹을 날리는 소리만 났다. 그것은 철퇴를 휘두르는 소리와 같았다.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는 모두 침묵한 채로 엔디미온을 쳐다보았다. 사람이 무기도 없이 주먹만으로 악마를 때려눕힐 수 있을까? 그것도 저 정도로 무참하게? 그들은 천천히 악마의 몸 위에서 일어나는 엔디미온을 보았다. 그는 손에 묻은 피와 살점들을 털어내며 말했다.

“뭐? 할 말 있소?”

할 말은 많았다. 단지 아무도 입을 열 수가 없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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