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비아네는 엔디미온이 한 쪽 눈썹만 들어 올리며 그게 뭐 어쨌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자 어깨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어쨌든 안 다쳐서 다행입니다. 가시지요.”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움직였다. 비아네는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후방에서의 습격에 대비했다. 이곳은 잉굴라트의 은거지였고 언제 어디서 적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은 일행들과 떨어져 단 둘만 있으니 더욱 조심해야 했다. 악마가 나타났을 때 한 번은 쓰러트릴 수 있어도 그걸 몇 번이나 아무 상처도 없이 반복할 수는 없었다. 다치고 지치면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비아네는 그 사실을 상기하고서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무사한지 걱정이 되는군요.”
“당신 부하들이 약해보이지는 않던데.”
“물론 우리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의 성기사들은 모두 강합니다. 그들은 너른 모래밭 위에서 고르고 골라진 한 줌의 모래와 같습니다. 수만 명의 성기사들 중에서 오직 수십 명만이 다섯 뼘 궤 기사수도회에 들어올 수 있지요.”
“그럼 걱정할 거 없잖소.”
물론 비아네는 부하들을 믿었다. 그들이 얼마나 재능 있는 성기사들이고 혹독한 훈련을 거쳤으며 수많은 실전을 통해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 그들이 쉽게 죽을 리는 없었다.
“엔디미온, 당신은 참 침착하군요. 일행들이 걱정되지는 않습니까?”
“걱정은 약한 사람들한테나 하는 거요.”
비아네는 엔디미온의 태도를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의 일행들이 강하다는 것은 아까 봐서 알고 있다. 그래도 그들이 처한 상황을 모르는데 아무 걱정도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무심한 믿음이었다. 혹시라도 그들 중 하나가 혼자 떨어져 악마와 악귀들에게 갈가리 찢겨죽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일행들에 대해서 무관심한 겁니까, 아니면 믿음이 넘치는 겁니까?”
“물고기가 물에 빠진 것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소?”
“무슨 소리입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요. 악마와 악귀들이 아무리 몰려와도 내 일행들을 죽일 수는 없소.”
믿음이 과한 것인지 아니면 무심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비아네는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어둠 속을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엔디미온은 별로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니었고 비아네는 긴장한 채로 주변을 확인하느라 말이 없었다.
한참 걷다가 비아네가 먼저 침묵을 깼다.
“이상하군요. 여기가 잉굴라트의 은거지라면 악마와 악귀들로 득실거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습격을 받은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군요. 왜 적들이 나타나지 않는 걸까요.”
그들이 지하무덤에 들어와서 악마와 악귀들을 만난 횟수는 총 세 번으로 아주 적었다. 이곳이 잉굴라트의 은거지가 맞는다면 적의 습격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말조심하시오.”
“말조심하라고요? 왜?”
“그런 말하면 나타나니까.”
그 말이 맞았다. 비아네가 왜 적들이 나타나지 않느냐고 말한 뒤 일 분도 지나지 않아서 어둠이 꿈틀거렸다. 전방과 후방에서만 적들이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좌우의 어둠 속에서도 무언가 움직이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오른쪽을 향해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내가 전방과 오른쪽을 맡겠소.”
그 다음 말은 하지 않아도 알았다. 비아네에게 후방과 왼쪽을 맡으라는 소리였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등을 맡긴 채로 전투 자세를 잡았다. 어둠 속에서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마뱀처럼 생긴 악귀들이었는데 두 발로 걷고 있었다. 손은 길쭉하고 그 끝이 낫처럼 날카로우니 몹시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다리는 두꺼웠고 근육에 탄력이 넘쳐 보이니 도약력이 상당할 듯 했다.
악귀들은 길쭉한 혀를 날름거리며 안광을 빛냈다. 눈의 개수만 보아도 적들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적의 숫자는 총 마흔. 하지만 엔디미온과 비아네는 겁을 내지 않았다. 엔디미온이야 이 정도 숫자는 백 년 전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로 적었고 비아네도 겨우 악귀 마흔 마리에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악귀들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서로가 반대 방향으로 뛰어나갔다. 악귀들이 찢어지는 듯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것들은 동시에 도약하며 엔디미온에게 낫 같은 손을 휘둘렀다.
빠르고 위협적이다. 엔디미온은 뒤로 물러나는 대신에 오히려 전진하며 두 손을 뻗었다. 악귀 두 마리의 얼굴을 붙잡고 악력으로 골격을 부쉈다. 그 다음에 바닥에 처박았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악귀들이 그의 몸을 베었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물론 고통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대단한 용력을 가졌어도 성배기사도 일단은 사람이니까. 엔디미온은 몸 곳곳에 생긴 상처에 신음 한 번 흘리지 않고 무쇠 같은 주먹을 악귀들을 향해 날렸다. 한 번 적중할 때마다 얼굴이 박살나고 목이 부러졌다. 잠깐 동안 주먹 몇 번 휘둘렀을 뿐인데 싸늘한 시체가 된 악귀들이 많았다.
아무리 악귀라도 몸이 너무 약했다. 성배기사의 몸에 작은 상처라도 내는 것을 보면 제법 위협적인 악귀인데 주먹 한 방에 뼈가 분쇄되고 숨통이 끊어지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공격적인 방향으로만 진화를 하고 방어는 도외시한 모양이었다.
