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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없으면 빨리 갑시다. 빨리 끝내고 쉬어야지.”
엔디미온은 얼른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성기사들은 악마 하나를 순식간에 끝장내고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구는 모습에 당혹감을 느꼈다. 엔디미온의 일행들 역시 흔히 있는 일은 본 것처럼 전혀 놀라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악마가 숨어있는 지하무덤에서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시답잖은 잡담을 하는 모습은 현실감이 없었다.
성기사들은 그들의 대장인 비아네를 쳐다보았다. 멍하니 악마의 시체를 보고 있던 그는 부하들의 시선을 느끼고서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엔디미온, 당신이 강하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들만으로 잉굴라트를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자신의 강함을 과신하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비아네가 뒤를 따르며 주절거렸지만 엔디미온 일행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지하무덤의 더 안쪽으로 들어갔고 어쩔 수 없이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도 뒤를 따라갔다.
라우렌시오는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면서 돌로 만들어진 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본래 사악한 기운을 정화하기 위해 강력한 마법이 걸려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흔해빠진 돌일 뿐이었다. 시간이 너무 흘러서 효력을 잃었거나 누군가 강제로 마법을 없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봐요, 정말 안 돌아갈 겁니까? 엔디미온, 당신이 아무리 강해도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당신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친구들까지도 사지로 몰고 있는 겁니다.”
거 되게 말 많네. 엔디미온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못해도 스무 마리는 넘을 듯 했다. 엔디미온이 슬쩍 주먹을 쥐자 다른 사람들도 전투 준비를 했다.
그것은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제일 뒤쪽에 있었고 엔디미온과 비다르의 덩치에 가려 어둠 속에 숨은 것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무언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엔디미온은 만족했다. 잡일을 시키려면 저 정도 눈치는 있어야지.
“크아아아앙!”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무언가 어둠 속에서 뛰쳐나왔다. 늑대였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늑대는 아니었다. 머리가 셋이었고 덩치는 말만큼이나 컸으며 꼬리 끝부분에는 철구가 붙어있었다. 저 덩치로 저것을 휘두른다면 맞는 즉시 머리가 깨질 것이다.
숫자는 생각했던 것처럼 스무 마리 남짓. 엔디미온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악귀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저 두껍고 단단한 발톱은 강철도 끊어낼 것이다. 하지만 엔디미온은 도망치지 않았다. 도약한 악귀가 내뻗은 두 다리를 손으로 각각 하나씩 붙잡았다. 묵직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다리의 힘과 악귀의 무게가 합쳐지니 상당한 충격이 손목에 부딪쳤다. 그러나 엔디미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힘으로 발목을 부러트렸다. 악귀가 깽깽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그 커다란 몸을 바닥에 내던졌다.
뚜둑 소리가 난 것이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거대한 몸이 딱딱한 돌바닥에 그대로 처박힌 악귀의 척추가 부러졌다. 다른 뼈도 아니고 척추가 부러졌으니 아무리 악귀라도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낑낑 소리를 내면서 몸을 잘게 떠는 악귀의 얼굴에 주먹을 힘껏 때려 박은 것은 오히려 자비였다.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일격에 해방시켜주었으니까.
엔디미온은 절명한 악귀의 꼬리를 힘으로 잡아당겼다. 뚝뚝 소리가 나며 꼬리가 끊겼다. 시험 삼아 한 번 휘둘러보자 제법 괜찮은 철퇴가 되었다.
“크헝!”
좌우에서 도약하는 두 마리의 악귀들. 엔디미온은 자세를 낮추고 검을 뽑듯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악귀의 꼬리를 휘둘렀다. 깔끔하게 얼굴에 들어가는 정타였다. 악귀의 턱뼈가 뒤틀리고 부러진 이빨이 사방으로 튀었다. 오른쪽의 악귀는 순식간에 처리했다.