“키에에에엑!”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달려드는 악귀들. 엔디미온의 눈은 적들의 움직임을 재빠르게 확인했다. 정면에서 세 마리, 오른쪽에서 다섯 마리. 할 행동은 정해졌다. 그는 오른쪽 다리를 뒤로 뺐다. 그리고 허리를 반쯤 돌렸다. 그 다음은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리며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채찍처럼 휘두르는 것이다.
부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악귀들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겨우 일 초의 망설임. 그것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기다란 다리가 철퇴처럼 악귀들의 머리를 일격에 박살냈다. 오른쪽에서 달려들었다. 악귀 다섯 마리의 머리가 공중에서 박살나며 그 뼛조각과 살점을 요란하게 뿌렸다.
하지만 아직 정면의 악귀 세 마리가 남아 있었다. 큰 동작에는 큰 허점이 생긴다. 악귀들은 그 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엔디미온의 오른쪽 다리는 아직 공중에 있었다. 여기서 다리를 접고 다시 바닥을 디딘 후에 다음 공격을 준비할 때까지 몇 초간의 시간이 있어야 했다. 그 사이에 악귀들은 엔디미온의 몸을 몇 번이나 벨 수 있었다.
완전히 무방비한 몇 초의 시간. 어떤 식으로 대처할 것인가. 엔디미온의 선택은 간단했다. 뻗었던 다리를 접는다. 사실 그것은 대책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 사이에 기회를 잡은 악귀들은 엔디미온의 몸을 크게 베었다. 옷이 너덜거리고 곧 찢어질 듯 했다.
하지만 상처는 없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상처는 없었다. 분명히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고 옷이 찢어졌으니 그 아래에 상처가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 악귀들은 당황했다.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이 남자는 마치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왜 엔디미온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는지 몰랐다. 멍청한 악귀라서가 아니라 그냥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압도적인 강함에게 잔재주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이게 끝이냐.”
엔디미온의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기회를 잡았으면 죽을 각오로 덤볐어야지.”
악귀 하나의 목이 부러지고 다른 하나는 머리가 터졌다. 남은 한 마리는 목을 붙잡힌 채로 머리부터 거꾸로 바닥에 처박혔다. 남은 악귀들이 마저 덤볐으나 그들 역시 같은 결과를 맞이할 뿐이었다. 엔디미온은 악귀들을 모두 처치하고 숨을 한 번 골랐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비아네 역시 악귀들을 거의 다 처리한 후였다. 엔디미온은 조용히 그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떠버리처럼 말만 많은 놈인 줄 알았는데 싸우는 모습이 제법 그럴 듯 했다. 신성력과 검술을 적절히 이용해 가면서 싸우는 그는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착실하게 적들의 목을 따고 있었다.
교황의 여섯 기사라고 해서 화려한 무용을 보여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석적인 싸움 방식이었다. 그러나 강력했다. 뛰어난 신체 능력이 뒷받침해주는 덕이었다.
엔디미온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만큼 기본에 충실하다는 뜻이고 성실하게 훈련에 임했다는 뜻이니까. 되도 않는 잔재주를 부리는 것보다 나았다. 백 년 전의 그레고리가 저런 유형이었다.
“죽어라!”
비아네가 이제 마지막 한 마리만을 남겨두고 있을 때였다. 그의 긴장도 약간 느슨해졌다. 그래서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어둠 속에서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있던 마지막 습격자를. 그것은 안광조차 꺼버린 채로 날카로운 비수를 숨기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해서.
그것이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냈을 때 비아네는 아차 소리를 냈다. 이미 검을 휘둘렀으니 막기에는 늦었다. 어딘가를 내줘야 했다. 입맛이 쓰기는 하지만 큰 손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상처야 신성력으로 낫게 하면 되니까. 그는 검을 회수하고 다음 공격으로 악귀를 끝장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시야가 가려졌다. 거대한 벽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엔디미온이었다.
“당신 어째서······?”
악귀의 공격은 엔디미온의 등을 베었다. 하지만 그저 옷을 크게 잘랐을 뿐이었다. 이미 걸레짝이었던 상의가 완전히 찢어져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약자를 돕는 게 내 의무니까.”
엔디미온이 뒤로 돌아서 일격에 악귀의 목숨을 빼앗았다. 비아네는 말문이 막혔다. 엔디미온이 한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등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의 등에 그려진 그림.
성배였다.
“다, 당신······.”
엔디미온은 보통 때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친 곳 없으면 갑시다. 미적거릴 시간 없소.”
비아네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엔디미온의 등에 고정돼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게 그냥 그림일지도 모르고 아무 의미도 없을지 모른다. 세상에는 괴짜가 많으니 등에 성배를 그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의 머리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저것은 신성했다. 황금으로 만들고 장미의 가시 달린 줄기들이 서로 얽혀 위로 올라가는 그림. 누가 저것을 보고 가짜라고 생각할 수 있으랴? 비아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자신이 왜 엔디미온에게 끌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저것이다. 바로 저것 때문이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것이 성배다.
“내가 지금부터.”
엔디미온의 목소리에 비아네의 허리가 절로 꼿꼿해졌다. 그는 자세를 바로 하고 떨리는 목소리를 뱉어냈다.
“마, 말씀하시지요.”
“말을 놓을 생각인데 할 말 있으면 하시오.”
“아, 아닙니다! 제발 말을 놓아주십시오! 할 말이요? 하나도 없습니다!”
어찌 감히 불만을 말하랴. 그것은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본능적인 복종이었다.