하지만 아직 왼쪽의 악귀가 남아있었다. 다시 악귀의 꼬리를 휘두르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기에 왼쪽 주먹을 휘둘러 악귀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 다음은 악귀의 꼬리를 휘둘러 정수리를 박살냈다. 악귀는 머리가 깨진 채로 바닥에서 낑낑 소리를 냈다. 다시 발을 들어 완전히 부쉈다.
엔디미온은 다음 적을 찾아서 두리번거렸지만 싸울 상대가 없었다. 그의 일행들이 남아있던 악귀들을 모두 정리해버린 것이다. 엔디미온은 손에 들고 있던 악귀의 꼬리를 바닥에 던졌다. 돌바닥과 부딪쳐 깡 소리가 났다.
몇 분 걸리지도 않고 악귀들이 모두 죽었다.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는 입을 다물고서 바닥에 쓰러진 악귀들을 보았다. 스무 마리의 악귀들을 죽이는 것 자체는 그들 역시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사악한 것들을 멸절하기 위해 존재하니까.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엔디미온 일행의 실력이었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자신들과 비등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악마사냥꾼들 중에도 강자는 많이 있지만 그런 자들은 대개 이름과 모습이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몰랐다. 이만큼 강한 자들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났단 말인가?
“신중함이 지나치면 겁쟁이가 되는 법이지.”
엔디미온은 쓰러진 악귀들 중 하나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분명히 숨이 끊어졌음에도 악귀의 한 쪽 눈이 기이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염탐의 사술이었다. 잉굴라트는 어디선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기다려라. 곧 찾아가마.”
엔디미온은 발로 악귀의 눈을 뭉갰다. 그리고 뒤를 돌아 비아네에게 말했다.
“갑시다.”
처음에는 무모한 짓을 하려는 엔디미온 일행을 막으려고 왔지만 이제는 엔디미온에게 이상한 끌림을 느꼈다. 비아네는 신실한 신앙심으로 무장한 전능자의 종이자 교황의 기사였다. 그런 그가 저런 무법자에게 끌림을 느낀다니? 불경한 일이었다.
비아네는 고개를 흔들었다. 잡념을 털어내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머리는 엔디미온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유가 있어야 했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이유가.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기사된 자로서 어찌 위험에 빠진 자를 모른 척 하랴. 그래, 그것이다.
“따라간다.”
비아네가 움직이자 다른 성기사들도 뒤를 따랐다. 그들은 엔디미온 일행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움직였다. 한참 걸어가던 엔디미온이 갑자기 제자리에 멈추었다. 비아네의 신성력으로 강화된 눈은 어둠을 관통했다.
막다른 길이었다. 지금까지 갓길 하나 없이 외길이었는데 갑자기 막다른 길이 나오자 모두가 당황했다. 지하무덤의 끝이 여기일 리는 없었다. 어딘가에 숨겨진 장치 같은 것이 있을지 몰랐다. 엔디미온 일행은 여기저기 흩어져서 벽과 바닥을 더듬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비아네는 안심했다. 그래, 이제 이 사람들도 돌아가겠지. 그는 벽을 더듬고 있는 엔디미온에게 가서 말했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더 갈 곳도 없어 보이는데.”
그 말을 하자마자 라이오넬이 말했다.
“어, 여기 뭐가 있는 것 같은데? 벽에 무언가 누를 수 있는 것이······.”
라우렌시오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라이오넬, 거기서 그대로 손 떼고 어디 있는지만 말해.”
라이오넬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우렌시오가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말했다.
“라이오넬?”
“라우렌시오.”
“왜?”
“벌써 눌렀다네.”
“야!”
덜커덕 소리가 났다. 바닥이 진동하고 불안한 소리가 났다. 모두가 긴장한 채로 주변을 둘러보는데 다행스럽게도 머리 위로 창칼이 떨어진다거나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온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바닥의 떨림도 멈추고 드르륵 하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오래 되서 장치가 고장이 난 건가?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덜컥!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모두가 반사적으로 천장을 보았다. 아니었다. 좌우의 벽도 아니었다. 열린 것은 바닥이었다.
“으아아아아악! 뭐야, 씨발!”
커다란 비명은 비다르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아래로 떨어지면서 비명을 질렀으나 그의 목청이 워낙 커서 묻히고 말았다. 비아네는 아래를 보았다. 어둠이 짙었다. 그의 눈으로도 아래를 볼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이었다. 그만큼 사악한 기운이 강력하다는 의미였다.
아래를 볼 수 없으니 몸이 약간 긴장했다. 바닥의 아래가 단순하게 뻥 뚫린 공간이 아닌 듯 떨어지면서 여기저기에 부딪혔다. 점차 멀어지는 듯한 비다르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엔디미온은 미간을 좁혔다. 설마 칸막이 같은 것이 있어서 서로 다른 곳에 떨어지게 되는 걸까.
비아네는 생각은 잠깐 접어두고 착지부터 할 준비를 했다. 여기저기서 쿵쿵 소리가 나는 게 바닥이 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바닥의 모습이 보였다. 교황의 여섯 기사 중 하나인 그의 신체는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돼 있었고 생각지 못한 위험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잘 벼려져 있었다.
몸을 둥글게 만 다음에 등부터 떨어진 후에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착지의 충격으로 몸 곳곳이 쑤시기는 했지만 뼈 부러진 곳은 없었다. 훌륭한 착지였다. 비아네는 혼자 만족하며 주먹을 흔들었다.
“훗, 정말 완벽한 착지였군. 이 멋있는 착지를 보여줄 사람이 없어서 아쉬울 정도야.”
“거 혼자 개폼은 왜 잡고 있는 거요?”
“으악!”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비아네가 뒤로 훌쩍 뛰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한 거리를 뛰어서 도망친 그는 어둠 속에서 나타난 엔디미온을 보고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갑자기 말을 걸면 어떡합니까? 깜짝 놀랐잖습니까!”
“당신, 정말로 교황의 여섯 기사가 맞소? 하는 꼴을 보니 아닌 것 같은데.”
“크흠, 방금 전의 추태는 잊어주십시오. 그런데 지금 여기에 우리 둘뿐인 겁니까?”
누가 봐도 억지로 말을 돌리는 모습이었다. 엔디미온은 픽 웃으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이게 본래 지하무덤에 있던 함정인지 아니면 잉굴라트가 침입자를 위해 준비한 함정인지는 모르겠소만 일단 전진해야겠지.”
“전진한다고요? 우리 둘이서 말입니까?”
“그럼 여기서 손가락이나 쪽쪽 빨고 있을 작정이오?”
그건 아니었기에 비아네는 입을 다물었다. 엔디미온이 한 발자국 움직이며 말했다.
“가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갑시다. 아, 겁이 나면 내 뒤에 숨어도 괜찮소.”
“하! 절 겁쟁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그거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저는 교황 성하의 여섯 기사 중 하나고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를 이끄는 자이며 약자를 돕고 사악한 것들로부터 세상을 수호하는······.”
구구절절 말이 많아서 엔디미온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비아네는 실컷 떠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곳의 어둠은 너무 짙어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엔디미온은 겁도 없이 성큼성큼 전진하고 있었다. 비아네는 자신이 주변을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는 사실 뭐라도 튀어나오길 바라는 마음이 아주 약간이지만 있었다. 그래야 엔디미온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등 뒤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날 때 일부러 요란하게 움직이며 검을 뽑았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악귀의 목이 일격에 잘렸다. 악귀가 비명 한 번 지를 새도 없이 처치한 그는 엔디미온을 돌아보며 은근하게 웃었다.
“하하, 위험할 뻔 했습니다. 제가 없었다면 말이지요? 제가 없었다면 당했을 겁니다? 안 그래요?”
짜라란. 관객의 환호를 바라는 마술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비아네를 보며 엔디미온은 무심히 생각했다. 뭐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